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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부러진 화살> 흥행이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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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도가니>, <부러진 화살> 흥행이 남긴 것 [데스크 칼럼] 재벌개혁은 괜찮지만, 사학개혁은 안 된다?
한국에선 법관을 시험으로 뽑는다. 그래서 장점이 있다. 세상에서 그나마 공정한 게 시험이다. 가난하게 자랐어도, 적당한 재능만 있으면 노력으로 승부할 여지가 있다.

문제는 시험의 세계에선 비평이 없다는 점이다. '너는 80점', '너는 90점' 등의 결과 통보가 있을 뿐이다. 여기엔 승복과 항의만 있다. 온전히 승복한 것도 아니되, 온통 거부하는 것도 아닌, 비판적이고 성찰적인 비평은 설 자리가 없다.


좋은 비평이 없으면, 진보도 없다. 정신노동의 영역에선 특히 그렇다. 1990년대 한국 영화의 비약적인 성장은 영화 잡지, PC 통신 등을 통한 비평 활성화를 떼놓고 설명할 수 없다. 문학의 위기 역시 비평의 위기와 맞물려 있다.

관객은 왜 영화와 현실을 구별하길 거부하나

그런데 사람 목숨을 떼었다 붙였다 하는 법원 판결의 세계에 비평이 없다. 이래서는 좋은 판결이 나오기 힘들다. 물론,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등 일부 시민단체가 꾸준히 '판결 비평'을 해왔던 사례가 있다. 그러나 아직은 한계가 있다. 법조계의 '성골' 판사들도 권위를 무시할 수 없는 '판결 비평'이 나오고 그게 널리 읽힌다면, 과거 한국 영화가 그랬듯 한국의 사법부도 크게 진보할 게다. 하지만 현실에선 비평은 드물고, '묻지 마 승복' 아니면 '다짜고짜 항의' 뿐이다.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의 석궁 테러 사건을 다룬 영화 <부러진 화살>을 둘러싼 논란도 비슷하다. 자막이 내려간 뒤, 관객은 거센 분노를 토해낸다. 법원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설령 <부러진 화살> 속 내용이 현실과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해도, 영화는 그저 영화일 따름이다. 영화가 현실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놓고 따지는 것 자체가 형용모순이다. 영화는 허구인데, 허구와 현실은 전혀 다른 세계다.

하지만 관객은 영화와 현실을 구별하기를 억지로 피한다. 이걸 비난하기란 쉽지 않다. '영화는 허구'라는 사실을 그들이 모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희, 정몽구 회장 등이 연루된 비리 사건이면 늘 관대한 판결이 나왔던 사실을 그들은 기억한다. 반대로 용산참사 재판에선 철거민만 유죄 판결을 받았던 사실 역시 기억에 생생하다. 영화와 현실을 억지로 구별하지 않으려는 태도의 배경에는 이런 기억이 있다. 영화가 한 일이라곤 그저, '법은 강자의 편'이라는 통념을 대중의 기억에서 끄집어낸 것뿐이다. 바로 옆자리 관객과 동시에 떠오른 기억은 공감대가 되고, 그 속에서 분노는 증폭된다.


▲ 왼쪽부터 <부러진 화살>의 배우 안성기, 감독 정지영, 배우 김지호, 박원상 ⓒ연합뉴스

판결에 승복하는 데도 종류가 있다

영화 속 내용과 현실이 어떻게 다른지를 꼬치꼬치 따진다고 해서, 이런 분노가 가라앉을 리는 없다. 영화에 대한 법원의 대응이 안쓰럽게 보이는 이유다.

법원 판결에 승복하는 것은 법치주의의 전제조건이다. 그래서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난 사안에 대해 시비를 거는 상황이 법관들에겐 당혹스럽다. 최근 대법원이 "법치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을 거론하고 나선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하지만 판결에 승복하는 데도 종류가 있다. 저항할 길이 없으므로 억지로 승복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승복. 재벌과 철거민에게 극과 극으로 엇갈렸던 재판 결과는 대중에게 전자(前者)로 기억된다. 이처럼 '묻지 마 승복'을 강요하는 건 '좋은 판결'이 아니다. <부러진 화살>을 둘러싼 논란이 '좋은 판결'을 가능케 하는 건강한 '판결 비평'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 아울러 많은 이들에게 '몹쓸 재판'으로 기억되는 재벌 비리 사건, 용산 참사 등 사회적 약자가 연루된 사건 재판 결과 역시 이번 기회에 엄정한 비평의 도마 위에 오르기를 기대한다.

박근혜, 재벌 개혁은 괜찮지만 사학 개혁은 안 된다?

