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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와 MB의 '전략적 인내', 4년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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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와 MB의 '전략적 인내', 4년 더? [한반도 브리핑] 오바마 2기의 대북정책
(이 글은 <내일을 여는 역사> 2012년 겨울호에 게재된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대북정책 : 다층적 복합적 상호의존과 그 대응" 중 대북정책 부분을 발췌하여 수정·보완한 것임을 밝힙니다.)

민주당 버락 오바마 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 앞으로 4년간 다시 미국을 이끌게 됐다. 그의 재선은 아시아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이고, 한반도의 평화에 도움이 될 것인가? 오바마 1기는 한반도 정세 호전의 기회였으나, 결과적으로 한반도 정세는 '제2의 한국전쟁'의 위험이 거론될 정도로 악화되었고, '북핵문제'도 해결의 계기를 잡기는커녕 문제만 심화시켰다. 오바마 2기는 지금까지의 기조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정책을 시도할 것인가?

오바마 1기를 반추하면 오바마 2기가 보인다. 앞으로 펼쳐질 대북정책과 북미 관계를 전망하기 위해 지금까지 취한 '전략적 인내' 정책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다. 2기 정부의 정책은 이러한 평가에 기초해서 입안되고 추진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명박 정부와 오바마 정부가 완벽한 공조를 이루며 추진해온 강성정책은 철저하게 실패했고, 정책의 전환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비둘기파뿐만 아니라 매파조차도 대화와 협상의 방기를 비판하고 있다.

▲ 버락 오바마(왼쪽) 미국 대통령과 이명박(오른쪽)대통령 ⓒ연합뉴스

예를 들어 빅터 차 교수는 1984년부터 27년간 북한의 도발과 협상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결과 "지난 27년간 북한이 미국을 포함한 협상 도중에 도발을 벌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2011년 하원 외교위원회에서 행한 증언에서 이러한 연구결과를 밝힌 그는 북한 핵 프로그램에 대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손을 놓고 있는 현 정책은 "걷잡을 수 없는 핵확산 가능성을 보유한 고삐 풀린 핵 프로그램" 만을 남겨줄 것이라고 경고했다. 심지어 전직 공화당 정부 관리조차 의회에서 이런 발언을 할 지경이다. 2012년 8월 백악관 관리들이 비밀리에 독자적으로 평양을 방문한 것도 '전략적 인내'에 대한 미국의 답답함을 반증한다. 오바마 2기의 정책 방향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I. 오바마 1기의 대북정책

오바마 1기의 대북정책도 아시아 전략과 마찬가지로 다층적 복합적이었지만 그것이 표현된 양식은 강성정책이었다. 대화와 관여보다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정책이 주를 이뤘기 때문이다. ①유엔의 제재를 중심으로 한 봉쇄 ②핵억제력과 재래식 군사력을 이용한 군사적 압박의 강화 ③'급변사태'를 상정한 저강도 전쟁이 그 세 가지이다. 오바마 1기에서 한·미 양국은 긴밀한 공조를 이루며 이러한 정책들을 일관되게 추구했다. 그러나 대북 강성정책은 목표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1. 제재와 봉쇄

오바마 1기의 대북정책의 큰 기조는 봉쇄였던 것으로 보인다. '전략적 인내'라는 표현은 기실 경제제재를 중심으로 한 봉쇄정책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안 되는 2009년 4월 북의 로켓 발사를 비난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성명을 채택을 주도했다. 이어 북의 핵실험에 대응해서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 1874호를 채택했다. 이어 필립 골드버그 대사를 대북 제재를 총괄하는 자리에 임명하여 이전과는 달리 제재가 실질적으로 집행되도록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안보리 결의안의 목적은 북의 핵무기 및 미사일 개발을 제한하고 이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 목적을 위해 채택된 수단은 매우 광범위한 것이었다. 북의 무기를 적재한 것으로 의심되는 선박은 검색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포괄적 금융지원과 융자 등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이후 미국은 이명박 정부의 5.24조치와 발을 맞춰 북과의 경제교류를 엄격하게 제한했고, 인도적 지원마저도 중단했다.

