수능을 앞둔 청소년들이 대학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시작은 우연에 가까웠다. 대학입시 거부 선언에 동참한 따이루(별명‧19) 씨는 그는 "어느 해부턴가 청소년 인권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 중에 우연히 1993년생이 많았다"고 했다. 이들 사이에서 농담반 진담반으로 "우리 나중에 대학 입시를 거부하면 어떨까"라는 말이 오갔다.
2011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다가오자 이들은 '진짜로' 대학입시를 거부하기로 했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 열댓 명이 모였다. '대학입시거부로 세상을 바꾸는 투명가방끈들의 모임'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
따이루 씨는 요즘 바쁘다. 당장 오는 8일에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희망의 버스 행사'에 참여해야 한다. 그가 타는 버스 이름은 '대학입시 거부 버스'다. 희망 버스 행사가 끝나면 대학 입시 설명회를 패러디한 '대학입시 거부 설명회'도 연다. 수능 시험이 치러지는 11월에는 대학 입시를 거부 운동에 공감하는 사람들과 집회도 연다.
물론, 몇 명이 수능을 거부한다고 해서 어떻게 세상이 바뀌느냐는 냉소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그는 "변화가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진 않는 건 확실하지만, 적극적인 행동들이 변화를 앞당길 수는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투명 가방끈'들은 '줄 세우기 위주의 교육'을 거부한다. 이들의 움직임이 단순히 입시 거부만으로 그치지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대안 대학이나 시민 대학 같은 교육공동체를 만들자는 계획도 있고, 대학 거부자들이 뭉치는 생활조합도 만들 계획이에요." 청소년들의 "재미있게 살기 위한 후속 작업"은 쭉 이어진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편집자>
ⓒ대학입시거부로 세상을 바꾸는 투명가방끈들의 모임 |
"우리는 투명가방끈이다"
프레시안 : 대학입시 거부를 준비하는 모임은 어떻게 생겨났나?
따이루 : 어느 해부턴가 청소년인권활동가 네트워크, 교육공동체 나다, 아수나로, 일제고사 반대 청소년 모임 say no등 청소년 인권 운동하는 단체에 1993년생들이 이상하게 많았다. 농담 삼아서 나중에 대학입시를 거부하면 어떻겠느냐고 별 생각 없이 얘기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1993년생들이 수능을 볼 수밖에 없는 날이 정말 왔고, 그들 중심으로 진짜 해보자고 제안과 얘기가 돌았다. 8월에 제안서를 돌렸다. 5명이 모였다. 지금은 열댓 명이 됐다. 대안학교 출신이나 이런 운동에 관심 있던 청소년들이 참가 의사를 밝힌 상황이다.
프레시안 : '대학입시거부로 세상을 바꾸는 투명가방끈들의 모임'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따이루 : 이 모임을 준비하는 친구들과 모임을 준비했다. 그 자리에서 활동 방향과 이름을 정했다. 이름 후보가 '투명가방끈들의 모임'과 '학벌 파괴자들의 모임'이었는데, 첫 번째가 좋다고 해서 채택됐다. 보통 학벌이 낮으면 가방끈이 짧다고 얘기한다. 가방끈은 공부를 상징하지만, 대학에 가거나 경쟁 레이스에 참여하는 것만이 교육은 아니다. 교육공동체에서 인문학 수업을 들을 수도 있고, 인권 운동하면서 세미나도 하고 거기서 보고 듣고 느끼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공부인데, 사람들이 그런 건 공부라고 취급 안 한다. 그래서 우리는 투명 가방끈이다. 투명 가방끈이라는 어감도 좋지 않나(웃음).
프레시안 : 왜 대학입시를 거부하나?
따이루 : 지금의 대학 경쟁 시스템 자체가 내가 하고 싶은 교육, 나에게 맞는 교육과 다르다. 나는 심리학이나 광고를 공부하고 싶다. 그걸 공부하기 위해서는 수학, 과학, 영어를 다 잘해야 한다. 내가 배우고 싶은 걸 공부하기 위해 하고 싶지 않은 공부까지 억지로 하고 경쟁하는 게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획일적인 교육을 강제하고 학생들에게 경쟁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잘못된 것에 맞추기보다는 잘못을 바꿔보자고 해서 참여했다.
