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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정세를 읽는 다른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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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정세를 읽는 다른 시각 [코리아연구원] "한반도를 비핵화해야 한다"
한국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의 마지막 장면. 휘발유가 흥건히 뿌려진 주유소 앞마당에서 경찰, 조폭, 그리고 동네 건달들이 각자 손에 라이터를 들고 대치하고 있다. 이들은 서로 "꼼짝마!"를 외치고 있다. 누구라도 먼저 라이터를 바닥에 던지면 모두 죽는다. '공포의 핵균형'은 바로 이런 상황과 닮아 있다. 생존을 위해 핵무기를 포기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걸 사용할 수도 없다. 어떤 국가라도 먼저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연쇄반응을 일으켜 공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제정치에는 영화와 다른 중요한 무엇이 하나 있다. 영화에서는 경찰이든 조폭이든 동네 건달들이든 모두 한손에 라이터를 들고 있다는 점에서 평등하다. 위험한 상황이지만 서로에 대해 굴종적이지는 않다. 국제정치는 그렇지 않다. 핵무기 보유국은 극소수이며, 그들은 자신들끼리 뿐만 아니라 다수의 비핵국가들에 대해서도 '꼼짝마!'라고 윽박지른다. 똑같이 위험하지만 이젠 굴종적 관계까지 추가된다.

언제부터인가 '한반도 비핵화'는 절대선이 되고 있다. 한반도 핵무장이나 반대로 강대국의 핵무기 폐기돼야 한다고 외치면 순진한 몽상가들로 치부된다. 한반도 비핵화는 한반도 평화의 알파요 오메가다. 과연 그러한가? 아마겟돈이 될 강대국간 핵전쟁에서 한반도 비핵화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휘발유 천지인 곳에서 혼자 라이터를 버린다고 과연 안전해 질 수 있겠는가?

핵무기는 국내용?

인간이란 동물이 합리적 행위자라면 공멸에 대한 두려움으로 결코 핵전쟁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다. 히로시마의 원폭투하는 미국이 유일한 핵무기 보유국일 때나 가능했다. 복수의 핵보유국이 등장하면서부터 강대국간 전쟁은 상상하기 힘들어졌다. 1950년 한국에서 그리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사태에서 미국과 소련은 상호충돌을 극도로 꺼렸다. 미소 양국은 냉전기 내내 그랬다. 20세기초 수억명의 살상자를 낸 세계대전의 주역들인 유럽 강국들은 이제 왜 더 이상 싸우지 않는가? 그것이 과연 민주주의와 경제적 상호의존 때문만인가? 핵보유 이후 인도-파키스탄 관계가 오히려 안정적으로 변했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국 핵무기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래 강대국들이 꿈꿔왔던 주권의 불가침성을 드디어 현실화시켰다. 핵무기로 인해 강대국들 간의 전 지구적 지배연합이 등장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핵무기의 운명도 기구하다. 눈물겨운 노력 끝에 탄생하였지만 바로 그 탄생 순간에 애초의 목적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핵무기는 도대체 어디에 쓸 것인가? 핵무기가 더 이상 대외 전쟁용이 아니라면 남는 건 하나밖에 없다. 국내용이 그것이다.

조지오웰의 소설 1984의 한 대목을 보자. 전체주의 국가 오세아니아는 국민들에게 궁극의 무기를 소유한 다른 강대국들과의 전쟁상태를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외부적 위협을 통해 내부적 단결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 물론 그 과실은 빅브라더의 몫이다. 냉전기 미소 상호간 핵위협은 그들 진영 내부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단속하였던가? 탈냉전기 중국의 증강된 핵전력이나 테러리스트들의 핵무기 탈취 시나리오는 펜타곤과 군산복합체들을 또 얼마나 살찌우고 있는가?

핵보유를 꿈꾸는 약소국들이라고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들도 사실 애초에는 생존을 위해 핵무장을 열망한다. 생존! 생존! 생존! 국제정치학자 케네스 월츠 말마따나 전 세계에 핵보유국이 많으면 많을수록 국제정치는 평화스러워질 것이다. 누구든 함부로 건드리면 똑같이 응징 당한다는 상호간 확신이 있다면 어느 국가도 함부로 전쟁에 나설 수 없다. 북한이나 이란의 핵보유 정당화 논리도 이에 근거한다.