그러나 봉쇄는 실패했다. 미국과 한국 및 일본 정부 등이 중국에 강한 압박을 가해 유엔 결의안을 지지하도록 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중국이 오히려 북과의 경제교류를 확대하고 정치적 관계를 강화했기 때문이다. 제재로는 북의 행동을 원하는 방향으로 강제할 수 없다는 것이 더 근원적인 이유일 것이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2009년 6월 13일 북 외무성은 유엔 안보리 결의안 1874호에 대응해 "새로 추출되는 플루토늄 전량을 무기화"할 것이며 "우라늄 농축 작업에 착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후 북은 우라늄농축설비를 완공, 가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수로 건설에 착수하여 지난 8월 발전소 건물 위에 돔을 설치했다. 완공을 향해 치닫고 있다.

2010년 11월 북 영변을 방문했던 지그프리드 헥커 (Siegfried S. Hecker) 박사는 우라늄농축시설이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이라고 표명했다. 그는 이 시설이 북이 주장하는 대로 경수로용 저농축 우라늄(LEU) 생산에 이용된다면 매해 2톤 정도의 저농축 우라늄을 생산할 수 있다고 추정했다. 반면 이 시설을 무기급 고농축우라늄 (HEU) 생산에 사용한다면 매해 무기급 고농축 우라늄 30~40kg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2012년부터는 매해 핵무기 1~2기를 만들 수 있는 고농축 우라늄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워싱턴에 소재한 과학과 국제안보연구소 (Institute for Science and International Security)는 지난 4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북이 우라늄농축시설과 경수로를 핵무기 생산에 이용할 가능성을 여러 가지로 분석했다. 이 보고서가 예상한 최악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북은 2015년부터는 매해 핵무기를 10기 생산할 수 있고, 2016년까지 핵무기를 최대 25기 추가로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추산했다.

비핵을 맨 앞에 내세운 봉쇄정책의 결과물은 북의 핵 능력 신장이었다. 북은 열심히 우라늄농축시설을 가동하고 경수로를 건설하고 있는데, 이를 저지하기는커녕 북의 핵 활동을 감시·확인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봉쇄정책의 결과물이다. 북은 작년 말 이란과 과학기술 협력을 위한 협정을 맺었고, 쿠바군사대표단의 방문을 받는 등 공세적 외교로 넘어가는 모습이다. 이에 비해 대북 봉쇄정책을 추구한 오바마 1기 정부는 이명박 정부와 보조를 맞추다 수세에 몰리는 형국이다.

2. 압박

오바마 1기에는 '전략적 인내'로 표현되는 봉쇄정책만을 집행한 것이 아니라 군사적 압박을 강화하기도 했다. 핵 태세검토보고서를 발표하며 이전 부시 행정부의 공세적 핵 독트린을 수정하기는 했지만, 북은 예외로 하여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이후 한·미 연례안보회의를 통해서 북에 대한 핵 억제력을 강화하는 조치들을 취했다. 확장억제정책위원회가 설치되고, 맞춤형 억제전술이 채택되고, 이를 이행하기 위한 연구와 조치와 훈련을 실시했다. 미국이 제공하는 '확장억제'는 "핵우산" 뿐만 아니라 "재래식 타격 및 미사일 방어를 포함하는 모든 범주의 군사능력"으로 확대되었고 이러한 억제능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또한 "유엔사와 전력을 제공하는 국가들"까지도 연합훈련에 참가시키기로 했다.

뿐만 아니라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이후에는 재래식 억제력도 강화하기 시작했다. 한국군이 앞장서서 서해 5개 도서에 무기들을 추가로 배치하고 '능동적 억제' 전략을 채택하는 한편 한·미 연합사는 서해 군사작전계획을 구체적으로 개발하고 이를 이행할 군사적 능력을 강화하고 있다. 2010년 안보협의회에서 "한반도에서의 다양한 상황에 대비하여 군사계획을 발전"시키고 있다고 이러한 의도를 추상적으로 밝힌 데 이어, 2011년 안보협의회에서 "서북도서 및 북방한계선 (NLL) 일대에서 연합대비능력을 강화"하겠다는 점을 구체화했다. 올해 안보협의회에서는 "연합연습 및 훈련을 지속 증진"시키겠다는 합의를 여기에 추가했다.

