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3~24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북미회담은 2012년 첫 양국간 회담이자 북한의 최고지도자 교체 이후 첫 회담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금번 베이징 회담은 작년 7월 28~29일 뉴욕 회담과 10월 24~25일 제네바 회담에 이어 열린 것으로서, 북한 내 정치적 변화 이후 북한의 대미정책, 핵정책이 어떤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조기에 해소하는데 유용하였다. 회담을 지켜본 6자회담 참여국들은 북한의 대외정책, 특히 핵정책에 변화보다는 지속성이 크다는 점을 미국측 협상단 대표의 발언을 통해 확인하였다.
결과 : 깊어지는 비핵화 딜레마
사실 북한과 미국은 각각 자신의 입장에서 3차 회담을 늦출 필요가 없었다. 3차 회담은 작년 말 열릴 것으로 예상됐으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으로 순연된 성격이 크다. 신속하고 치밀한 권력승계를 치른 북한은 권력공백 가능성을 조기 차단하고 새 정권의 안정성을 과시할 필요에서 북미회담을 가급적 빨리 재개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실제 북한은 베이징 회담에서 기존의 핵정책을 이어갈 의향을 보임으로써, 미국에게 계속 대화할 필요성을 부여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 입장에서도 북한과의 회담에 나설 필요가 높았다. 정권교체 이후 북한의 대내 사정과 핵문제에 대한 입장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는데, 북핵문제는 대선 경쟁에 들어선 오바마 대통령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관심사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베이징 북미회담은 양국간 상호 필요가 맞아떨어진 결과라 할 것이다.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인 글린 데이비스 대표가 회담이 "진지하고 유용했다"고 밝힌 것도 그런 점을 반영하고 있다.
회담 의제가 폭넓은 것도 양국 협상단이 회담의 유용성을 인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회담에서 다룬 사안이 비핵화 및 비확산 문제, 인도주의, 인권, 납치자 문제, 남북관계 등 광범위 했다고 미국측이 확인해주었다. 그 중 북한의 비핵화, 인도주의가 양국간 핵심 관심사였다. 북한이 우라늄농축 활동을 포함한 핵개발 프로그램을 중단하는 대신, 미국이 북한에 30만 톤 상당의 식량(영양강화제와 옥수수)을 지원하는 데 가닥을 잡은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데이비스 미국측 대표가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 중단 등 핵심쟁점에 대해 "다소 진전(a little bit of progress)이 있었다"고 밝힌 대목이 그것이다. 북한으로서는 미국이 제시한 기존의 식량 규모와 내역을 확대하는 성과가 있었다. 미국으로서도 북핵문제와 인도적 지원이 직접적 연관성이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일정한 인도적 지원을 통해 임시 비핵화 조치를 거둔 점을 성과로 꼽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상호 불신이 크고 이해관계가 팽팽할 때는 일정한 협상을 거쳐 공동이익을 추구하는 이익균형 전략이 최상이다. 그 이행방법으로는 동시행동이 타당하다. 한반도 비핵화의 얼개를 만든 2005년 9.19 공동성명이 그런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의의에도 불구하고 베이징 북미회담은 국면을 전환할 정도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가령, 이번 회담으로 6자회담을 재개할 시간표가 나왔다거나, 남북 당국간 대화로 이어질 뚜렷한 모멘텀이 제시되거나, 비핵화 조치에 큰 진전을 마련했다는 징후는 찾아보기 어렵다. 회담 직후 데이비스 대표도 이번 회담이 비핵화에 "돌파구(breakthrough)"를 열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것은 너무 나간 말이고, 그런 말을 쓰지 말기를 당부했다. 갈 길이 멀다는 말이다.
만약 이런 식의 회담이 이어진다면, 북핵문제는 깊은 딜레마의 골짜기에 빠질 수 있다. 앞으로도 북미회담이 불규칙적으로 열리겠지만, 그렇게 누적된 회담이 자연스럽게 6자회담으로 성장전화하지 못할 수도 있다. 다만, 북한은 식량지원을 받으며 핵능력은 고스란히 유지할 수 있고, 미국은 약간의 보상으로 비확산의 문턱을 지킬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비핵화 딜레마라는 골짜기는 침식작용으로 더 깊어질 수 있다.