참여하는 다른 친구 중에는 사실 인권 운동을 하면서 동시에 대학에 가고 싶어 했던 사람도 있다. 그런데 막상 대학에 가려니까 잘사는 집안이 아니라서 돈이 없었다. 비싼 등록금 때문에 대학을 안 가면서 동시에 못 가게 된 친구도 있다. 입시제도가 부당하다는 데는 다들 같은 뜻이다.
"진짜 배우고 싶은 것, 언제 배울 수 있나?"
프레시안 : 지금 잠깐 참고 나중에 대학에 가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 되지 않느냐는 질문은 안 받나?
따이루 : 그런 질문 많이 받았다(웃음). 그런데 지금 대학에서도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는 처지가 아니다. 예를 들어 서강대는 모든 학생에게 영어 듣기 수업을 강제한다. 대학생들이 초등학생처럼 밤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영어 듣기를 한다. 대학도 배우고 싶은 걸 배우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는 많이 없어졌다. 굳이 그런 곳에 가기 위해서 내가 오늘을 포기해야 하는지 계산해봤다. 별로 이득이 아닌 것 같다.
일단 대학에 가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라는 질문 자체도 교육을 대학이라는 틀 안에서만 생각하는 것이다. 대학 밖에서도 배우고 싶은 것을 공부할 수 있게 만들어도 그런 걱정을 벗어던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면서도 배울 수 있는 걸 마음껏 배우는 사회를 만드는 게 중요한 일이다.
▲ 대학입시 거부를 선언한 따이루 씨. ⓒ대학입시거부로 세상을 바꾸는 투명가방끈들의 모임 |
따이루 : 흔히 말하는 대안 교육 역시 입시에 찌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대학이라는 성 안이 아니라 대학 밖에서도 어디서나 누구나 돈이나 입시 성적에 대한 걱정 없이 배울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런 길은 대학 평준화에서도 생길 수 있고. 대학 밖의 교육 시스템을 활성화시키는 데서도 나올 수 있다.
프레시안 : 제도권 교육이 획일적이지 않게 바뀐다면 그때는 대학에 갈 생각이 있나?
따이루 : 만약에 내가 지금 하는 고민들이 교육 시스템에 어느 정도 반영돼 대학 평준화가 된다면, 혹은 한국 사회에 학벌이 없다면 나도 당연히 대학에 갈 것 같다. 대학입시 거부 운동을 같이 하는 친구 중에도 자기가 배우고 싶은 공부 과목은 하나씩 있다. 우리의 바람이 교육 시스템에 반영되면 재미있게 공부할 것 같다.
프레시안 :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결심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갈등은 없었나?
따이루 : 거의 모두가 대학을 가고 있고 대학에 안 가면 무시 받는다. 심지어 운동 진영 안에서도 활동가들이 고학력자들이다. 서울 안에 있는 좋은 대학 나온 사람들이 활동가 중에도 많다. 실제로 어떤 단체에서는 활동가 모집 공고에 대학졸업 공고 내는 경우도 있다. 여기도 이런데 운동 진영 바깥은 오죽하겠나. 고민이나 갈등이나 주저함은 분명 있는데, 그런 것도 바꿔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학을 안 가는 동시에 못 간다. 대학을 선택하기 위해서 넌 이만큼 올라와야 된다고 대학에서 요구하지만, 그 요구를 못 지키고 있다. 나는 대학에 가기보다 그러한 요구를 바꿔내고 싶다. 경쟁 레이스에 끼어드는 것보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면서 하고 싶은 것을 준비하는 게 훨씬 나에게 중요하고 의미 있다. 갈등도 되고 두려움도 있지만 계속 갈 거다.
"너희가 입시 거부해도 세상은 안 바뀐다?"
프레시안 : 겨우 몇 명이 입시를 거부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냉소도 많이 겪었을 것 같다.