이러한 군사계획의 강화에 발맞춰 연합훈련도 강화됐고 무기체계의 개발과 배치도 강화됐다. 2010년 11월 미국은 서해 연합 군사훈련에 미 7함대의 기함인 원자력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를 파견한 것이 이러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미·일 해군이 2008년부터 매년 연합 해상훈련을 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2012년 6월에는 3국 연합훈련이 끝난 다음날부터 한·미 해군이 서해에서 연합 해상훈련을 실시하며 조지 워싱턴호를 다시 이 훈련에 참가시켰다. 2012년 10월에는 한·미 미사일 지침을 개정하여 한국의 미사일 및 공중무인기 능력 향상을 허용했고, 그 후속조치로 북의 미사일과 장사정포를 요격하는 일련의 시스템인 '킬 체인'을 2015년까지 구축하기로 합의하기도 했다. 한국 국방부는 서북해역·합동군사령부를 신설했고, 접적지역 부대 지휘관들에게 공세적 작전지휘권을 부여하여 군사적 압박을 극대화하고 있다. 2011년 7월에는 서북도서 지역에서 처음으로 한·미 해병대 연합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군사적 압박도 실패했다. 우선 중국이 반발했기 때문이다. 2010년 7월 서해상 연합훈련에 조지 워싱턴호가 참가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중국이 강력히 반발한 것이 그 신호탄이었다. 복합적 상호의존 관계 속에서 협력과 경쟁을 벌이고 있는 미·중 관계에서 경쟁적 측면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 이때쯤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중국은 2009년 11월 오바마 대통령이 동경에서 연설하며 '신(新)아시아 구상'을 공개할 때부터 미국의 '아시아 회귀'에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하지만 2010년 2월 클린턴 국무장관이 "아시아에서 역사적 안보동맹을 유지하겠다는 미국의 강력한 의지"를 천명한 이후 오바마 정부의 대중정책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특히 2010년 전반부에 발표된 4개년 국방검토 보고서 (QDR) 및 핵 태세검토보고서, 국가안보전략 보고서가 발표된 이후 오바마 정부는 중국을 잠재적 위협으로 인식하며 '관여와 봉쇄'를 동시에 추진한다는 우려가 깊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우려가 2010년 7월 조지 워싱턴호의 서해 훈련에 대한 강력한 반대로 표출됐고, 북·중 관계의 강화로 이어졌던 것이다.

군사적 압박은 북의 강경 대응책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핵 억제력을 질량적으로 더욱 강화하는데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외무성 대변인 담화로 공언했고,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무기 생산과 개발에 진전을 이루겠다고 나섰다. 한·미 연합사의 재래식 억제력 강화에는 재래식 군사력 강화로 맞섰다. 북은 자신이 주장하는 영해에 포탄이 떨어지면 대응타격을 가할 것이라고 경고한 데 이어 2010년 11월에는 정전 이후 처음으로 한국 영토에 포격을 가해 인명을 살상했다. 2011년 8월에는 러시아군 동부군관구 사령관 콘스탄틴 시덴코가 이끄는 군사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해 양국 해군을 비롯한 군대 간 교류를 재개하고 활성화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했고, 20년 만에 동해상에서 러시아와 연합군사연습을 실시하기로 합의하기도 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강력한 대응은 김정은 제1비서에게서 나왔다. 그는 2012년 8월 최첨단 서해 무도에까지 찾아가 "령토에 단 한점의 불꽃이라도 떨군다면 그것을 서남전선의 국부전쟁으로 그치지 말고 조국통일을 위한 성전으로 이어가라"고 발언한 데 이어 8월 25일에는 "이를 위한 작전계획을 검토하고 최종수표"까지 했다고 공언했다. 그 며칠 후에는 동부전선에까지 찾아가 "최고사령관의 최후공격명령을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한·미의 재래식 억제력 강화에 대응해 북의 군사적 대응을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3. 저강도 전쟁

오바마 1기에는 봉쇄와 압박뿐만 아니라 북의 '급변사태'를 상정한 작전계획과 연구도 동시적으로 진행됐다. 일각에서 의심하는 것과 같이 작전계획 5029가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급변사태'에 대한 논의와 준비가 있었다는 정황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급변사태'에 대한 논의는 이명박 정부 관리들에 의해서 주도된 것으로 보인다. 내부고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에 공개된 주한 미국대사관의 외교전문을 보면, 천영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외교부 2차관이던 2010년 2월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와 만나 북한은 경제적으로 이미 무너졌고 "김정일 사후 2~3년 안에 북한이 붕괴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2011년 7월 커트 캠벨 동아태 차관보에게 "김정일은 2015년 이후까지 살 수 없을 것"이라며 "북한이 갑작스레 붕괴할 경우 한국과 미국 정부는 한반도 통일을 위해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논의는 김정일 위원장이 뇌일혈로 쓰러졌던 것으로 추정되는 2008년 여름 이후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뇌일혈 이후 평균 3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의학적 소견에 기초하여 최고지도자 사망 이후 북은 혼돈상태에 빠질 것이고 이는 체제붕괴로 이어질 것이라는 '급변사태론'은 설득력을 갖고 유포됐다. 그리고 이러한 급변사태에 대비하지 않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논리로까지 발전되었다.

