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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봉황새가 된 그 장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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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마침내 봉황새가 된 그 장닭 [김대중을 생각한다]<26> 老年에 얻은 大意
한국사회에서 '정치인' 김대중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긍정적으로, 어떤 사람은 부정적으로,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인물로, 또 어떤 사람은 단순히 지역주의의 시혜자로 보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대중적인 관점이라면 정계나 학계 또는 재야나 보수, 진보 등의 눈길도 여러 가지로 상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관점들은 다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식밖에 안 된다. 사랑의 눈이건 미움의 눈이건 간에 한 인물의 인격적 실상을 여실히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사람의 모양을 볼 때 앞에서 보는 사람은 뒤를 못 보고, 뒤에서 보는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고 우측에서 보는 사람은 좌측을 보지 못하고, 좌측에서 보는 사람은 우측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정치인 김대중에 대한 사람마다의 견해는 그 나름에서 본 일부분이지, 전체는 아니다. 인물을 평하는 데 정답은 없다. 그저 여러 관점이 있을 뿐이다.

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정면에서 보고 싶은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그럴 필요가 나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항시 측면에서 건너다보았다. 그것도 가까이에서가 아니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말이다.

내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80년대 외교구락부에서였다. 그 때 박종철 군의 죽음이 언론에 보도된 직후라서 그에 대한 재야의 대책을 모색키 위한 모임이 외교구락부에서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민주화운동을 하기 위해 창립된 정토구현전국승가회 의장 소임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 대표로 그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어느 외국 TV 기자와 녹화 중이었다. 어떤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기자의 질문에 더듬지도 않고 영어로 척척 답변하는 것을 보며 '영어회화 실력이 대단하구나', 라고 혼자 감탄했다.

얼마 후 회의가 시작되고 맨 먼저 김대중 전 대통령, 이어서 김영삼 전 대통령 순으로 인사말이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진지하고 심각하게 당시의 시국을 진단했다. 그 내용을 듣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절박한 시기에 서 있음을 실감케 해 주었다. 약 십여 분 동안의 짧은 시간이었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잘하는 말솜씨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뒤이어 김영삼 전 대통령은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앞에서 김대중 의원이 다 했기 때문에 생략하겠다'고 하면서 간단히 마무리했다. 수고할 것도 없이 앞에서 말한 사람의 내용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기지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나는 그날 그것만으로도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를 보내는 데 부족할 것이 없었다.

그 후 어느 해 여름, 나와 지선 스님에게 점심을 함께 하자고 연락이 왔었다. 지선 스님과 나는 모 의원의 안내를 받아 여의도에 있는 음식점으로 갔다. 복집이었다. "두 스님이 계시는 절에 유독 빈대가 많다고 하기에 오늘 제가 고기 맛을 좀 보여 주기 위해 이렇게 모시게 되었습니다." 인사를 하고 앉자마자 김 전 대통령은 그 특유의 유머가 반짝이는 한 마디를 웃으며 했다. 동석한 네 분의 의원들도 함께 웃었다.

유머 하면 지선 스님도 어디가나 지지 않는다. "절의 빈대를 씨를 말리게 하려면 복어탕 한 그릇 정도로는 어림도 없을 것인디요." 지선 스님의 한 마디에 좌중은 또 한 번 웃었다. 한 의원은 나를 건너보며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스님들께서는 순 채식만 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본래 수행자들의 식생활의 전통은 걸식이에요. 얻어먹는 거죠. 얻어먹는 주제에 찬 밥, 더운 밥 가리게 되면 주는 사람에게 부담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주는 대로 받는 것입니다."

이 때 직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좌중을 둘러보고 말했다. "조금 전 청화 스님이 하신 말 잘들 들었지. 오늘은 모두 나한테 걸식을 온 것이니까 내가 주는 대로 먹어야 해." 그러고는 무슨 탕인가를 통일해서 주문했다. 일반인과 함께 모여 식사하는 자리에서 유머를 발휘하여 스님들이 편안하게 먹도록 배려하는 김 전 대통령의 마음 씀씀이가 느껴지는 자리였다.