따이루 : 변화가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대학을 가지 않고 거부하는 당사자로서의 절절함도 있다. 이런 적극적인 행동들이 가만히 앉아있는 것보다는 변화를 앞당길 수 있다. 기존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불복종 운동이 지금껏 사회를 바꿨던 적극적인 에너지이기도 했다.
설령 사회 제도를 바꾸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질문은 던지는 것 같다. 68혁명에 대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거기서 사람들이 "너희는 혁명에 실패했다. 정권을 창출하지 못했지 않느냐"라고 질문했다. 답변은 이랬다. "우리는 사회는 못 바꿨지만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꿨다." 그 말이 참 와 닿았다.
트위터에서 대학 입시를 열심히 준비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화를 냈다. "너희는 왜 나를 흔드느냐, 그렇다면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내가 잘못했다는 것이냐, 수능도 얼마 안 남았는데 왜 이런 식이냐"라고 했다. 일종의 자기 방어일 게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벌이는 수능 거부 운동이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걸어왔던 길에 대해서 한번쯤 뒤돌아보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뜻이기도 하다.
프레시안 : 부모나 친구들, 교사 등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
따이루 : 부모님도 내가 대학에 가서 남들만큼의 스펙을 갖고 살아가면 좋겠다고 기대하긴 하지만, 그런 길을 굳이 강요하지는 않는다. 고등학교 갔을 때도 부모님이 "공부도 안 좋아하는데 인문계에 갈 필요가 있느냐"면서 "전문계에 가거나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낫다"고 하셨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된다는 주의다.
친한 학교 친구들은 "너는 용기 있다. 그런 행동을 통해서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자기가 나서기는 무서워한다. 이 사회를 지탱하는 건 그런 두려움 같다. 각자가 가고 싶은 길이 있으니 친구들에게까지 강요할 수는 없다. 그래도 친구들이 응원은 해준다. 현실성이 있겠느냐고 우려도 해준다. 너 혼자 불타버리다 끝나는 것 아니냐고들 하는데, 불도 한번 나다 보면 언젠가는 퍼지지 않겠나.
선생님도 "너 혼자 하면 힘들지 않겠느냐"고 우려하더라. 그래서 나는 그 걱정과 우려를 후원으로 풀어달라고 말한다(웃음). 이런 운동에 공감하지 않는 선생님들의 반응은 만나지 않아서 모르는데 예측해보면 두 가지일 것 같다. 하나는 "넌 원래 그랬으니까" 하고 혀를 쯧쯧 차거나, "넌 실패자야"라고 욕하는 반응이다.
다른 한 반응은 "그럼 애들을 어떻게 가르치고 무얼 갖고 평가하나"라는 질문이다. 그 선생님들도 몇 십 년 간 가르치면서 평가하고 나누는 것 말고는 학생 개개인의 적성이나 다양성을 찾아내거나, 학생이 뭘 하고 싶은지를 고민하는 식으로 교육해본 적이 없다. 정답을 세뇌시키는 게 아니라 다양한 생각을 같이 얘기하면서 수업할 수 있는데 말이다. 열린 사고를 가지면 그분들도 우리와 같이 할 수 있지 않을까.
"똑같이 지각했는데, 성적에 따라 다른 대우"
프레시안 : 청소년 인권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따이루 : 중학교 1학년 때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때 한 영어선생님이 "내가 강단에서 애들 잘 가르치다가 너희가 불쌍해서 와줬다"면서 모욕적인 말을 자주했다. 그 선생님과 몇 번 충돌이 있었다. 학생이 교과서를 안 가져 오면 그 선생님한테 교과서 페이지 수대로 맞았다. 영어책은 특히 뒤에 해설까지 있어서 300페이지가 넘는데, 목 뒤로 고개를 젖히고 모욕적으로 머리를 300대 때렸다. 그 영어 선생님을 괴롭히는 방법을 인터넷에서 찾다가 '아수나로'라는 청소년 인권단체 활동가의 블로그를 알게 됐고, 아수나로 카페를 찾으면서 시작했다.