이러한 급변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구체적 활동 내용은 알기 어려우나, 적어도 한미연합사의 조직과 임무에 있어서는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주한미군사령부 내 '한국 특수작전사령부' (SOCKOR)는 특수전 부대의 작전계획과 훈련 등을 담당하는데 유사시 한국의 특전사와 결합하여 연합 비정규전 전담반(CUWTF)을 구성하게 되어 있다. 이 전담반은 정규전뿐만 아니라 "와일드카드 시나리오"에 대비하고 있고, 이들이 예상하는 시나리오에는 북한 내 내전 및 붕괴, 통일 후의 상황 등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통일 후의 상황을 담당할 '연합민사 전담반' 및 심리전을 담당하는 '연합심리전 전담반'도 구성되어 있다. 또한 미국과 일본은 2011년 6월 외교·국방장관회담에서 "미국과 일본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급변사태를 다루는 능력을 강화하는 것"과 한국과의 "삼각 안보·방위 협력 강화"를 공통전략목표로 정하는 등 '급변사태' 대비를 위한 국제적 공조도 추구하고 있다.

2011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급서는 이러한 '급변사태'론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을 것이다. 후계자로 지명된 김정은은 나이도 어리고 후계자로 훈련을 받을 시간도 부족했다. 북 주민은 고사하고 당 내부에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도 불확실했다. 사회경제적으로도 안정을 회복하기 전이었다. '급변사태'론이 상정하고 있던 여러 가지 조건들이 거의 완벽하게 갖춰졌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북은 일사불란하게 김정은을 지도자로 내세우고 지도부가 그의 주위에 결속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정은 제1비서는 노동당을 정상화하여 지도기구로서의 위상과 역할을 되살리는 한편, 군의 지도부를 장악하고 일선방문을 통해 하부 군사조직과의 연대를 강화했다. 일련의 경제 현지지도를 통해 민생을 최고로 내세우는 모습을 보이며 주민과의 관계도 급속히 발전시키고 있다. 여기에 모란봉악단과 같은 '걸그룹'이 사회적 분위기를 고양시키며 주민을 김정은 비서의 주위로 결속시키고 있다. 경제도 내외적인 요인들에 의해 이전보다 나아지는 모습이다. '급변사태'론을 무색하게 하는 일들만 벌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북·중은 한·미·일의 '급변사태'론에 대한 역공을 취하기 시작했다. 2011년 2월 멍젠주(孟建柱) 중국 공안부장이 방북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접견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봐야 할 것이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맹 부장은 "중·조 두 나라 무력 및 안전부문의 책임 일군들이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더욱 빛내이기 위한 사업을 비롯한 일련의 중대한 문제들을 심도있게 토의하고 완전한 견해의 일치를 이룩"했다고 했고, 김정일 위원장도 "두 나라 무력 및 안전부문들" 사이의 협력관계 발전에 대한 기대를 표명했다. 북의 '급변사태'를 염두에 둔 한·미·일의 협조가 점증하는데 대비하여 북·중 보안기관 사이에 대비책이 심도있게 논의되고 협력을 강화하기로 한 것이다. 이후 2012년 중국 공안이 국가안전위해죄 혐의로 김영환 등 4명을 중국에서 체포한 것은 2011년 합의가 실행에 들어갔음을 시사할 수 있다.

