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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시대 21세기'를 내다본 통찰과 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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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시대 21세기'를 내다본 통찰과 혜안 [김대중을 생각한다]<32> '차별 없는 사회'를 천명처럼 받들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치인 한명숙'을 태어나게 한 산파였다. 그리고 지금도 내 가슴에 멘토로 살아있다. 그 인연의 실타래를 풀어 가려면 아무래도 여성운동과 가족법 개정을 실마리로 삼지 않을 수 없다.

1974년, 나는 크리스챤아카데미의 여성사회 교육간사를 맡으면서 여성운동에 투신했다. 당시 여성을 짓눌렀던 낡은 인습과 제도는 강고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족법'은 가혹한 족쇄였다. 아내와 딸들은 법적으로 철저하게 차별을 받았다. 위헌 요소가 다분한 악법이었다.

유엔이 '세계여성의 해'로 정한 1975년, 여성계는 가족법 개정에 불을 지폈다. 바로 전 해, 여성단체와 여성학자들의 뜻을 모아 '여성 인간선언'을 내놓았던 크리스챤아카데미도 이 운동의 중심에 섰다.

그 무렵 유신의 살기 속에서 민주화 투쟁을 이끌던 김대중을 나는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처음 만났다. 납치와 투옥, 가택연금의 탄압이 그를 옥죄고 있었지만 두 눈이 남달리 반짝반짝 빛났다. 소신이 꽉 찬 목소리로 민법의 봉건성과 남성 우월주의를 비판했다. 가족법을 평등하게 고쳐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나 반듯했다. 우리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유신독재는 여성운동에도 서슬 퍼런 칼날을 들이댔다. 나는 1979년 3월 9일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2년6개월의 형을 받고 수감 생활을 했다. 그 사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형선고를 받고 망명의 길로 내몰렸다. 끊겼던 만남의 끈은 1989년에야 다시 이어졌다. 그 때 그는 제1 야당인 평민당 총재였고, 나는 한국여성단체연합의 '가족법 개정 특별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가족법 개정 운동의 최일선에서 나는 그를 자주 가까이 보게 되었다.

그 때 우리는 정치권을 압박하기 위해 맹렬하게 뛰었다. 국회 주변에서 풍선을 손에 들고 평화 시위를 벌였고, 의원실도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렸다. 김대중 총재는 찾아 갈 때마다 "우리 당 의원들은 내게 맡기고 다른 당 의원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라"고 격려했다.

마침내 평민당 박영숙 의원의 주도로 153명의 서명을 받은 민법 개정안이 제출됐다.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김대중 총재는 노태우 대통령과의 담판을 통해 여야 합의를 이끌어내며 빈틈 없이 마무리를 해주었다.

드디어 1989년 12월19일, 정기국회 본회의장에서 민법 개정안 통과를 알리는 방망이 소리가 세 번 울렸다. 그 순간 "반대 의견 있습니다"라는 의원들의 고함이 터져 나오고 자료 뭉치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가슴 졸이며 조마조마했던 순간이 지나자 수십 년간 여성들의 염원이었던 가족법 개정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국회의 복도 한 쪽에선 유림의 대표가 주저앉아 "우리나라는 이제 망했다"며 통곡했고, 다른 한 편에선 이태영 선생이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남녀평등 세상의 메시지를 낭독했다.
긴 세월 강고했던 차별의 시대가 무너지고, 남녀평등의 새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김대중 총재는 평민당 의원들에게 "가족법 개정안이 통과되는 순간 모두 힘차게 박수를 치자"고 제안했었다. 하지만 대다수 의원들이 "남자 권리 다 빼앗겼는데 뭐가 좋아서 박수 치냐"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 혼자만 박수를 쳐야 했다. "남녀가 평등하다는 믿음은 내 안의 천성이었다." 자서전에 적은 대로 그는 차별 없는 사회를 천명처럼 받들었다.

가족법 개정을 진두지휘하며 성사시켰던 김대중 총재는 어느 여성모임에서 그의 섭섭한 마음을 슬며시 내비친 적이 있다.

"내가 여성정책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일하는 대표적인 정치인인데, 왜 여성들에게 인기가 없는지 답답하다. 이렇게 열심히 하면 나를 좀 지지해 줘야지."

뼈 있는 말이었지만 그의 유머감각이 워낙 뛰어나, 한쪽으로는 찔리면서도 한바탕 웃음꽃을 피웠었다.

지역주의의 멍에와 '빨갱이'라는 낙인은 평생 동안 그를 괴롭혔던 군사독재의 망령이다. 얼마 전 그 망령에 홀린 사람들이 영면의 장소인 묘역까지 훼손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가슴 저미는 아픔을 딛고 '김대중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까닭'이 어쩌면 여기에도 있을지 모른다.

두 번의 전화와 '정치인 한명숙'

20여 년 동안 여성운동에 몰입했던 나는 1995년 초 유학을 가는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 해 8월쯤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을 준비하던 김대중 당시 '아시아태평양 평화재단' 이사장이 직접 전화를 해왔다. 여성대표로 참여 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시민사회운동을 천직으로 여기던 때라 즉답을 못했다.

