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MD가 없어도 죽은 남자, 후세인
"사악한 지도자가 대량살상무기를 갖지 못하게 하겠다."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2003년 3월 이라크 침공을 강행하면서 내세운 최대 명분이다. '사악한' 독재자 사담 후세인과 '대량살상무기'의 조합은 미국 내에서는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하면서 미국 국민의 60-70퍼센트가 이 전쟁을 지지하게 만들었다. 후세인이 자국 내 쿠르드족에게 독가스를 사용한 전례도 침공을 전후해 회자되었다. 그런데 1980년대 후세인 정권에게 화학무기를 제공했던 당사자는 바로 미국이었다. 걸프전 이전 중동의 석유 부국이었던 이라크는 걸프전 때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의 폭격과 이후 분별없는 경제제재로 산업시설이 거의 황폐화되었고, 그 속에서 5세 미만의 어린이 50만명을 포함해 약 200만명의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사용된 모든 대량살상무기의 의한 희생자의 수보다 많은 것이다.
걸프전 이후 8년간의 혹독할 정도의 무기 사찰 및 해제 작업으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도 대부분 제거되었다. 후세인 정권도 미국의 침공 직전까지 유엔 무기 사찰단 활동에 거의 전적으로 협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객관적인 현실조차도 부시 행정부의 마음을 돌려놓지는 못했다. 후세인의 WMD는 애초부터 이라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부시의 마음 속에 있었고, 침공의 목적은 있지도 않는 이라크의 WMD 제거가 아니라 석유를 손에 넣어 세계 패권을 강화하고자 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혹시나 하고 이라크 전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미국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고, 제국의 꿈을 안고 강행한 이라크 전쟁은 역설적으로 제국의 몰락을 가져온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한편 2006년 11월 5일 자신의 고향 티크리트 인근에서 생포된 후세인은 50여일 후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라크 특별재판소는 후세인이 1982년 148명의 시아파 주민들을 학살한 혐의를 인정해 사형을 선고한 것에 따른 조치였다. 이라크 정부는 그의 교수형 장면을 담은 비디오를 전세계에 공개했다. 이로써 1979년부터 2003년까지 철권통치를 휘둘렀던 사담 후세인은 수많은 논란을 뒤로 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후세인은 교수형 집행 직전에 한 교도관의 "두렵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아니다. 나는 군인이기 때문에 두렵지 않다. 나는 지하드(성전)와 침략자들과 맞서 싸우는 것으로 내 생애를 보냈다. 이 길을 걸은 사람은 누구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라크의 사례는 핵문제의 현실과 관련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핵 개발 의혹이 아무리 불확실하더라도 그 의혹만으로도 침공의 명분으로 작용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당시 국제사회에서는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이 강력한 유엔 사찰과 제재 하에 있었기 때문에 핵무기를 개발할 능력이 없었다고 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관련 정보를 왜곡·과장하면서까지 침공을 강행했다. 당시 부시 행정부는 "후세인이 핵무기를 갖는다면"이라는 화법을 즐겨 사용했는데, 이는 후세인이라는 '광폭한 독재자'와 핵무기라는 '대단히 위험한 무기'를 조합해 사람들의 공포 심리를 자극함으로써 침공의 명분을 쌓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지구촌이라는 말을 실감케 하듯, 이라크 전쟁은 한반도에게도 '강 건너 불'이 아니었다. 남한의 노무현 정부는 부시의 이라크 침략전쟁을 도우면서 한반도 평화를 도모하고자 했다. 두 차례에 걸친 이라크 파병을 통해 부시의 대북강경책을 완화해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시의 대북정책을 변화시킨 힘은 남한의 파병이 아니라 이라크 저항세력의 반격과 이에 따른 네오콘의 몰락으로부터 나왔다. 또한 파병 추진 당시 원유 확보와 제2의 중동 특수에 기초한 경제실리론도 맹위를 떨쳤다. 불난 집에 가서 장물을 챙기겠다는 속셈도 문제였지만, 파병 10년이 가까이 지나도록 수천억원의 파병 비용과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상쇄할 만한 어떠한 경제적 실리도 없었다. 이러한 국익론은 이라크 현지 상황에 대한 몰이해가 낳은 '블랙 코미디'였던 셈이다.