'급변사태'를 상정한 저강도전쟁도 목적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북은 김정은을 중심으로 안정되고 있고,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이전보다 나아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II. 오바마 2기 미국의 대북정책

지금까지 본 것처럼 미국은 오바마 정부 들어 아시아 전략을 부시 정부와는 다른 모습으로 대폭 수정했다. 이전의 전략이 힘을 내세운 일방주의였고 테러와의 전쟁에 힘을 집중하여 아시아가 상대적으로 홀대를 받은 것과는 매우 달라진 모습이다. 우선 아시아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아시아 회귀를 전면에 내세웠다. 또 세력 전이의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성격에 맞춰서 외교적, 제도적, 군사적 관여를 다양하게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아시아 전략은 큰 수정 없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바마 1기 정부가 시도한 대북 강성정책은 모두 실패했다. 그 실패를 보여주는 증거들은 많다. 북의 핵 능력은 날로 증가하고 있고, 한반도 군사적 긴장은 심화되고, 북의 정치경제는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강성정책이 목표로 했던 것들과는 정 반대의 결과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실패는 오바마 2기에서 대북정책이 선회할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1. 오바마 1기 강성 대북정책의 이유

지난 4년 미국의 대북정책이 아시아 전략과는 달리 강경노선이었던 것은 세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북이 2009년 오바마 행정부 출범 직후 및 2012년 2.29 합의 직후 로켓을 발사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북이 표면적으로 내세운 것과 같이 우주과학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었는지, 미국의 의사를 확인하기 위한 수단이었는지 그 이유를 외부에서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북의 행위가 미국으로 하여금 강성정책을 취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가운데)이 7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에서 척 헤이글 신임 국방장관(왼쪽)과 존 브레넌 신임 중앙정보국 국장(오른쪽) 지명을 발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두 번째 이유는 미국의 대북 적대인식이다. 뿌리 깊은 적대인식으로 인해 미국은 북의 로켓 발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장거리 미사일 시험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북의 이러한 도발적 행위를 처벌하기 위한 강경 대응책을 채택, 북과 미국 사이에 강경책이 악순환을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세 번째로 한국의 이명박 정부가 대북 협상을 반대하고 강성정책을 요구한 것도 큰 이유였다. 오바마 정부 출범 초기부터 이러저러한 이유로 북미대화를 지연시키던 한국 정부는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북미회담의 지속을 원치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연평도 포격 이후에는 보다 공세적인 대북정책을 요구했다. 미·중 및 일·중 세력전이 때문에 동맹강화를 추구하던 오바마 정부는 한미동맹의 유지 및 강화가 북·미 관계 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 대북 강성정책으로의 선회를 확실히 했다.

그 결과 한·미 양국은 이면적으로는 차이가 있었더라도, 선언적인 면이나 정책에 있어서 '찰떡공조'를 과시했다. 한·미 동맹관계가 '역대 최고'라는 자화자찬까지 하며 대북정책에 보조를 맞춰왔다. '역대 최고'라는 표현에 대한 평가와는 별도로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한·미 양국이 거의 완벽하게 공조를 이루며 강성정책을 4년간 흔들림 없이 시행했다는 점이다. 강경론자로서는 '원이 없을' 정도로 강성정책을 실시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미공조를 통한 대북 강성정책은 구조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 미국과 중국 및 미국과 아시아 사이에 존재하는 복합적 상호의존성 때문이다. 이러한 강성정책이 한반도 및 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저해하는 것은 그 누구의 이해에도 맞지 않는다. 한반도 긴장상태가 최악을 향해 치닫던 2011년 초 미·중정 상회담에서 "한반도에서 평화와 안정"을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내세운 것은 그래서이다. "동북아시아에서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한반도 비핵화가 긴요하다"며 한반도 비핵화를 동북아시아 평화와 안정의 수단으로 합의한 것도 비핵화를 명분으로 이 지역이 불안정해지기를 바라지 않는 이해관계를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지난 4년의 경험은 한·미 양국이 철저히 보조를 맞춰서 대북 강성정책을 취했어도 북 비핵화나 한반도의 평화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음을 입증한다. 오히려 반대로 북의 핵능력은 신장됐고 한반도는 군사적 긴장이 격화됐다. 한·미 양국이 북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강화하며, 중국에게 제재동참을 강요하고 북에 압력을 가하라고 주문한 결과 북·중 관계는 오히려 강화됐다. 또 이러한 강경정책이 한·중 관계 및 미·중 관계까지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지난 4년은 대북 강성정책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2. 오바마 2기 대북정책 전환의 가능성

오바마 정부는 1기에서도 지속적으로 대화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물론 그때마다 이명박 정부의 발목잡기나 '천안함 사건' 같은 예기치 않은 사건 때문에 별 진전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 강성정책의 실패가 확인되었기 때문에 2기에 들어서 정책전환을 할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도 높아 보인다. 제프리 베이더 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담당 선임 보좌관이 작년 말 "오바마 행정부는 다음 임기 때 북핵 6자회담 재개를 위해 북한과 직접 대화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언한 것이 그 가능성을 시사한다.

