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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삶을 마감하려는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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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스스로 삶을 마감하려는 당신에게 김태규 명리학 <356>
살아가다보면 전혀 뜻하지 않았던 그러나 그 순간에 있어서만큼은 도저히 헤어날 수도 벗어날 수도 없을 것 같은 어려움에 봉착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어려움은 어쩌면 모든 사람이 일생에 적어도 한 번쯤은 다 겪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전 궁지에 몰린 연예인이 자살하는 바람에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포기하고 있다. 그것도 젊은 사람들 중에서 그런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하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매체를 통해 그런 소식을 접하니 남의 일로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 일이 우리 주변의 아주 가까운 사람의 경우라면 실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일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의 남편이거나 아내, 자녀나 형제라면 말이다.
  
  하지만 실로 가장 아파할 사람은 그 사람의 부모님들이다.
  
  스스로 삶을 버리는 이 문제를 놓고 번민을 했다. 필자는 그리 잘 나지도 그리고 거룩하거나 인간애 넘치는 사람도 아니다. 그저 당신과 같이 그렇고 그런 사람이다.
  
  이 글을 쓰는 까닭은 독자 중에 삶을 마감하려는 충동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이 혹시라도 있다면, 그 분에게 무언가를 전하고픈 필자의 간절한 마음으로 해서 그렇다.
  
  필자는 참으로 오랫동안 사람의 운명을 연구해왔다. 27 년간은 취미였고 7 년은 본격적인 일이었다.
  
  운명학에 대해 누구는 미신이나 거짓말이라 하고, 더러는 이것을 가지고 사람들의 감정과 욕망을 지나치게 자극하여 헛된 돈을 벌고자 애쓴다. 어차피 세상은 이렇게 생겨먹었다고 여길 뿐이다. 이 시점에서 그런 것들은 필자에게 전혀 중요하지가 않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보고 상담해주면서, 그런 충동을 지닌 유형이 있다는 것도 나름 잘 알고 있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데, 정작 그런 일이 일어나느냐 하는 것은 개인적 운명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적 환경이 더 큰 비중을 지니는 것 같다.
  
  사회적 환경의 탓이 크다고 해서 당장 사회운동에 뛰어들 생각은 없다. 이 세상의 문제라는 것이 무엇을 이것저것 어떻게 한다고 해서 해결되거나 풀릴 정도로 간단하지 않다는 것, 많은 것들이 난마처럼 얽혀서 존재하기에 그럴 엄두는 감히 나질 않는다.
  
  더군다나 좀 살다보니 세상을 보는 눈이 더 넓어져서 더더욱 그렇다. 실로 모순으로 가득한 장강대하와도 같은 세상의 물결을 달랑 둑이나 제방 하나 세운다고 그 힘을 이겨낼 수 있으리오.
  
  그러나 혹 당신이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픈 충동 또는 유혹에 시달리고 있다면 필자의 얘기를 유심한 마음으로 들어주시기 바란다. 그저 그러면 고마울 뿐이다.
  
  먼저 부모가 살아계시는 분에 대한 얘기이다.
  
  당신이 세상을 버리는 순간 그것은 당신의 부모가 동시에 삶을 끝마친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없는 당신이야 그렇다 치지만 살아있으되 죽은 자의 고통과 비애는 실로 뭐라 형언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일은 너무도 이기적인 선택이다.
  
  부모란 자식과 당신 중에서 어떤 하나가 죽어야 한다는 선택을 강요받을 경우 서슴없이 '저 아이' 대신에 '나'라고 결정하는 존재이다. 사랑은 '내리사랑'인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부모도 있을 것이니, 세상은 그래서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은 법이지만 대부분의 정상적인 부모는 그렇다.
  
  실로 힘든 경지를 당하면 그간의 신앙이고 믿음이고 사실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이 사람이다. 눈앞의 현실을 아무리 악몽이라 부인해도 눈앞의 고통은 너무나도 생생해서 외면하기 어렵다.
  