북한은 이미 2차 핵실험 이후 핵보유국가를 선언한 바 있고, 한반도 비핵화가 궁극적인 목표라 하면서도 핵능력을 강화해왔다. 그 사이 남북관계는 악화되고, 미국은 한미관계와 대내문제로 북핵문제에 적극 대처하지 못해왔다. 미국은 물론 남한 내에서도 북한을 사실상의 핵보유국가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도 나타나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의 북한 핵프로그램에 대한 감시활동 재개, 우라늄농축을 통한 핵개발 실태조사, 기존 핵불능화 과정 평가 및 폐기 방안 협의, 그리고 김정은 체제 하의 북한의 비핵화 공약 확인 등 한반도 비핵화의 길은 멀기만 하다. 그런데 2008년 12월 이후 6자회담이 중단되어 있고, 이후 네 차례의 북미회담은 북핵문제를 관리하기에도 역부족이었다. 왜 그런가?
원인 : 시간끌기 혹은 전략 부재 탓
한반도 비핵화와 관련하여 시간은 누구 편인가? 9.19 공동성명 합의 이후 북한의 불법위폐 논란(소위 BDA 사태)을 거쳐 2007년 비핵화 초기단계 조치와 불능화 단계를 거칠 때만 해도 그런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2008년 북한이 제출한 핵 신고목록과 불능화 이행 내역을 검증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북미간에, 그리고 6자회담 수석대표회담에서 논란 끝에 결렬되었다. 2008, 2009년 취임한 이명박, 오바마 행정부는 기존에 약화된 양국간 동맹관계를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6자회담이 추진해온 비핵화 프로세스에 제동을 걸고 先북핵포기에 발맞추었다. 그때부터 북핵문제는 다시 악화일로로 진입하고 서울과 워싱턴에서 주관적 시간계산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시간은 우리 편이다",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다", "전략적 인내가 효과를 볼 것이다" 등등.
어불성설이지만 '비핵·개방·3000'을 옹호한 MB정부와 그 지지자들은 북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자기만족적인 정세인식을 보였다. 청와대를 비롯해 정부에서 시작된 북한붕괴론은 구름을 타고 여기저기로 흘러갔고 심지어는 미국 정보당국의 판단에도 스며들어갔다.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이상설이 2007년 말부터 회자되기 시작하였고 김 위원장이 5년을 넘기기 어렵다는 관측이 확산되었다. 거기에 2009년 4, 5월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와 2차 핵실험은 한미일 주도의 대북제재를 가져왔다. 금융위기에 대처하고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처리하는 데 급급한 오바마 행정부는 한국정부의 대북 압박정책을 지지하는 것이 편리했을 것이다. 기존의 합리적 북핵정책은 주관적인 북한붕괴 대비론으로 전환되어갔다. "기다리는 것도 전략"인 것처럼 보였다. 정말 그 사이 북한은 붕괴의 길로 들어섰는가? 김정일의 건강 악화와 사망을 거치면서 북한정권이 분열하기 시작하였는가?
분명한 사실은 서울 주도로 한미간에 북한붕괴론과 대북압박론에 기초한 주관주의적 대응이 상황을 주도하고 있는 사이 북핵문제는 관리되기는커녕 악화되어 갔다는 점이다. 핵외교를 통한 북한의 체제생존전략은 핵보유 자체를 목표로 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는 형국이 조성되었다. 오바마 행정부가 취임하기 1개월 앞선 2009년 1월 북한은 대미 국교정상화와 핵문제는 별개임을 분명히 하였다. 자신도 핵보유국이기 때문에 미국과 핵군축 회담을 하자는 것이다. 이어 북한은 미국의 '적대시정책'이 사라지지 않으면 핵능력을 강화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해 5월 25일 북한은 2차 핵실험을 단행하였다.
이렇게 볼 때 서울과 워싱턴에 들어선 새 정부의 주관주의적인 정세 판단과 동맹강화론은 결과적으로 북한에 핵능력을 강화할 명분과 시간을 갖게 해주었다. 시간은 북한편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명박-오바마의 대북 핵정책은 객관적 시간을 주관적 시간으로 오독할 경우 정세 오판과 정책 실패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북한의 핵실험 원인을 북한의 핵 야망으로 환원시킬 경우 관련국들의 대북정책이 존재할 이유는 없다. 노무현 정부는 반테러전쟁과 일방주의 외교안보정책으로 일관하던 부시 행정부를 설득해 비핵화 틀을 짜고 1~2단계의 비핵화 조치를 이행해나갔다. 반면에 이명박 정부는 그런 과정을 무시하고 실패한 부시 정부의 先북핵포기를 재연시켜 북한을 압박해왔고, 급기야 2차 핵실험 사태에 직면하였다. 기다리며 압박하는 것 외에 다른 전략을 구사하지 못하는 사이, 북한은 핵능력을 강화해 가며 형식상 남한을 거치며 미국과의 양자대화 구도를 굳혀가는 것처럼 보인다.