지난 선거에서 민주당이 상원 다수당 위치를 지킨 것도 이러한 정책전환에 힘을 실어 줄 것이다. 하원에서 공화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것이 부담될 수는 있다. 하지만 오바마 1기 동안 행정부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강경보수노선을 주창했던 티파티가 이번 선거에 추락한 것이 도움될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가 '미국과의 계약'을 들고 나온 공화당 보수파 때문에 제네바합의와 같은 정책을 제대로 집행하지 못했던 것처럼 오바마 1기도 공화당 보수파 때문에 정책집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강경노선을 들고 나온 티파티가 이번 선거에서 역풍을 맞고 힘이 꺾였기 때문에 공화당이 하원 다수의석을 확보하고 있더라도 이전과 같이 오바마 정부에 비타협적으로 행동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하나의 큰 변수는 국무장관 인선이다. 이 지위를 두고 수전 라이스 유엔대사와 경쟁하던 존 케리 상원 외교위원장이 국무장관으로 임명된 것은 대북정책 전환의 가능성을 높인다. 라이스 대사는 유엔 안보리에서 대북 결의안 통과를 주도했던 인물이므로 강성정책을 선호할 가능성이 높았다. 반면 케리 상원의원은 오래전부터 북과의 대화와 교류를 주장했던 인물이므로 연성정책을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 그는 2012년 3월 뉴욕 시러큐스대에서 열린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보 구축' 세미나에서 리용호 북한 외무성 부상을 직접 만나 "미국과 싸우지 않고 다른 관계를 맺길 바라고 있다"는 입장을 전달받기도 했다. 오바마 1기의 대북정책이 실패로 판명된 이상 케리 위원장이 국무장관으로 기용된 것은 정책을 전환할 좋은 명분이 될 것이다. 공화당 소속이면서도 외교와 협상론자인 척 헤이글 전 상원의원이 국방장관으로 인준을 받는다면, 케리 국무장관의 외교론은 더욱 힘을 받을 것이다.

오바마 정부는 '아시아 복귀 (pivot to Asia)'라는 표현으로 아시아 중시정책을 내세웠다가 최근 '아시아 재균형 (rebalancing in Asia)'이라는 표현으로 선회했다. 그 표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내용적으로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이 가지는 정치·경제적 중요성을 인정하고 이 지역에 보다 적극적이고 다면적으로 개입하겠다는 기조는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군사력 증강과 동맹의 유지·강화가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으나 TPP와 같은 다자적 기구의 신설과 발전도 중요한 축임을 무시할 수는 없다. 봉쇄와 개입이라는 양동술을 계속하며 중국과 밀고 당기는 관계는 계속될 것이지만 이미 중·미 관계는 복합적 상호의존 상태이므로 미국의 양동술은 근원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여기서 북·미 관계와 북·중 관계가 어떤 조합을 이룰 것인지가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오바마 1기의 경험으로 보면 북미 관계의 악화가 북·중 관계의 강화 및 미·중 관계의 악화로 가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에 비해 6자회담이 진행 중인 시기에는 대북협상이 미국과 중국 사이의 협력의 고리로 작용했다. 중·미 관계가 북·미 관계를 결정하는 변수는 아니겠지만, 이 양자 간의 상호관계가 정책결정에 고려될 것이다.

이상에서 본 것과 같이 오바마 1기의 대북 강성정책은 총체적으로 실패했으므로 2기에서는 새로운 정책을 모색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 새로운 정책이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날 지 예단하기는 이르지만 과거의 관여정책에 대한 성찰적 반성에 기초하여 단계적 기능적 관여정책이 제도화되는 길을 밟을 수도 있고, 포괄적 정치적 관여정책이 시도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여정책이 채택될 수 있는 미국 국내정치적 여건도 무르익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북 강성정책이 남북관계 뿐만 아니라 미·중 관계도 악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점을 볼 때 대북 연성정책의 채택이 미국의 다층적 복합적 아시아 전략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도 고려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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