프레시안 : 줄 세우기식 경쟁이나 학생 인권 침해에 반대한다고 했다. 학교 다니면서 어떤 점이 제일 문제라고 생각했나?
따이루 : 고등학교 때 시험 기간이었다. 내가 잠이 많다. 지각해서 지각반에서 공부하는데 선생님이 지각하는 애들 머리를 툭툭 치면서 "시험 날에 지각하느냐"고 했다. 거기까진 단련됐다. 신경 안 쓰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애들 한 명 한 명씩 머리를 치면서 "너희같이 공부 못하는 애들은 학교 명예나 깎아먹지 이럴 거면 자퇴하라"고 얘기했다. 그런데 공부 잘하는데 늦잠 자서 늦게 온 애들한테는 "공부 열심히 하렴"이라고 말하는 게 너무 화가 났다. 성적이 전부가 아닌데 내가 왜 여기서 모욕적인 말을 들어야 하는가 하고.
"정말 친했던 두 친구가 수시 전형 이후 사이 틀어져"
따이루 :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던 작년에 학교를 자퇴했다. 가장 큰 이유는 대학 때문이었다. 나는 대학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딱히 하지 않았다. 근데 친구들은 다 대학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로 대학이나 성적 얘기만 하니 대화에 끼어들 데가 없었다. 애들이 어느 대학에 갈지 계획을 세우는데 옆에서 "너희들 이런 교육 제도가 문제라고 생각하진 않니?"라고 말할 순 없지 않나(웃음). 그런 상황에서 소외되고 나만 다른 사람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입시만이 중심에 있는 분위기를 견디기가 힘들어서 나왔다. 내가 학교에 다녔던 역사를 돌이켜보면, 늘 중심에는 대학 입시가 있었다. 선생님이 애들 머리 잡고 때리는 것도 다 입시 공부하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얘기를 듣는 것도 힘들었다.
이런 사례도 생각난다. 일주일 전에 수시 전형이 있었다. 청소년 인권 운동을 하는 고3 활동가가 두 명 있었는데, 둘이 같은 대학교의 같은 전형을 넣었다. 한 명이 다른 친구를 도와줬다. 정보도 넘겨주고 조언도 해줬는데, 뒤늦게 도움 받은 친구가 합격하고 옛날부터 준비하고 도와준 친구는 탈락했다. 그러자 둘 관계가 정말 친했는데 갑자기 관계가 싸해지면서 끊어졌다. 서운함, 질투라고 하긴 복잡한 감정이 섞여있으니 서로가 잘 안 만나더라. 그걸 옆에서 보니 "교육이 인간관계를 파탄내는구나" 싶었다. 그 둘뿐만이 아니다. 아무리 친구들이어도 자기소개서나 포트폴리오도 서로 안 보여준다. 나중에 학교 친구들이 도와준 친구한테 미쳤다고 하더라.
그 친구가 그 사건 때문에 너무 힘들어했다. "미워하면 안 될 것 같은데, 가족과 주변의 압박이 있으니 합격한 친구가 미워지고 후회된다"고 했다. 그런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역설적으로 내가 대학입시 거부 운동을 해야 할 이유가 더 분명해졌다.
"김예슬 선언엔 열광하지만, 지방대학생 자살은 뉴스 안 돼"
프레시안 : 지난해 고려대학교에 다니던 김예슬 씨가 "나는 대학을 거부한다"며 자퇴 선언을 해서 세상이 떠들썩했던 적이 있다. 김예슬 선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따이루 : 용기있다는 생각도 들면서 동시에 서러웠다. 얼마 전에는 카이스트에서 학생들이 자살해서 또 난리가 난 적도 있다. 고려대 학생이 대학을 거부하고 카이스트 학생이 자살하면 뉴스에 난리가 나고 사람들이 열광한다. '이렇게나 잘못된 제도'라면서.
그런데 죽어나는 초‧중‧고등학생, 지방대 학생들은 카이스트 학생의 수십 배다. 이 학생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뉴스거리가 안 된다. 지방대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도 자살하거나 지금의 교육제도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면서 대학을 떠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것에는 관심을 안 갖다가 (김예슬 사건 같은 게 생기면) 다들 관심을 가지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라도 알려지니 다행이다, 기득권을 포기하는 용기가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와 동시에 이 사회는 힘 있는 사람의 이야기에만 목소리를 귀 기울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서 오는 일종의 서러움이 내가 이 운동을 하는 계기를 불어넣어주기도 했다.