그러나 그들의 핵무기 역시 국제적으로 공인받는 순간 이제 국내용으로 용도변경을 한다. 국제적 핵무기 카르텔의 일원이 되기 위해 필요했던 핵무기는 이제 대내적으로 인민들을 동원하고 통제하는데 사용된다. 미국의 압제에 저항하기 위해 필요했다는 핵무기는 이제 지배 권력의 치졸한 밥그릇 유지 수단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 북한 거리에 걸린 포스터 ⓒ연합뉴스

머스킷 총과 핵무기

17세기 홉스가 '만인대 만인의 투쟁' 상태를 설파한 이후 무정부상태는 반드시 피해야할 그 무엇인가가 되었다. 그 결과 폭력을 독점하는 국가권력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폭력독점에 대한 정당화 논리를 국제정치로 확장한다면 무언가 들어맞지 않는다. 국가들 역시 서로 무정부 상태 속에 있으면서 왜 자신들의 권력을 단일한 초국적 권력에 '신탁'하지 않는가? 국내적으로는 무정부상태의 위험성을 설파하던 국가들이 왜 국제정치에서는 무정부성의 절대성을 외치는 것일까? 국가의 위선이다.

핵보유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무엇인가? 국제정치는 무정부상태이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 믿을 건 자구책밖에 없으며, 그 가장 효율적 수단이 바로 핵무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 모든 이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국가만이 핵무기를 독점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 휴대폰처럼 될 수만 있다면 모든 개인들이 핵무기를 갖는 것이 인간에 대한 그리고 인간 상호간의 모든 압제를 소멸시킬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다시 조지 오웰의 주장에 귀 기울여 보자. 인류 역사에서 최고의 무기가 손쉽게 만들어지고 전파되었을 때 폭정에 맞서는 혁명과 민주화가 더 쉬웠다. 머스킷 총이 기껏 최고의 무기였을 때 인간들은 권력의 압정에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었다. 프랑스혁명, 미국혁명은 시민들이 그 시대의 최고무기로 무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달과 그에 대한 독점으로 최고무기를 가질 수 있는 세력은 점점 소수가 되어갔다. 그리고 핵무기 시대는 그 격차를 극대화했다. 핵을 갖는 극소수와 핵을 갖지 못하는 대다수의 심각한 비대칭성은 결국 전자의 통제, 협박, 폭력에 대한 후자의 저항을 극도로 어렵게 만들었다. 소수에 대한 다수의 굴종은 평화라는 이름으로 가려져 있는 것이다.

결국 굴욕적이지 않은 평화를 얻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로 거칠게 요약된다. 누구라도 핵무기를 갖던지, 아니면 현재에 있는 모든 핵무기를 초국적 권력에 신탁하던 지이다. 당연히 후자의 경우는 핵무기뿐만 아니라 고도화된, 그래서 개인이 가질 수 없는 최고의 재래식 무기들도 포함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상황이 실제로 이루어질 가능성은 지극히 낮아 보인다. 최고의 무기를 소유한 국가권력은 절대로 그것을 국내적으로 확산시킨다거나 반대로 초국적 권력에 신탁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결국 우리는 핵무기 문제에서 권력의 이기적 속성을 재확인한다. 핵무기를 진정으로 위험한 무기로 만드는 것은 핵무기 그 자체가 아니라 핵무기 보유 국가들의 탐욕인 것이다.

한반도 비핵화와 동상이몽

한반도 비핵화 개념은 1991년 12월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이 합의되면서 공식화되었다. 북한은 이미 1970년대부터 '한반도 비핵지대'를 주장하기 시작했지만 한반도 핵문제에 대해 남북한 당국이 최초로 공감대를 형성한 것은 비핵화공동선언에서였다. 이후 한반도 비핵화는 남북간 이해관계가 뒤얽힌 신화가 되기 시작하였다. 기회 있을 때마다 외치는 한반도 비핵화는 왜 여전히 요원한 것인가?

