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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정권교체, DJ가 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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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2012 정권교체, DJ가 있었다면… [김대중을 생각한다]<30> 진보·개혁의 명분을 놓지지 않았던 DJ
처음에는 민주당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분들이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은 여기저기서 그런 말씀을 하는 분들이 많다. "지금처럼 어수선한 상황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처럼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 꼭 필요한데…." 말씀들이 너무나 간절하다.

김대중 대통령이 돌아가시기 전 우리사회의 앞날을 걱정하시던 모습,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고 강조하시면서 마치 제2민주화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던 말씀과 행동들이 우리의 가슴에 깊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김대중 리더십이 다시 언급되는 것은 특권부자들의 정당인 한나라당 정권과 조·중·동 연합세력의 이른바 부자 프렌들리 정치와 정책은 이제 끝나야한다는 절박한 민심 때문이다. 민심은 돌아섰다. 돌아선 민심이 결집되고, 열정이 조직될 수 있도록 정치인들이 뭔가를 보여 달라는 간곡한 바람이 거기에 쟁여 있는 것이다.

▲ 김대중 전 대통령 ⓒ연합

97년 말의 정권교체는 한국과 한반도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다. 기대하는 만큼의 발전이 이뤄지지 못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더 이상 구역질나는 후퇴 같은 것은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널리 자리 잡게 된 것은 분명하다. 정권교체를 통해 우리민주주의가 발전했다. 그러나 민심을 잃게 되면 정체와 역주행에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을 지금 뼈아프게 확인하고 있다.

97년 정권교체와 2002년의 정권재창출은 자랑스러운 역사다. 김대중이라는 지도자가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IMF 위기가 오지 않았다면 정권교체가 가능했을까? (그렇다고 IMF 위기가 온 것이 잘됐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고…) 1997년 외환위기 당시 YS와 이회창 총재를 중심으로 한 기득권지배세력이 이미 국가 경영능력을 상실해 버린 점을 적극적으로 널리 알렸고 국민들께서 결단을 내려주셔서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할 수 있었다.

우리국민 모두 IMF 위기라고 한다. 그 이유는 IMF가(아니 미국이 배후에서 주도해서) 병 주고 약 준 것을 다 알기 때문이다. 97년 동남아시아 태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의 전염으로 직격탄을 맞았던 우리 한국국민은 참담했다.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초긴축, 초고금리, 노동자 대량해고, 금융기관 해외매각 등의 조치는 가혹했다. 그러나 97년 외환위기 바로 직전까지 IMF 총재였던 캉드쉬를 비롯한 IMF 임직원들이 "한국경제의 '펀더멘탈'이 좋다, 튼튼하다" 하면서 국제시장에서 투자와 차입을 권유했던 일들은 편리하게도 깨끗이 잊혀버렸다. 1997년엔 마치 국제 채권은행들의 대리인처럼 행동했던 그 IMF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에서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미국과 IMF는 자기들이 만들어서 강제했던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와는 정반대로 유동성 최대공급, 초저금리 등을 감행했다. 지난날 한국과 동남아시아, 라틴 아메리카에 IMF가 처방했던 초긴축정책으로 말미암은 민중들의 쓰라림과 고통에 대해서 그 누구하나 사과한 적도 없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있다.