이라크-북한-미국 사이의 상호작용도 흥미롭다. 부시가 이라크 침공 준비에 여념이 없던 2002년 말에서 2003년 초에 북한은 미국에 맞서 핵 카드를 꺼내들었고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도 탈퇴했다. 당연히 미국과 국제사회에서는 대량살상무기 보유 여부가 극히 의심스러운 이라크에는 무력 사용을, 대놓고 핵무기를 개발하겠다고 나선 북한에게는 '평화적 해결'을 말하는 부시 행정부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그러자 부시 행정부는 "북한은 이라크와 다르고, 이에 따라 다른 방법을 채택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는 진땀 해명에 급급했다. 북한이 핵카드를 전면화시킴으로써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명분없는 전쟁'으로 만드는데 일조했던 셈이다.
또한 2003년 4월 하순 미국이 바그다드를 점령해 후세인 동상을 쓰러뜨리자, 네오콘들은 "김정일은 후세인 동상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아버지의 동상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라크에서 선보인 미국의 막강함 힘에 김정일도 고분고분해질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김정일은 굴복이 아니라 "핵 억제력"을 갖춰 미국과 정면 대결도 불사하겠다고 선택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국제사회 일각에서는 "이라크가 진짜로 대량살상무기를 가지고 있었다면 침공을 당했을까?"라는 반문이 일어났다. 그리고 부시와의 거래를 선택한, 그래서 '리비아 모델'이라는 말을 유행시킨 또 한명의 독재자의 죽음은 오늘날 국제정치의 현실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 카다피와 오바마의 만남 |
WMD를 포기해도 죽은 남자, 카다피
무아마르 카다피,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해 2011년까지 절대 권력자로 군림했던 그도 아랍을 휩쓴 '재스민 혁명'의 거센 바람을, 보다 정확하게는 '민간인 보호 책임(Responsibility to Protect)'을 앞세운 서방 세계의 포탄을 비껴가지 못했다. 2011년 2월 들어 리비아에도 튀니지와 이집트를 휩쓴 반정부 민주화 시위의 여파가 몰아닥쳤다. 카다피 정권은 무자비한 진압에 나섰고, 이에 반대 세력은 벵가지에 국가과도위원회를 설립해 본격적인 항전에 나섰다. 리비아 사태가 내전으로 치닫자 유엔 안보리는 결의안 1973호를 채택해 비핵 금지구역과 가다피 일가의 자산 동결을 선포하고 민간인 보호에 나섰다. 이를 근거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리비아 반군에게 대규모의 군사 지원을 하면서 공습에 돌입했다. 결사 항전을 다짐하던 가다피는 2011년 10월 20일 시르테에서 반군에게 생포되어 최후를 맞이했다. 카다피의 운명은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할 수 있지만, WMD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여러 가지 주목할 만한 해석이 가능해진다.
적어도 WMD 문제와 관련해 카다피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에서 '모범생'으로 통했다. 리비아는 2003년 12월 19일 WMD 포기 선언을 하고, 2004년에는 미국, 영국, IAEA와의 협력 속에서 이들 프로그램의 폐기를 완료했다. IAEA에 따르면, 리비아는 1980년대 초부터 핵 개발에 착수했다. IAEA는 "1980년대 초부터 2003년 말까지, 리비아는 핵물질을 수입하고 IAEA에 신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광범위한 핵활동을 하고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구체적으로 리비아가 파키스탄으로부터 우라늄 농축에 필요한 원심 분리기를 도입해 가동하고 있었고, 중국제 핵무기 설계도와 제조 기술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1990년대 후반부터 2003년 10월까지 파키스탄의 '핵무기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A. Q. 칸으로부터 원심 분리기를 밀수해 2003년 10월에 우라늄 농축 실험에 성공한 것과 고농축 시 핵무기 한 개를 만들 수 있는 분량의 '육불화우라늄UF-6'(금속 우라늄을 가스 상태로 전환한 것)을 수입한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리비아는 2003년 말에 대량 살상 무기 포기 선언을 하고, 비핵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렇다면 카다피 정권은 왜 핵무기를 비롯한 WMD 개발을 포기한 것일까? 먼저 테러리즘과 WMD 포기를 통해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야 할 정치적.경제적 필요성이 커졌다. 또한 WMD를 포기하지 않을 경우 '이라크 다음에 리비아'라는 공포가 존재했다. 게다가 2003년 10월에 원심 분리기를 싣고 리비아로 향하던 선박이 중간에 나포되어 핵 개발을 부인하기도 어려워졌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에서 WMD를 포기하면 정치적.경제적 혜택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한 것도 한몫했다. 바로 이 시기에 영국은 미국과 리비아의 비밀 협상을 주선했다. 