전통적으로 한반도 문제를 둘러싼 2개의 권력관계가 존재한다. 강대국간 권력관계와 그 속에 위치한 남북한간 권력관계이다. 핵심은 역시 강대국간 권력관계이다. 날을 수 있다는 관념이 아무리 강해도 높은 빌딩에서 뛰어내릴 수 없듯이, 약소국이 아무리 자기중심적이라 해도 강대국과의 비대칭적 세력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다.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핵심 강대국은 역시 미국과 중국이다.

미국은 한반도 비핵화를 추구해야할 합리적 동인을 갖는다. 자신의 전 지구적 헤게모니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궁극의 무기를 독점해야 한다. 오웰의 경고대로 핵무기가 확산될수록 그만큼 국제정치에 대한 미국의 독점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북핵 폐기에 대한 미국의 열망을 북미관계의 특수성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북핵문제는 이란 아마디네자드 정권의 핵개발이나 70년대 말 남한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과 동일한 선상에서 취급되어야할 사안일 뿐이다.

중국은 어떠한가? 중국 역시 핵무기 독점국으로서 핵확산 차단에 미국과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한반도의 핵확산은 중국의 전통적 라이벌 일본의 핵무장, 그리고 대만의 핵무장까지 초래할 수 있다. 그만큼 동북아 지역에서 중국의 통제력은 훼손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한반도 핵확산은 대미관계에도 부정적 영향을 준다. 여러 갈등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미중관계는 비교적 안정적이다. 중국은 경제발전을 위해 자본주의 종주국 미국과의 원만한 관계가 필요하고, 미국은 과도한 헤게모니 유지비용을 줄이기 위해 중국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반도 핵확산은 미중관계의 불확실성을 단숨에 증폭시킬 수 있다. 미중 사이의 '완충지대'가 궁극의 핵무기로 무장되다니 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가.

그러나 중국의 속내가 완전히 미국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미국과 중국이 상호 공멸을 부르는 대규모 전쟁을 회피한다 하더라도 '사소한' 이권 다툼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에게 한반도는 미국의 압박을 차단해주는 지정학적 자산이다. 오백년전 임진왜란 때나 20세기 한국전쟁 때나 중국은 '순망치한'의 논리에 근거해 한반도에 군사개입을 단행하였다. 결국 중국에게는 입술이 없어지는 것보다야 차라리 부풀어 오르는 게 낫다. 너무 부풀어 올라 음식을 아예 먹을 수 없는 위험성이 존재할 지라도.

따라서 중국도 미국과 함께 한반도 비핵화에 찬성함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경우 친중적 북한의 붕괴보다는 북한의 핵무장을 용인할 수도 있는 것이다. 파키스탄의 핵보유를 용인한 중국의 행태가 이를 반증한다. 사실 이스라엘의 핵보유를 용인한 미국의 행태와 또 무엇이 다르겠는가?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남북한의 입장은 무엇인가? 양자 모두 한반도 비핵화를 주장하고 주장하고 또 주장한다. 남한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이미 두 번의 핵실험을 한 북한도 특유의 '유체이탈' 화법으로 한반도 비핵화에 목소리를 높인다. 각각 동맹 파트너인 미국과 중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남북 모두에게 핵개발은 여전히 달콤한 유혹이다. 특히 북한에게는 달콤하기 보다는 절박하다. 미국의 핵우산에 안주하는 남한과 비교해 북한은 러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 동맹국 중국의 핵우산 역시 받아들기 힘들다. 결국 북한은 독자적으로 핵개발에 나설 수밖에 없다. 북한의 핵개발은 사악함의 소산이 아니라 합리적 사고의 결과인 것이다. 미소 데탕트와 주한미군 철수가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을 부추긴 것과 논리적으로 동일하다.