  내가 지금 세상을 버리면 자식이나 아내, 남편이 어떡하나 하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지만 실로 결행에 앞서 정작 떠올려야 할 대상은 부모이고 부모에 대한 배려가 필요한 것이다.
  
  부모를 여의면 세상이 힘들긴 하겠지만 견뎌낼 수 있고 세월이 흐르면 훌륭한 삶을 영위할 수도 있다. 아내나 남편을 잃으면 세월이 지나 새 삶을 꾸릴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식을 잃으면 그 어떤 것으로도 감당이 되질 않는다.
  
  자식을 잃은 자의 삶은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자식이 살아있는 자에게 개인의 죽음은 사실 죽음이 아니다. 개체의 종말일 뿐 생명은 자식을 통해 면면히 이어지는 법이니 그래서 생명은 不滅(불멸)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면 스스로 삶을 마감할 수 있는 것일까?
  
  부모가 생존하시는 것에 비하면 '그렇다'이다.
  
  지금 필자가 하는 얘기는 효도에 관해 어설픈 얘기를 늘어놓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삶의 진실에 대한 진검승부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사기열전에 등장하는 자객 섭정은 노모의 삼년상을 마치고 나서야 부탁받은 일에 나섰다. '엄수'라는 자가 자신의 정치적 원수인 재상 '협루'를 살해해달라고 부탁한 것인데, 여기서 섭정의 자객으로서의 명예는 혈혈단신의 몸으로 엄중한 호위를 뚫고 들어가 거물을 해치웠다는 담력과 무술실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가신 다음에야 일에 나섰다는 점에 있다.
  
  부모가 떠난 다음에야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생각은 효라는 도덕적 명분의 문제가 아니라 자식을 먼저 보낼 경우 감당할 수 없이 아파할 부모의 마음을 헤아린 배려의 감정인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부모가 계실 경우에 비하면 그렇다는 것이지, 생을 스스로 마감하려는 충동은 그 순간들만을 넘기고 나면 견딜 수 있고 감내할 수 있을 정도로 삶은 좋은 것이다.
  
  노숙자로서 산다 해도 죽음보다는 좋은 것이다.
  
  엄청난 빚을 감당할 수 없어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시는가? 그냥 감방에 가서 몇 년 살면 해결되는 일이다.
  
  명예를 더럽히고 짓밟혔는가?
  
  이 세상에 명예를 버리고 자신의 안일을 탐한 자는 역사 이래 많아도 엄청 많다. 대의를 버릴 수 없어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삶이지만, 한 개인의 명예나 자존심 같은 것은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일이다, 죽는 것에 비하면.
  
  남보다 잘 살고 더 누리기 위함이 아니고 삶 자체를 이어가기 위해서라면 어지간한 법이야 어겨도 되고 나아가서 혁명을 일으켜도 될 정도로 삶 그 자체는 정당하고 대단한 것이다.
  
  2009 년으로서 우리 국운의 겨울이 온다고 얘기해왔다. 그런 얘기를 하면서 아깝게 사라져갈 많은 생명들이 눈에 선연했다. 망해도 좋고 어려워져도 사실 견딜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이 앞길이 없다는 좌절감 때문에 그런 일이 늘고 있다는 사실은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현실이다. 그저 고통스럽기만 하다.
  
  뭐니 해도 살아있어야만 성공도 하고 잘 나가는 자를 시샘도 하고 비방하기도 하면서 스스로 열심히 노력하다보면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 아닌가.
  
  살아있어야만 시쳇말로 '개겨'보기라도 할 것이 아닌가 말이다.
  
  정리하겠다. 당신이 충동을 받고 있다면 그 순간 머릿속에 부모님들을 떠올려 보기를. 당신은 그냥 이대로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야할 가벼운 존재가 아니다. 누리고 또 누려야만 하는 귀한 존재인 것이다. 특히 당신의 부모님에게 있어서는 백배 천배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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