몇 년도쯤인가는 분명하게 기억되지 않지만 어느 날 종단의 중진스님들이 십여 명 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었다. 무슨 이야기 끝에 그리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화제는 김영삼과 김대중 두 인물에게로 옮겨가 희다느니, 검다느니 또는 길다느니, 짧다느니 각자의 소견들을 토로하게 되었다. 어느 스님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어느 스님은 우호적인 관점에서 그런가 하면 어떤 스님은 비판적인 관점에서 두 분에 대한 평소의 소회들을 적나라하게 말했다. 그 중 교계 한 신문의 사장으로 있는 스님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지난 대선 때 작가 이○○ 씨가 ○○신문의 부탁으로 김대중, 김영삼, 이 두 분의 취재를 위해 일정기간 동안 수행을 했다는 거야. 그때 처음으로 두 분을 가까이에서 보게 되었는데 두 분은 너무나 대조적인 면을 가지고 있더라는 거야.

먼저 김영삼 후보를 수행했는데 그 분의 약점은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라더군. 그러다보니까 항상 측근들에게 무언가를 묻게 되는데 그 때마다 측근들은 묻는 것에 대한 말을 하며 자긍심을 갖더라는 거야. 곧 자기는 김영삼 후보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는 거야. 그리고 그로 인해서 그는 더욱 더 그 분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계기가 된다는 거야. 따라서 그것이 김영삼 후보가 사람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되더라는 거야. 결과적으로 김영삼 후보의 아는 것이 없는 약점이 오히려 강점으로 작용되더라는 거지.

그에 반해 김대중 후보는 아는 것이 너무 많더라는 거야. 곧 측근들이 무슨 말을 꺼내면 김대중 후보는 해박한 식견과 명석한 논리로 그것은 이러이러하고 또 저것은 저러저러하다고 다 회통을 쳐버린다는 거지. 그러면 측근들은 주눅이 들어 입을 열지 못하더라는 거야. 책깨나 읽었다고 자부해온 이 작가도 김대중 후보 앞에서는 한없이 쪼그라들어 기를 펴지 못했다는 거야.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야 불문가지지. 그러니까 측근들은 김대중 후보 앞에 스스로 왜소해지면서 무용지물이라는 자괴감을 갖게 된다는 거야. 그로 미뤄 김대중 후보의 높은 식견은 대단히 돋보이는 장점이지만, 사람을 질리게 하므로 오히려 단점으로 보였다는 거야."

그 때 그 스님의 말이 내 의식 속에 각인되어선지 모르지만 그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날 때마다 그 말이 공감되었다. 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을 들을 뿐 동석한 다른 사람들은 별로 말이 없었다. 아마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만큼 독서를 많이 하고 知的인 노력을 부단히 하신 분은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프레시안(손문상)
1997년 12월 어느 날이었다. 대통령 선거일을 며칠 앞두고 여의도에서 모임이 있었다. 재야인사 10여 인과 함께였다. 바쁜 일정 중에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잠시 시간을 내어 자리를 마련했던 것이다. 인사말에서 고난의 정치 여정을 술회하고 마침내 국민들이 염원하는 정권교체가 이루어질 것 같다고 예감하면서 '다음에는 청와대에서 만납시다'. 라고 했다. 그 말을 하는 얼굴에는 도장이 하나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믿어도 된다는 의미였다. 마침내 천지개벽이 되었다. 헌정 이후, 계속되는 독재자들의 행군 앞에 패배자로만 만신창이가 된 민주주의가 드디어 승리한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은 그런 점에서 다른 대통령들과 동등한 선상에 놓을 수 없다.

대통령이 된 얼마 후 약속한 대로 청와대에서 만났다. 만찬이었다. 그런데 그 때 내가 먹을 음식은 특별히 주문 한 것 같았다. 다른 인사들 앞에는 육류가 나오는데 나에게는 끝까지 채식만 나오는 것이었다. 스님의 신분을 고려하여 식단을 따로 준비하게 한 것을 생각하니 한편으론 고맙기도 하고, 1인분만을 따로 준비했을 요리사들의 노고를 생각하니 미안하기도 했다. 그 후로도 몇 차례 오찬이나 만찬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음식은 따로 준비되었다. 이처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스님들에게 사적인 자리에서는 넉넉한 인심이나 유머로 편안하게 공양하도록 배려해 주면서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예의를 도외시하지 않았다.