비밀 협상의 이면에는 부시 행정부의 동기가 있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부시 행정부가 전면에 내세운 '테러와의 전쟁'에 리비아의 협력이 필요했고, 에너지 전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리비아가 주요 산유국이라는 점도 고려되었으며, 자발적으로 WMD를 포기한 사례를 만들어 북한과 이란을 압박할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또한 이라크 전쟁에 대한 점증하는 안팎의 비판을 무마하기 위해 이라크에서 보여준 미국의 힘이 리비아의 자발적인 WMD 포기를 가져왔다는 정치 선전도 필요했다. 당시 부시 행정부가 북한이나 이란과는 달리 리비아와 사실상 양자 협상에 나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리비아가 WMD를 포기하자, 미국도 2006년에 리비아를 '테러 지원국'에서 해제하고 관계 정상화 조치를 취했다. 그러자 북한과 이란 핵문제 해법으로 '리비아 모델'이 급부상했다. 2006년 5월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부 장관은 "리비아는 북한과 이란 같은 나라에 중요한 모델"이라며, "2003년이 리비아 국민들에게 전환점이 됐던 것처럼 2006년은 북한과 이란 국민들에게도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기문 당시 외교부 장관도 "리비아는 WMD를 스스로 포기해 미국으로부터 여러 가지 인센티브를 받게 됐다"며, 북한도 리비아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고 거들었다. 김정일의 절친으로 알려졌던 카다피도 2005년 5월 반기문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북핵 문제는 심각하고 위험한 일"이라며 "북한과 이란도 리비아가 한 것과 같은 조치를 따라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나 '리비아 모델'은 북한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우선 부시 행정부는 리비아와 '직접 협상'을 통해 WMD 포기와 관계 정상화를 시차를 두고 맞바꾸는 방식으로 협상한 반면에, 북한에 대해서는 2006년까지 양자 협상을 거부했다. 또한 부시 행정부가 리비아와 협상을 진행하면서 클린턴 행정부 때 합의한 사항들을 이행함으로써 상호간에 신뢰를 쌓은 반면에, 북한에 대해서는 기존 합의를 뒤엎는 선택을 했다. 따지고 보면 리비아 모델을 거부한 당사자는 부시 행정부였던 셈이다. 이를 반증하듯 북핵 해결에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부시 행정부가 클린턴의 대북 포용 정책으로 되돌아가면서 북한과 '직접 협상'에 나선 2007년부터였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또 한 가지 주목할 현상은 나토가 카다피 정권을 축출하기 위해 군사적 개입을 선택한 2011년 들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WMD를 포기한 카다피 정권을 비확산의 모범 사례로 일컬었던 미국 등 서방국가들은 그를 권좌에게 몰아내기 위해 군사 행동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그러면서 2003년 카다피와 WMD 포기 협정에 도달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만약 합의에 실패해 카다피가 핵과 미사일을 갖게 되었다면, 그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들 무기의 사용도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2003년 합의를 통해 "최악의 악몽"을 예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미국이 왜 그토록 적대국의 핵과 미사일 보유를 저지하려고 하는지 그 이유의 단면을 발견하게 된다. 미국이 군사적 개입의 필요를 느낄 때, 그 대상이 되는 국가의 핵과 미사일 보유 여부는 가장 중차대한 전략적 고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는 거꾸로 오바마 행정부조차도 핵 선제공격 대상으로 남겨둔 북한과 이란이 핵과 미사일 능력을 보유하려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하듯, <뉴욕타임즈>는 "핵무기 포기 압력을 받고 있는 다른 나라들은 리비아의 경험이 주는 메시지가 미국 정부가 의도하는 것처럼 되지 않을 것"이라며, "리비아의 예를 따르라고 서방으로부터 자주 거론되었던 이란과 북한은 카다피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여기서 "치명적인 실수"란 카다피가 WMD를 포기한 것을 의미한다.
우려했던 일은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고나 대규모의 민중 봉기 발생 등을 '북한 급변사태' 범주에 포함시키고 이러한 상황 발생을 '흡수 통일'의 호기로 바라본 이명박 정부 안팎의 대북강경파들은 '리비아의 나비효과'가 북한에까지 번지길 기대했다. 군부와 한나라당 일부 의원들까지 나서 전단 살포 등 대북 심리전에 열을 올렸다. 그러자 북한은 남한의 대북 심리전을 강력 비난하면서 "핵 억제력"의 정당성을 강변하고 나섰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2011년 3월 22일 "'리비아 핵포기 방식'이란 바로 '안전담보'와 '관계개선'이라는 사탕발림으로 상대를 얼려넘겨 무장해제를 성사시킨 다음 군사적으로 덮치는 침략방식이라는 것이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지구상에 강권과 전횡이 존재하는 한 자기 힘이 있어야 평화를 수호할 수 있다는 진리가 다시금 확증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리비아의 나비 효과는 북한으로 하여금 핵에 더더욱 집착하게 만들고 말았다.
