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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소방수' 김용수, 그의 시련과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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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원조 소방수' 김용수, 그의 시련과 도전 [야구라의 그린라이트] '새로운 김용수' 찾는 '노송'과의 인터뷰
소나무는 언제나 푸르다. 옛 노래 가사처럼, '쓸쓸한 가을 날이나 눈보라치는 날에도' 소나무는 변하지 않는 푸른 빛을 간직한다. 그래서일까. 모든 게 쉽게 변하고 빠르게 사라지는 세상을 살다 보면, 오랜 시간 온갖 풍파를 다 견디며 같은 자리를 지키는 소나무의 모습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잠실야구장 마운드에도 오래된 소나무가 있었다. 수많은 시련과 시간의 무게를 견디고, 무려 16년 동안이나 변함없이 듬직하게 자리를 지켰다. 사람들은 존경의 의미를 담아 그를 '노송'이란 별명으로 불렀다. 바로 LG 트윈스의 전성기를 이끈 프로야구 '원조 소방수' 김용수 중앙대 감독이다. 사실 그의 프로 무대 데뷔는 동기들에 비해 2년이나 늦었다. 중앙대를 졸업한 1983년 신인드래프트에서 MBC 청룡의 지명을 받았지만, 이를 제쳐두고 실업야구 한일은행에 입단했기 때문이다. 프로야구를 마다하고 실업야구로 향하는 건 요즘 같은 때는 상상하기 어려운 선택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만일 바로 프로에 갔으면 일반병으로 복무해야 했어요. 그보다는 실업팀 경리단 등에서 야구와 군복무를 병행하고 난 뒤에 프로에 도전하자고 생각했죠. 그래도 어차피 20대 중반에 출발하는 거니까 늦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김용수의 얘기다.

실업무대에서 김용수는 최고의 투수로 거듭났다. 소속팀을 여러 차례 우승으로 이끈 것은 물론, 2년 동안 세 차례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국제무대에서도 빼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 결과 당초 목표했던 군인팀을 거치지 않고서도 병역 혜택을 받는 행운이 따랐다. "사실 국가대표로 나가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운이 좋았던 거죠. 무엇보다 국제무대에서 다른 나라의 야구를 접하면서 시야를 넓힐 수 있었던 게 프로에서도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한일 슈퍼게임 당시 한국 대표단. 쟁쟁한 스타들은 전부 모여 있다. 사진 맨 오른쪽이 김용수. ⓒ어우홍 제공

남보다 2년 늦게 시작하기로 한 그때의 결정이 결과적으로는 프로 생활 16년의 장수를 가능하게 도운 셈이다. 실은 그가 처음 야구를 시작한 것도 남보다 4~5년 늦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야구를 늦게 시작한 탓에 친구들은 다른 훈련할 때 저는 죽어라고 기본기 훈련만 계속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돌아보니까 그때 기본기를 착실하게 훈련한 게 제가 부상없이 오래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닌가 싶어요."

마침내 1985년, 김용수는 MBC 청룡 유니폼을 입고 프로 무대에 섰다. 프로 첫해에는 이렇다할 활약을 하지 못했다. 시작부터 순탄치가 않았다. 선동열이 발단이 된 아마-프로 간의 스카우트 파동으로 인해 5월 말이 되어서야 출전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몇 경기 지나지 않아 직선타를 무릎에 정통으로 맞는 불상사가 뒤따랐다. 결국 김용수의 프로 첫 시즌은 채 실력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불과 6경기만에 끝나고 말았다.

노송이 본격적인 활약을 시작한 것은 데뷔 2년째인 1986년부터. 부상에서 회복한 김용수는 그해 팀이 치른 108경기 중 60경기 출전에 178이닝 9승 26세이브 평균자책점 1.67를 기록하며 구원부문 1위를 차지했다. 참고로 지난 시즌 프로야구에서 178이닝 이상을 던진 투수는 단 세 명(주키치, 니퍼트, 장원준)에 불과하다. 그만큼 지금 기준으로 따지면 살인적인 혹사를 경험한 셈이다.