그 뒤 이우정 선생이 또 전화를 했다. "국회에 들어와서 함께 활동하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김대중 총재는 다른 건 몰라도 남북 화해 협력은 반드시 이룰 것이기 때문에 도와드려야 한다." 거의 한 시간을 설득했지만 나는 끝내 거절했다. 죄송함에 마음이 무거웠다. 김대중 총재도 상당히 섭섭했던 것 같다. 어느 자리에선가 나를 빗대어 "비례대표를 하라는데도 안 하는 사람이 있더라"는 얘기를 꺼냈다고 전해 들었다.

4년이 흐른 1999년,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나는 또 부름을 받았다. 취임 2년째를 맞은 김대중 대통령은 '새천년민주당'이라는 새로운 당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번엔 신당의 재야대표로 영입된 이재정 신부가 전화를 걸어왔다. "설마 이번에도 안 된다고는 안 하시겠죠? 이번에는 꼭 하셔야 합니다." "고민해 보겠다"고 에둘러 대답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 뒤에도 당의 여러 중진들이 잇달아 전화를 걸어 강력하게 권했다. 그 때가 8월쯤이었고, 나는 12월에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할 예정이었다. 학계에서 후배를 양성하며 시민사회운동을 계속하고 싶은 소망이 컸지만 두 차례나 거절하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워 가족 그리고 여성운동 후배들과 의논을 했다. 후배들의 권유가 뿌리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절절했다.

결심하고 바로 논문 자료만 챙겨 든 채 입던 옷에 운동화 차림으로 귀국했다. 서울에 도착해 동생에게 정장을 사오라고 부탁하고, 다음 날인 1999년 9월12일 발기인 대회에 버스 타고 참석했다. 한 집안의 맏딸, 한 남자의 아내에서 '맹렬 여성운동가'로 거듭 태어났던 내가 또 다시 '정치인 한명숙'으로 재탄생한 날이었다. '김대중'이라는 산파의 손길이 내 삶의 씨줄과 날줄을 뜻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엮어냈던 것이다.

▲ 2007년 6월 14일 오후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6.15 공동선언 7주년 기념만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악수를 나누며 식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뉴시스

초대 여성부 장관

김대중 대통령은 늘 인구의 절반인 여성의 권익을 세우는 것이 선진국으로 가는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여성들은 농경사회와 산업사회에서 가부장 제도에 눌려 지냈다. 그러나 정보화 시대에는 힘보다는 머리가 중요하다. 그래서 21세기는 정보화 시대이고 곧 여성의 시대이다."

시대를 꿰뚫는 그의 이런 통찰은 여성부 창설로 실현되었다.

여성부가 탄생하기 전에는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가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여성 인력을 국가의 자산으로 여겼다.

"여성의 섬세한 감각과 치밀한 사고는 국가가 관리해야 할 자산이다. 정보화 시대에 여성 인력 개발은 국가적인 과제다."

여성부를 만들겠다는 그의 의지는 강했지만 많은 반대에 부딪쳤다. 그럼에도 2001년 1월 19일 국민의 정부 늦둥이 부처로 여성부가 탄생했다. 초대 여성부 장관으로 나를 발탁한 김대중 대통령은 이런 당부를 했다.

"이제 여성들이 21세기에 남성과 똑같이 그야말로 남성평등으로 나갈 수 있는 그런 조짐이 비로소 보입니다. 앞으로 여성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여성의 힘으로 양성평등의 사회를 주체적으로 열어나가기 바랍니다."

여성부는 직원 102명이 일하는 단출한 부처였다. 예산 규모도 작았다. 그러다 보니 여성부로 파견되는 것을 좌천으로 여기는 분위기도 엿보였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차관을 남성으로 해 달라"고 건의했다. 대통령은 "여성계의 반발이 없겠냐"고 물었다.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대신 다른 부처의 차관을 여성으로 임명해 주십시오." 대통령은 여성부 차관에 현정택 청와대 비서관을, 노동부 차관에 김송자 서울지방노동위원장을 임명했다. 정부 수립 후 처음 탄생한 여성 차관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여성부를 각별하게 챙겼다. "다른 부처 관리들은 사실 여성부를 은근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늦게 태어난 막둥이를 보살피듯 했다. 그래서 정이 더 갔다." 그가 자서전에 남긴 글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격려와 신임에 나는 힘을 얻었다. 의원 시절에 발의했던 '모성보호 관련 3법'을 꾸준히 다듬었다. 경총에서 "기업의 인건비 부담이 커진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보수적인 의원들도 가세했다. "우리 어머니는 들에 나가 일하다 애 낳고, 그 이튿날 또 밭에서 일했는데도 80살이나 사셨다. 뭐 때문에 출산 후 세 달씩이나 쉬어야 하는가?"

난산의 진통을 겪었지만, 나는 민주당 의원들과 긴밀하게 협조해 법을 통과시켰다. 법안에 서명하며 활짝 웃던 김대중 대통령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최고의 퍼스트레이디

이희호 여사는 미국 유학을 다녀와 YWCA 총무를 지낸 시민사회단체의 지도자였고, 여성운동의 선각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가족법 개정 운동을 펼치며 우리는 은근히 여사의 역할을 기대했던 게 사실이다.