불의에 외환위기를 맞아 IMF 관리체제 아래에 놓인 한국국민은 우선 정권교체를 통해 대응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금모으기 운동"을 통해 각 개인들이 손해 보지 않도록 하면서도, 가혹한 IMF 관리체제를 극복하는데 함께 직접 참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또한 IMF 요구를 받아들인 이상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의 대량해고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설득하기 위해서 노사정위를 설치했다. 거기서 협의와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정성을 쏟았다. 최빈곤층을 보호하기 위해서 생활보호수급법을 제정했다. 먹고 치료받고 교육받고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사회 안전망을 정비했다. 어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스티글리츠)는 이것이 대도시에서 식량의 부족으로 인한 빈곤층의 폭동을 사전에 막을 수 있는 장치였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 토대위에서 기업들의 수출 드라이브를 촉구했다. 그 결과 약속했던 시기보다 일찍 한국정부가 IMF로부터 빌려왔던 돈을 모두 갚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볼 것이 많다. 먼저 IMF의 고압적 자세에 대해 정책적으로는 물론 이론적으로라도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있는지, 또 무엇이 그게 될 수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했다. 문제의식은 다소 있었지만 정치적 의지가 모아지지 않았다. 또 구제금융의 조건이 너무 가혹하다고 하면서 IMF와 재협상해야 한다고 DJ후보가 주장했다가 그만 낙선할 뻔 했다. 결국 DJ도 IMF와 맺은 합의를 꼭 지키겠다고 서명했는데, 그것이 취임 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다. 이른바 DJP 연합 또한 김대중 정부에 상당한 제약을 가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른바 재경부라인 결국 경제 쪽 책임은 JP와 철학이 같거나 정서적 공감을 함께하는 경제관료 출신 인사들이 다시 차지하게 되었다. 그것은 IMF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풍전등화의 운명같이 되어버렸던 기존 관료들의 특권과 신념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98년 나는 김대중 대통령 취임사 준비위에 배치되었다. 거기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두 수레바퀴론"이 합의 되었다. 나는 보다 진전된 시스템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소수로 몰리고 말았다. 시장경제의 불공정성과 폭력성을 두 수레바퀴론 만으로는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71년 DJ가 대선후보로 나왔을 때 "대중경제"라는 일종의 담론을 주장했다. 그것은 중요한 문제의식 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거기까지 나아가지 못한 것이었다. 민주주의 강조를 통해서 시장경제의 폭력성을 일부 완화할 수 있다고 기대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한국적 상황에서 현실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돈"인 달러가 세계기축통화로 통용되고 있다. 미국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마구 찍어낼 수 있는 "달러"체제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이다. 문턱을 만들거나 문턱을 높여서 돈 놓고 돈 먹는 데에 지장을 주는 경제정책은 "망하는 길"이라고 선전하고 교육해온 결과 이것은 도전받을 수 없는 일종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그런 미국주도의 금융시장만능주의로 구성된 신자유주의 최전성기라는 시대적 한계가 IMF처방과 다른 대안을 선택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도 정면으로 문제를 내걸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IMF관리체제를 벗어난 이후에도 "대중경제"라는 담론 속에 있는 용감한 "문제의식"을 공개적으로 주장하지 않음으로서, 못함으로서 시장근본주의의 폐해인 심각한 양극화, 급격한 비정규직 확대, 절박한 민생의 만연 등 그야말로 위험한 사회로의 진입에 대해서 효과적인 대처수단을 마련하는 게 쉽지 않았다.

내년, 2012년에는 총선이 있고, 대선이 있다. 야권이 다수당이 되고, 대선에서 야권후보가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민심이반은 대대적이다. 기득권 지배세력인 한나라당과 조·중·동 연합세력은 불신과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되어 버렸다. 그러나 주체적 조건은 아직 낙관할 수 없다. 범야권 연대를 잘 이뤄냈고, "무상급식" 이슈를 내세웠던 2010년 6.2 지방선거는 국민의 큰 승리였다. 지난 4.27 재보궐선거도 정치적으로는 승리했다. 특히 민주당에게 정치적 이목이 집중되었다. 반면에 정치공학적인 야권 후보단일화를 했던 2010년 7월 재보궐선거에서는 참패하고 말았다.

지금 범야권 연대를 이뤄내자는 데에는 누구나 만장일치인 셈이다. 그러나 어떻게 이뤄낼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우선 민주당내 진보/개혁적인 정치인들의 다수는 범야권세력의 대통합 이른바 제2차 민주대연합만이 활로라고 주장한다. 대다수의 현 민주당 최고위원들도 그렇다. 하지만 현역의원의 다수 또는 현재로서 공천이 유력한 인사들은 아마도 선거연합을 선호할 것으로 추측된다. 우선 서로 정치노선이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다. 혈액형이 다른 피가 한 몸에서 살 수 없다는 주장이 그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혈액형이 다른 부부가 결혼해서 서로 혈액형이 또 다를 수 있는 아이들을 낳아서 잘 기를 수 있다는 사실에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은 진보 정치세력 쪽에도 상당수 있다. 그리고 대통합 하는 것은 일종의 투항이고 또 미래에 대한 배반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김대중 총재는 재야 민주화운동세력과 따로 또 함께 반군사독재 투쟁을 해왔다. 자신이 정치적 곤경이나 위기에 처할 때마다 새로운 정치세력과 통합을 이뤄냈다. 특히 재야 민주화운동 세력이 그 상대방이 된 적이 많았다

6월 민주대항쟁 직후 재야인사들에게 현실 정치에 즉시 참여하여 대선후보 선출과정부터 역할을 해달라고 촉구하셨다. 그러나 재야세력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정세가 어떻게 될지 불분명한 상황이어서 더구나 결단 할 수가 없었다. 당시 재야세력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대선후보 선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DJ를 비판적으로 지지한다는 캠페인을 벌여 DJ가 후보가 되도록 노력했다. 88년 총선에서는 평민련, 92년 총선에서는 신민련, 96년 총선에서는 통일시대 국민회의 멤버들 그리고 그 후 전대협세대들이 참여했다.