앞에서 술회한 이런 것들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잊을 수 없는 모습이다. 사실 나는 정치인도 아니고 그분과 어떤 이해관계에 놓인 입장도 아니므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바라보는 나의 눈길은 정서적으로 순수하다. 이것이 다른 사람과 비교가 되는 나의 상이점일 것이다.

그런 가운데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만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첫 대결에서 대통령이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그 분은 독재가 정치에 있어서 얼마나 큰 독인가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안하무인으로 교만했을지도 모른다.

또 만일 전두환 정부 때 사형선고를 받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모르긴 해도 그 분은 민주주의의 열망이 생명에까지 깊이 점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힘을 가진 자 앞에 힘없는 자가 얼마나 작은 것인가도 실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만일, 노태우 전 대통령과 맞선 선거에서 승리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었다면 그 분은 보다 더 거시적이고 높은 정치적 안목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어떻게 하면 국민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그런 진지한 고민도 없었을 것이다.

만일, 만일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eoruf에서 대통령 당선이 되었었더라면 어땠을까? 어쩌면 그 분은 대통령의 권한을 누리는 데에 자족하고 국가의 관리능력은 부실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민의에 분노만 안겨 준 대통령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 그렇게 되지를 않았다. 그분들에게 고배를 마시는 패배자가 되었다. 그렇다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패배자는 아니었다. 아주 가치 있고 유익한 패배였다. 곧 그 분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패배를 당하면서 그 분들의 미숙하고 모자라고 부정적인 면들을 충분히 보완하는 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분들을 반면교사로 삼은 것이다. 그로 인해 그분은 훨씬 유연하고 지혜롭고 원숙한 인격자로 다듬어진 것이다. 그런 다음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다. 그것도 국가가 부도 상태의 위기에서 국민들은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부른 것이다.

'준비된 대통령' 그것은 빈 말이 아니었다. 정책의 시행착오나 실기가 없었다. 그야말로 미리 다 알고 준비한 물건을 하나하나 때 맞춰 꺼내듯, 시의에 맞는 시책과 결단은 참으로 노련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보았다.

특히 내가 눈여겨 본 것은 대통령이 되어서도 민주주의의 기조 위에서 국정운영의 방향을 모색한 점이다. 경제를 비롯한 모든 국가의 발전은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칙이 확고했다. 그러면서 보수와 진보의 상거된 거리를 어느 정도 좁히는 정책 결정은 정치적 퇴행과 급진 사이의 조화의 묘를 살리는 것도 나의 눈길을 끄는 대목이었다. 예컨대 집회결사의 자유, 민주노총의 합법화, 전교조의 합법화는 역대 어느 정부에서도 완강하게 거부했었지만 김 대통령은 그것도 민주주의의 요소로 존중한 것이다. 이외에도 6·15 선언을 통한 남북 평화공존, 인권의 법적 장치 등등의 김대중 대통령이 아니면 언감생심일 치적들이 많다.

헌정 사상 최초의 정권교체를 성취한 대통령, 그리고 세계의 지도자들로부터 인정받은 대통령, 이런 대통령이 된 것은 모든 지식과 경륜과 야심이 푹 익는 노년에 대의(大意)를 얻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 길고 지루한 고난과 시련이 군더더기나 풋기나 만용 같은 흠결들을 말끔히 제거시킨 김대중 대통령을 만든 것이다.

새벽을 크게 울던 그 장닭
검은 부리와 발톱에
쪼이고 할퀴고, 쪼이고 할퀴어
털이 다 빠지고
벼슬은 피투성이인 그 장닭.
그러나 죽지 않고 눈부신 날이 왔다
고난의 세월이 심은 벽오동에 올라
마침내 봉황새가 된 그 장닭.


* 청화(靑和) 스님은 1944년 전북 남원 출생으로 1964년 화계사에서 혜암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1972년 해인사에서 고암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197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돼 시인으로도 활동했으며, 정토구현전국승가회 의장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의장(1986년),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의장(1992년),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장(2004-2009년) 등을 역임했다. 현재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상임고문, 참여연대 공동대표, 6.10항쟁 계승사업회 이사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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