북한붕괴론은 완벽한 오류이고, 비핵화의 관점에서 볼 때 시간은 한국과 미국이 아니라 북한편에 가까워 보인다. 이명박 정부는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라는 입장에서, 기다리는 대상(정책목표)을 점검하고 기다리는 것 외의 건설적 전략을 적극 검토해 보아야 할 마지막 시점에 서있다.
과제 : 분명한 우려와 조심스런 낙관 사이에서
베이징 북미회담 직후 회담의 주역이었던 김계관 북한측 대표와 글린 데이비스 미국측 대표는 각각 중국, 한국, 일본 등 관련국들의 6자회담 관계자들을 만나 회담 결과를 알리고 협의했다. 김계관 대표는 회담 결과를 "긍정적"이라고 밝혔고, 한국과 중국측도 회담이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관계 개선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북한 내 정권교체 이후 비교적 빨리 북미회담이 열리고 순조롭게 마친 것이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관계에 청신호로 작용할 가능성을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다. 벌써부터 상반기 중 6자회담 재개 가능성마저 점쳐지고 있다. 그렇지만 6자회담 재개를 위해서는 의제 조율은 물론, 그에 앞서 북한과 미국 사이에 조정·해결할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을 어느 정도 수준까지 마무리 짓고 6자회담으로 이륙할 것인지는, 데이비스 대표의 말처럼 미국 내에서, 그리고 관련국 간에 협의가 필요하다. 여기에 관련국들의 국내정치도 변수이다. 한국과 미국 내 대선 국면, 그에 대한 북한측의 시간끌기 전술, 특히 남한과의 거리두기 전술이 작동할 경우 6자회담의 재개가 늦춰지거나 재개되더라도 금년 내 비핵화에 '돌파구'가 생길지는 불확실하다.
한국으로서는 6자회담 재개와 남북관계 재개를 동시에 추진할 구도를 짜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관련해 한미간 협조는 긴밀한 것으로 보인다. 2월 25일 서울에서 임성남 외교통상부 한반도 평화교섭 본부장과 글린 데이비스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공동 브리핑을 가졌다. 데이비스 대표는 베이징 북미회담에서 북한측에 "한국과의 관계개선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말했고, 임 본부장은 "6자회담 재개 과정에서 3차 남북 비핵화 회담도 개최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들어 남북관계가 악화되어 왔고 정부가 6자회담 재개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남북대화와 6자회담 동시 재개 구도가 가시권에 들어설 지는 낙관하기는 어렵다.
물론 북한은 미국과의 대화, 나아가 6자회담 조기 재개를 위해 필요하다면 남한과의 대화에 응해 분위기 조성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그것을 남북관계 개선의 동력으로 삼을 의지는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 MB 집권 말년에 남한정부와 적극적인 관계개선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북한에서는 키리졸브 한미 합동군사연습에 맞서 김정은 최고사령관이 연평 포격부대를 시찰하고, 국방위원회가 이명박 정부를 강도 높게 비난하고 있다. 결국 이명박 정부 잔여 임기 하에서 북핵문제는 상황 악화를 막고 관리모드로 임하는 게 적정 목표로 보인다.
북한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강한 불신을 갖고 한미간 대북 압박에 대해 핵능력 강화로 응수하면서, 북미대화와 6자회담에서 협상력을 제고하려 할 것이다. 1차 북핵실험이 있었던 2006년을 전후로 외교가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북한의 핵개발 (시위)이 외교협상을 통한 생존전략이라는 평가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2차 핵실험 이후로는 핵보유 자체가 생존전략이라는 평가가 우세하다. 그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살펴보는 일은 향후 한반도 비핵화 전략을 짜는데 필요한 작업이다. 한반도 비핵화와 비확산 사이에서 깊어진 북핵 딜레마의 골짜기를 어떻게 해쳐나갈 것인지, 새로운 북핵 전략을 짤 때이다. 주관적 정세판단과 일방적 접근을 넘어서.
* 원제 : 베이징 북미회담 평가와 과제
* 코리아연구원(연구기획위원장: 이정철)은 네트워크형 싱크탱크로 정치ㆍ외교, 경제ㆍ통상, 사회통합분야의 정책대안을 제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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