97년에 있었던 이른바 DJ-JP연합은 수긍하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만일 그렇게 하고도 대선을 이기지 못한다면, 그 후 민주세력의 향배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참으로 걱정이었다. 90년 노태우, YS, JP의 3자 야합을 통한 호남 대 비호남 지역구도의 인위적 조성은 호남과 DJ에게 비극이었다. 또한 그것은 대한민국에도 큰 비극이었다. 이러한 구도를 깬다는 의미에서 또한 지역 균형 발전의 관점에서 지역등권론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DJ에겐 충청도 표가 필요했다. YS로부터 정치적 박해를 받아 무력화되고 있었던 JP로서는 YS의 라이벌인 DJ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유신(박정희세력의)"본당"이라고 자처했던 JP와 민주야당세력의 지도자인 DJ가 정치적으로 영합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한 일이었다. 이것은 분명히 권력 정치의 측면이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여러 가지가 작용하여 97년에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이 생각난다. 권력에 대한 집착, 권력에 대한 의지가 그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DJ의 권력에 대한 의지는 강력했다. 박정희, 전두환 두 권력자들이 DJ를 살해하려고 했던 것은, 그것도 여러 차례 시도했던 것은 어떤 변명으로도 용납될 수 없다. 그러나 DJ에게 그런 강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최초의 '정권교체'를 실현할 수 있는 계기가 결실을 맺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거의 모든 정치인은 권력정치를 한다. 지금 자신의 위치에서 이해관계에 도움이 되는 일은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외면하거나 배척한다. 그런데 그런 권력정치가 대의명분이 작은 경우에는 혐오감을 자아내게 만든다. 보통 이런 자신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권력정치를 오래하다 보면 스스로 대의명분을 소홀히 여기게 된다. 그것이 반복되면 정치인으로서 신뢰를 잃게 된다.

DJ도 권력정치를 했다. 그러나 명분을 놓치지 않았다. 더구나 그런 명분이 대개의 경우 진보적이거나 개혁적이었다. 민주세력 내부에 강력한 동조자를 상당히 만들 수 있었다. 적대적이기까지 했던 한국정치현장에서 DJ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권력정치를 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그러면서도 방향을 잃지 않고 비전을 모색하고 공부하고 연구한 정치인이었다. 색깔론과 국가보안법으로 위협을 받으면서도 실현하고자 했던 남북의 평화공존, 교류·협력을 통한 공동발전을 이뤄낸 햇볕정책, 동아시아판 헬싱키 체제가 되기를 바랐던 6자 회담 등은 역사적으로도 올바르고 정당한 것이었다. 71년도 후보시절 미-일-중-러의 남북교차승인을 주장했던 것에서 보듯이 강력한 문제해결방안이 냉전해체 훨씬 전에 이미 DJ에 의해 공개적으로 제시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2가지 말씀이 생각난다. 첫째로 '김구선생을 존경한다. 그런데 남한단독정권을 세우려고 작정하고 나섰던 이승만 박사와 주로 친일파들로 구성되었던 한민당 세력과 선거에서 싸워서 승리해야 했다. 그렇게 했으면 승리했을 것이다. 그게 지금도 참으로 아쉽고 안타깝다.'

둘째로 2009년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는 행동하는 양심이어야 한다. 그런데 정 할 일이 없으면 담장에 대고 고함이라도 질러라"했다. 이 말씀이 귓전을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내년, 2012년이 새로운 전환점이 되게 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해낼 수 있다. 우리는 97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최초의 수평적 정권 교체를 해냈다. 그런데 이번 세 번째 정권교체는 그것보다는 쉽지 않을까? 아무리 정치적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측면이 있다하더라도 우리 서민과 중산층의 정성과 마음이 촛불처럼 모여만 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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