김용수는 1987년에도 9승 24세이브를 따내는 활약으로 2년 연속 구원 부문 1위를 달성했다. 프로에 데뷔하자마자 곧바로 최고의 소방수 자리에 등극한 것이다. 그런데 원래 김용수가 원한 보직은 구원투수가 아니었다. 김용수는 "사실 마무리보다는 선발로 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고 토로한다. 이유가 있다. 1이닝만 막아내면 임무를 완수하는 요즘의 마무리투수와 달리, 김용수가 활약하던 시대에는 마무리가 6회나 7회부터 올라와서 던지는 일이 예사였다. "그만큼 힘들었죠. 1986년에 제가 180이닝 가까이 던졌어요. 거의 경기당 3이닝씩을 던졌단 얘기잖아요. 마무리라기보다는 롱릴리프에 가까웠죠. 한번은 9일 동안 9경기를 하는데 그 중에 제가 8경기에 나와서 던진 적도 있을 정도에요."

▲MBC 청룡 시절 김용수. 김용수는 16년 동안 MBC와 LG에서 활약하며 통산 227세이브를 기록했다. 팬들은 그를 '노송'이라 불렀다. ⓒ김용수

오매불망하던 선발 꿈을 이루게 된 것은 구단명이 LG 트윈스로 바뀐 1990년. 김용수가 시즌 초반 마무리로 나와서 몇 차례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신임 백인천 감독은 정삼흠과 김용수의 보직을 맞바꾸는 결단을 내렸다. 본격적으로 포크볼을 구사하기 시작한 것도 선발투수로 뛰게 되면서부터다. "마무리를 할 때는 직구와 슬라이더만으로도 승부가 됐어요. 하지만 선발로 긴 이닝을 던지려니까 구종 두 가지만으로는 안 되잖아요. 그래서 프로 입단 초기에 배워뒀던 포크볼을 자주 던지기 시작했죠. 긴 이닝을 던지는 것은 별로 문제가 안 됐어요. 마무리 하던 시절에도 걸핏하면 4~5이닝씩 던지곤 했는데요 뭘."

선발 전환은 대성공이었다. 그해 김용수는 12승에 평균자책 2.04의 빼어난 성적을 냈고, 삼성을 상대한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2승을 따내며 팀을 창단 첫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듬해도 활약은 계속되어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12승 10세이브를 올렸다. 하지만 여러해 동안 계속된 무리한 투구 탓일까, 금강불괴인줄 알았던 그도 부상을 피하지는 못했다. 투수에게는 치명적인 허리 부상이 찾아온 것. 이 부상으로 인해 김용수는 은퇴 직전까지 갈 정도로 선수 생활에 위기를 맞이했다.

"다시는 야구 못한다는 얘기까지 나왔어요. 그때 다친 허리가 아직까지도 아파요. 오래 서있거나 걸으면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요. 일종의 직업병이죠." 수술을 받느냐 재활 치료를 하느냐의 기로에서, 김용수는 선배 박철순의 조언을 받아들여 수술 대신 재활을 하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1993년 무사히 마운드에 복귀해 26세이브를 따내는 활약으로 건재를 과시했다. 신임 이광환 감독은 철저한 투수분업 시스템을 지키면서 3~4이닝짜리 마무리였던 김용수를 '1이닝 마무리'로 기용했다. 과거 김용수가 책임졌던 7회와 8회는 차명석, 차동철 등 '셋업맨'이라는 새로운 보직의 투수들이 나와서 틀어막았다.

LG가 두 번째 우승을 따낸 1994년, 김용수는 시즌 30세이브로 뒷문을 든든하게 책임지며 팀을 페넌트레이스 정상에 올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해 열린 태평양과의 한국시리즈 1차전, 양팀이 1-1로 맞선 7회초 1사 만루 위기에 등판해서 병살타로 막아낸 장면은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다. "하위타선이면 모르겠는데 장타자인 김동기 상대라서 많이 긴장됐죠. 한 점은 준다는 생각으로 올라갔는데, 제가 잘 던졌다기 보다는 운이 좋았어요."