이희호 여사와 김대중 대통령은 사랑하면서 존경하는 사이였다. 나는 때때로 김대중 대통령보다도 이희호 여사가 더 깊이 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리 내서 주장을 드러내지 않아도 주위 사람들은 늘 여사에게 감화를 받았다.

이희호 여사는 원래 조용하고 말이 없는 분이지만 강연이나 축사를 할 때는 말에 힘이 느껴졌다.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나?"라는 생각이 들 만큼 한 마디 한 마디가 무게 있게 다가 왔다. 악수할 때도 뭔지 모를 힘이 느껴졌다. 뼈마디가 가냘픈 손인데도 손아귀에 힘이 꽉 차고 진심이 통하는 악수가 참 인상적이었다.

이희호 여사는 말 없이 김대중 대통령을 보좌하며 항상 편안하게 해주었다. 곁에서 지켜 본 여사의 비서실장은 "대통령에 대한 이희호 여사의 '복무정신'이 놀랍다"는 표현을 썼다. 그만큼 누구도 눈치 못 채는 세심한 사안을 조용히, 그러나 빠짐 없이 뒷바라지 했다.

'준비된 대통령'의 수첩

김대중 대통령은 주요 현안을 논의할 때 관련부처 장관들을 불러 정책조정회의를 자주 했다. 대개 점심을 곁들인 회의였는데 도시락도 먹고 가끔 스테이크도 나왔다. 장관들은 긴장해 먹는 둥 마는 둥 했지만 대통령은 남기는 법이 없었다. 선거 때 시간에 쫓겨 라면으로 요기할 때도 꼭 "나는 계란 두 개"라고 특별 주문을 했다고 한다. 식성이 좋은 만큼 스태미너가 좋고, 그래서 일도 열정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수식어는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장관들이 보고를 하거나 토론을 할 때 항상 깨알같이 메모한 노트를 옆에다 놓고 대화했다. 옛날 공책처럼 생긴 노트에 적어 놓은 글씨는 인쇄한 것처럼 반듯했다. 사례를 들 때도 연도며 날짜, 사람 수까지 빈틈이 없었다. '천 여' 명이 아니라 '천팔십이' 명 이런 식이었다. 장관들이 아무리 꼼꼼하게 준비해도 늘 모자랐다.

김대중 대통령의 노트에는 수십 년 간 구상하고 끊임 없이 다듬은 정책이나 법안들이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가 대선에서 세 번째 떨어졌을 때 여성계에서 모임을 마련했다. 그는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평생 정치를 하면서 이 나라 발전을 위해 애써 수많은 정책을 준비해 왔다. 이 정책을 펴는 것이 나의 꿈이었다. 그런데 장관도 못해 보고, 작은 정책도 하나 펴지 못한 채 뜻을 접어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가슴 아프다."

"국민들보다 반 발짝만 앞서가라"

김대중 대통령은 높은 이상을 추구했다. 하지만 판단과 결정은 언제나 현실에 발을 단단히 디디고 내렸다. "국민들보다 반 발짝만 앞서 가라." 그의 이 말 속에는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이 녹아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의원 시절인 1994년 자서전에 이런 글을 남겼다.

"김대중은 정치 지도자가 갖춰야 할 '권력 장악 능력', '살림살이 솜씨', '역사의식'을 두루 갖춘 사람이다. 또 그는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고, 발전을 거듭하며, 정말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다."

돌아 보면, 김대중 대통령 앞에 펼쳐진 도화지는 구상한 정책을 마음껏 그릴 수 있는 하얀 도화지가 아니었다. 일제 식민지와 남북분단, 냉전과 한국전쟁, 군사독재와 외환위기 등 청산하지 못한 과거사로 온통 얼룩진 도화지였다. 하지만 그는 이런 제약을 뚫고 깊이 있는 역사 인식과 철학을 바탕으로 큰 정치를 펼쳤다.

그 중에서도 김대중 대통령의 '보복 없는, 용서의 정치'는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의 깊은 뜻을 되새기려고 내가 틈틈이 꺼내보는 물건이 있다.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이 총리 청문회를 앞둔 나에게 선물로 주었던 대못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 대못을 학자들이 고증을 해서 재현해 낸 모형이다.

그 선물의 의미는 "청문회를 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대못을 박을 것이다. 그 대못에 찔린다 해도 그 사람들을 다 수용하고 용서해서 껴안는 자세로 일하라"는 뜻이었다. '정치인 김대중'은 혼신의 힘을 다 해 이 가르침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그는 참된 신앙인이었다. 신앙이라는 내면세계에서 그는 탄압을 용서로 승화시켰다. 원한을 화해와 협력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국민화합을 위해 용서와 화해의 정치를 폈다. 보복의 역사를 용서의 역사로 전환시켰다.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 공영의 길을 모색하고, 아시아의 민주발전을 이루기 위해 '동북아 평화 구상도'를 그렸다. 우리가 계승 발전시켜야 할 그의 값진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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