사실, 북한이 핵무기를 갖는다고 당장 핵무기 카르텔의 정식회원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야한 수준의 핵폭탄 몇 발이 아니라 세련된 반격능력을 구비해야 한다. 나의 핵무기로 상대를 한방에 넉 다운시킬 수 없다고 믿을 때 국가 상호간의 핵무기 카르텔은 비로소 성립된다. 특히 핵잠수함의 보유 여부는 반격능력의 인증서이다. 지구 바다속 어디인가에 돌아다닐 적국의 핵잠수함들을 무슨 수로 선제공격 한방으로 일거에 파괴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상호확증파괴(MAD)의 논리다.

따라서 반격능력이 없는 북한의 핵무기는 '자폭용'에 불과하다. 어차피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하면 상대의 보복공격으로 반드시 죽게 된다. 물론 북한도 핵잠수함을 보유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드는 막대한 자본과 기술력을 감안해 보면, 그리고 동해 앞바다에서 심심찮게 고장 나 떠오르는 잠수함 수준을 보면 그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결국 북한의 핵보유 시도가 담고 있는 의미는 "내 말 안 들으면 너 죽을지도 몰라!"가 아니라 "내 말 안 들으면 '나' 죽을지도 몰라!"가 된다. 미중간의 완충지대를 흔들어 자신의 몸값을 높이려는 시도다. 허약함을 이용해 상대를 갈취하려는 전략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한반도 비핵화를 둘러싼 일련의 상황들은 한편의 블랙코미디다. 사뭇 진지한 것 같지만 한 꺼풀만 들춰보면 국가들 간의 우스꽝스러운 권력놀음이 드러난다. 한반도에 사는 어떠한 민중도 핵무기 공포 속에 살기를 원하는 이는 없다. 권력 스스로 핵무기를 만들고 또 권력 스스로 비핵화를 외친다. 자기들끼리 핵전쟁을 할 것도 아니면서 그 공포를 이용해 민중들을 동원하고 또 통제한다.

한반도 비핵화는 자동적으로 한반도 평화와 연결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동북아 비핵화, 그리고 핵무기 없는 지구가 되더라도 한반도 평화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소수의 국가들이 최첨단 재래식 무기를 독점할 테니까 말이다. 오히려 상호간 공멸의 위험이 없다보니 보다 자유롭게 한반도를 서바이벌장으로 변화시킬 지도 모른다.

최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문제로 많은 이들이 고통 받고 있다. 기지건설의 정당화 논리는 결국 국익이 주민들의 권익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국가이익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군의 출동 기지가 필요하며,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한국은 그 건설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모순으로 가득찬 논리다. 미중 양국이 자기들끼리 '대판' 싸울 의사가 전혀 없는데 한국의 평화스러운 시골 마을에 무슨 해군기지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연평도 사건이나 김정일 사망 직후 미국과 중국은 그야말로 신속히 개입해 분쟁 확산을 차단하였다. 남북간 분쟁은 자칫 자신들끼리의 분쟁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서였다. 그렇게 상호충돌을 두려워하면서 무슨 해군기지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왜 아무 상관도 없는 강정마을 주민들이 강대국들의 '찌질한' 밥그릇 싸움에 고통 받아야 하는가?

우리가 '진정으로' 한반도 평화를 염원한다면, 한반도 비핵화를 외치기에 앞서 한반도 비핵화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권력 놀음과 그에 발맞춰 자국민의 권익쯤은 우습게 생각하는 남북한 지배권력의 행태를 비판해야 하지 않을까? 또 핵 없는 세상을 외치기에 앞서 전 세계 재래식 무기들의 폐기에 목소리를 높여야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후에도 여력이 있다면 그때야 비로소 한반도 비핵화를 주장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권력은 언제나 공포를 발명하고 또 그 공포를 이용해 자신의 지배를 영속화하려 든다. 그 공포를 극복할 때야 우리는 비로소 평화를 얻을 수 있다. 필요한 것은 결국 용기다.

* 필자 주 : "한반도를 비핵화해야 한다"는 제목은 미셸 푸코의 강의록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빌려왔음을 밝힌다. 푸코는 이민자들로부터 프랑스 주류사회를 지켜야 한다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주장을 풍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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