타고난 강심장일 것 같은 그에게도 위기 상황은 똑같이 떨리고 긴장됐단다. "부담이 되는 게 당연하죠. 대신 그만큼 희열을 느껴야 해요. 맞는 걸 두려워하지 말아야죠. 저는 마운드 올라서는 떨다가도, 막상 첫 공을 던지고 나면 긴장이 싹 사라지는 타입이었어요."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순간. LG가 승리하는 순간에는 언제나 김용수가 마운드를 지키고 있었다. ⓒLG 트윈스 제공

대부분의 선수들이 하락세를 겪는 30대 후반에도 '노송' 김용수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팀이 필요로 할 때마다 보직에 상관없이 자신을 희생했다. 38세 시즌인 1998년에는 선발투수로 18승을 거두며 다승 1위에 올랐고, 39세에는 다시 마무리로 전향해 26세이브를 거뒀다. 그리고 만으로 마흔이 된 2000년을 끝으로 은퇴, 말 그대로 '박수칠 때 떠났다'. 그의 등번호 41번은 1999년에 프로야구 사상 두 번째로 영구결번이 됐다. 세이브 부문에서도 통산 227세이브로 오랜 기간 1위를 유지했다. 비록 지난 7월 1일 삼성 오승환이 228세이브 신기록을 달성하며 역대 2위로 한 계단 내려가게 됐지만, 김용수는 1위를 내준 아쉬움은 전혀 없다고 한다. "그날 경기를 TV를 통해 지켜봤어요. 승환이처럼 훌륭한 후배가 제 기록을 경신해서 기쁩니다. 승환이의 지금 기량이라면 통산 400세이브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아요. 아쉬움이요? 어차피 기록은 깨지라고 있는 거잖아요."

하지만 김용수가 여전히 통산 1위를 굳게 지키고 있는 기록이 있다. 바로 100승-200세이브 기록이다. 김용수는 통산 126승 227세이브로 프로야구사에 유일하게 100승과 200세이브를 동시에 달성한 선수로 남아 있다. 선발이든 마무리든 팀이 필요로 할 때면 언제든,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희생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오승환의 대기록만큼이나 김용수의 '2위' 기록이 오래도록 기억되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2이닝만 던지고 세이브를 얻는 요즘의 마무리와 달리 김용수는 나왔다 하면 기본 3이닝에 수시로 선발과 구원을 오가는 혹사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에는 마무리 투수라는 개념도 흐릿했고, 세이브 기록이 제대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16년간 뚜벅뚜벅 걸어간 김용수의 모범이 있었기에, 오승환을 비롯한 지금의 마무리들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현역에서 물러난 김용수는 이후 LG 코치를 거쳐 현재는 모교인 중앙대 감독을 맡고 있다. "프로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항상 갖고 있죠. 하지만 지금은 아마추어에서 열심히 해서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보여주는 게 우선입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팀을 잘 이끌어갈 수 있는 능력을 증명해야죠." LG 유니폼을 다시 입는 꿈을 마음 한 편에 간직한 채, 김용수는 대학야구에서 더 많은 김용수와 오승환을 길러내기 위해 지금 현재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선수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LG 팬들의 한결같은 성원이 그에게는 큰 힘이다. "팬들이 은퇴식도 열어주고 매년 송년회도 해주세요. 감사한 분들이죠. 그분들이나 저나 LG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은 하나잖아요. 기회가 된다면 LG에서 후배들과 함께 다시 한번 열정을 쏟고 싶어요. 그렇게 해서 응원해준 팬들에게 보답하고 싶습니다." 소나무의 팀과 후배, 팬들에 대한 사랑은 '쓸쓸한 가을과 눈보라'를 겪은 뒤에도 여전했다.

끝으로 그가 물었다. "그런데 '우리 LG', 올해는 가을 야구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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