누군가는 대학입시 거부 운동하는 우리들을 '루저'라고 했다. 너희 인생이 실패할 것 같으니까 변명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 운동은 원래 사회적 소수자들이 하는 것이다. 명성 있고 대단한 분들이 나와서 운동하는 것 못지 않게,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필요하다.
프레시안 : 앞으로의 계획은?
따이루 : 10월 8일 희망버스 행사에 함께 참여해서 '대학입시 거부 버스'에 탈 것이다. 대학입시 거부설명회 행사도 연다. 입시설명회를 패러디한 행사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뿐만 아니라 초·중·고등학생 학생, 학부모, 교사에게도 질문을 던지기는 계기이기도 하다. 대안 학교나 지역에 돌아다닐 계획이다. 수능이 치러지는 11월에는 대학입시를 거부하는 청소년과 20대 대학생과 대규모 집회를 준비하고, 수능 당일에는 대학입시 거부 캠프 행사를 할 예정이다.
내년에는 총선과 대선이 있다. 그런데 내년부터 우리가 선거권 얻는다. 멋진 타이밍이다. 우리 문제 의식을 담은 교육 정책을 만드는 계획도 갖고 있다. 대안 대학이나 시민 대학같은 교육공동체를 만들자는 계획도 있고, 사회가 요구하는 학력에 미달하는 이들이 뭉치는 생활조합 같은 것을 만들는 제안도 있다. 이런 후속 작업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대학입시거부로 세상을 바꾸는 투명가방끈들의 모임 |
"나에게 대학이란 '1000만 원짜리 청심환'"
프레시안 : "한국의 고등학생이란 ooo이다, 나에게 대학이란 ooo이다"라고 한마디로 정의해 본다면?
따이루 : 한국의 고등학생이란 다람쥐다. 내가 요즘 꽂혀있는 단어다. 교육도 사회도 쳇바퀴 같다. 더 좋은 고등학교, 더 좋은 대학교, 더 좋은 직장을 향해 다들 끊임없이 달리지 않나. 쳇바퀴 밖으로 도망치는 게 필요한 시점이다.
나에게 대학이란 1000만 원짜리 체면 세우기 같다. 그런데 1000만 원 주고 체면 세우기는 너무 아깝다. 아니면 1000만 원짜리 청심환? 모두가 좋은 대학교에 갈 수는 없다. 성적 맞춰서 가지만, 그렇다고 대학에 안 가기도 불안하니까 일단 청심환처럼 먹는 거다. 그런 상황에서 대학이 1000만 원짜리 청심환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프레시안 : 마지막 질문이다. 지금까지 활동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와 20살 이후의 계획에 대해 들려 달라. 꿈이 뭔가?
따이루 :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35만 원짜리 사무실 얻었을 때가 제일 행복했다. 예전에는 청소년 네 명이서 세계인권선언을 기념한다고 촛불 켜고 앉아있었는데, 몇 년 사이에 많이 성장한 게 뿌듯하다. 그만큼 후원이 늘었다는 것은 청소년 운동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었다는 증거다. 옛날에는 비청소년들이 회의할 때 청소년 활동가를 안 부르다가 요즘에는 제안도 들어온다. 청소년 운동의 위치가 많이 변한 것 같다.
20살이 되어도 인권운동은 계속하고 싶다. 먹고사는 것과는 별개로 인권, 사회, 교육운동에 참여하고 싶다. 카페를 차릴까 하고 생각은 하는데 가능할까 싶기도 하고. 부자가 되진 않을 것 같다. 평범하게 살면서, 동시에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지 않을까? 내 꿈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것이다. 잘못된 것에 침묵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 하는 것, 당당하게 사는 것이 꿈이다. 돈 벌려고 발버둥 치느라 많은 걸 놓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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