물론, 비평이 만능은 아니다. 비평이 필요한 영역이 있고, 투쟁이 필요한 영역이 있다. 법치주의 사회에서 사법부 전체를 투쟁 대상으로 삼는다면, 잘못이다. 그래서는 법치 자체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싸워서만 풀리는 문제도 여전히 있다. <부러진 화살>, 그리고 석궁 사건의 진짜 함의는 어쩌면 이 대목이다.

김명호 전 교수는 대입 본고사 수학 문제의 오류를 지적한 뒤 학교에서 쫓겨났다. 수학 문제의 오류를 공개한 것 때문만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그가 문제 오류를 지적하지 않았다면, 학교에서 쫓겨나는 일은 없었을 게다. 문제 오류가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고등학교 2~3학년 수준의 수학실력을 갖고 있으면 찾을 수 있는 오류였다. 대학 신입생을 뽑기 위한 문제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굳이 수학 교수만 나서야 할 싸움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공계열 대학생 수준의 지식을 가진 학교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싸움이었다. 그런데 김명호 전 교수는 외로운 싸움을 해야 했다.

이는 한국의 사립학교가 가진 특수한 성격과 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상당수의 사립대학, 사립중·고등학교가 재단 이사장이 통치하는 왕국처럼 운영된다. 학생은 비싼 등록금을 내며 잠시 머무는 손님일 뿐이고, 교직원은 이사장이 제멋대로 부릴 수 있는 종업원이다. 김 전 교수가 이런 질서를 거부하는 순간, 쫓겨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도 잘 묘사된 것처럼, 한국의 사립학교 가운데 많은 수는 해방 직후 지주들이 토지개혁을 피하는 방편으로 설립됐다. 그밖에도 '교육'보다는 다른 목적으로 세워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독재가 끝난 뒤에도 사립학교만은 민주주의의 예외였다. 그리고 한나라당과 보수 세력은 사립학교 문제만큼은 양보하지 않았다. 개방형 이사제 등 사학 운영의 투명성을 도모하는 장치에 대해 극렬히 저항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최근 복지, 재벌 개혁 등에 대해 전향적인 입장을 내고 있는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 역시 다를 게 없다. 사학 민주화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자본주의 4.0'을 거론했던 <조선일보>도 마찬가지다. 대학 등록금이 쟁점이 됐을 때도, 그들은 유독 사학의 병폐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사학 운영의 투명성이 확보되지 않는 한, 등록금 인하에는 한계가 있다는 건 상식이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모두 사학에 대해서는 같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박 위원장은 영남대에, 조선일보는 연세대에 대해서 말이다.

<도가니>와 <부러진 화살>의 흥행이 말하는 것

그들이 사학의 문제점에 대해 몰라서 침묵하는 걸까. 그럴 리는 없다. <부러진 화살> 이전에도 비슷한 문제를 지적한 영화가 대대적인 흥행몰이를 했다. 바로 영화 <도가니>다. 광주 인화학교에서 벌어진 참상을 다뤘다. 사회복지사업법, 사립학교법 등에 재단의 전횡을 견제하는 장치가 포함돼 있었다면 막을 수 있었던 비극이었다. 하지만 이런 장치를 도입하려 할 때마다 한나라당과 보수 세력은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며 필사적으로 막았다.

법은 공정성이 생명인데, 그러려면 합리적이어야 한다. 법관의 미덕 역시 합리성이다. 그런데 그보다 합리적인 세계가 수학이다. 그리고 수학 문제의 오류라는, 철저히 이성적인 지적을 이유로, 한 지식인의 삶이 망가져야 했다. 게다가 이런 상황을 막을 수 있는 법 개정 시도는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는 선동에 가로막히곤 했다.

이는 <도가니>와 <부러진 화살>에 묘사된 비극이, 궁극적으론 이성과 비이성의 대립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비이성은 비평의 대상도 아니고, 토론의 상대도 아니다. 너도나도 '좌클릭'하는 분위기에서, 첨예한 싸움이 벌어질 전선이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이다. 사학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유력 대권후보와 거대 언론사, 종교계까지 모두 한통속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성균관 대학에선 재단에 맞선 한 철학자의 싸움이 진행 중이다. 동양철학을 가르치던 류승완 씨는 '사상 문제'를 이유로 강의실에서 쫓겨났다. '철학' 교수가 다름 아닌 '사상'을 이유로 분필을 놓게끔 하는 곳. 이런 야만의 현장에서, 이성적 토론을 포기하고 석궁을 택하는 이가 또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제2, 제3의 김명호 교수는 언제든 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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