이란 핵과 중동 아마겟돈
2010년 들어 이란 핵 협상이 파국을 맞이하면서 세계의 이목은 이스라엘이 이란 핵 시설에 대한 선제공격에 나설 것인가의 여부에 모아지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12년 3월 초에도 전쟁의 북소리는 여기저기에서 들리고 있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를 비롯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미국에 통보하지 않고 단독으로라도 이란을 폭격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이에 맞서 이란 정부는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을 감행할 경우 "이스라엘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고 맞받아지고 있다. 급기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미국-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AIPAC)' 행사에서 이란의 핵 개발을 강력히 비난하면서 "미국과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면 무력 사용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3월 2일 치르진 이란의 총선 결과도 이란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더욱 어렵게 할 것이라는 전망을 낳고 있다. 이 선거에서 종교 지도자이자 보수 강경파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를 지지하는 정당과 후보들이 대거 승리를 거둔 반면에, 마흐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지지 세력은 참패했다. 2010년 대선에서 하메네이의 지지를 받아 재선에 성공했던 아마디네자드는 이후 서방과의 대화 및 경제 개혁을 둘러싸고 하메네이와의 관계가 틀어졌다. 대외 강경파로 알려진 아마디네자드는 이란 내에서는 온건파에 속했고, 이에 따라 그의 몰락은 곧 강경파의 득세를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 <AP> 통신은 "반아마디네자드 세력이 새 의회를 장악해 이란 핵정책은 더욱 대담하게 나갈 수 있게 됐다"고 분석했다. 강력한 경제 제재와 국제적 고립으로 아마디네자드를 견제했던 서방 세계로서는 '혹 떼려다 혹 하나 더 붙은 격'이 된 셈이다.
그렇다면 이란 핵문제의 실제 양상은 무엇이고 이스라엘과 미국은 왜 선제공격까지 불사하겠다고 나서는 것일까? 이란이 핵클럽의 문턱에 가까이 도달할수록, 이스라엘이 '예방적 선제공격'에 나설 가능성도 높아진다. 시아파가 지배하고 있는 이란의 핵무장에 불안을 느낀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등 중동의 수니파 국가들 역시 핵카드를 만지작거릴 것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테러 집단으로 낙인찍은 헤즈볼라나 하마스 같은 세력과 이란이 유착 관계에 있다는 것 역시 이란 핵무장의 파급력을 우려하게 만든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에서는 '핵 테러 9·11'이 맹위를 떨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중장기적으로 미국과 이스라엘에 최악의 시나리오는, 핵무장한 이란이 시아파가 권력을 장악한 이라크와 동맹을 결성하는 것이다.
이란 핵문제에는 이란을 둘러싼 지정학적 모순이 반영되어 있다. 이란에서는 1959년 미국의 비밀 작전에 의한 친미 정권의 등장, 이라크와의 전쟁 및 미국의 이라크 지원, 카타르.바레인.오만.쿠웨이트.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지역에의 미군 주둔, 부시의 '악의 축' 발언, 미국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침공, 미국과 파키스탄의 유착 관계, 9.11 테러 이후에 이루어진 미군의 중앙아시아 주둔 등으로 이란이 미국에 포위되어 있다는 인식이 강하다. 특히 이스라엘의 핵무장은 묵인·방조하면서 자신의 핵 프로그램은 '악'으로 간주하는 미국의 이중 잣대에 불만이 크다. 또한 이라크와 전쟁(1980-1988) 중에 이라크가 이란을 상대로 화학 무기를 사용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이란에서는 핵무기를 갖고 있었다면, "이라크가 화학 무기를 사용하지 못했거나 효과적으로 보복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정서가 팽배했다. 이란이 핵 프로그램에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이라크와의 전쟁 경험, 이스라엘의 핵무장, 미국의 이란 포위 전략 등이 복잡하게 맞물려 있는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란은 자신의 핵 프로그램이 '평화적 목적'이라고 주장하고, 서방 국가들은 '핵무기 개발용'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시각 차이에는 몇 가지 근본적인 문제가 얽혀 있다. 우선 이란이 자체적으로 보유하려고 하는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은 저농축을 하면 핵연료나 의료용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반면에, 고농축을 하면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핵분열 물질을 추출할 수 있다. 둘째, 국제법에서 보장하는 권리와 연관된 문제로, 일단 이란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보유는 NPT 회원국으로서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다. 그러나 서방 세계에서는 이란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확보하면, 핵무장으로 귀결될 것이라며 이란의 농축 프로그램 보유 자체를 꺼려한다. 셋째, 대안을 둘러싼 논란으로, 서방 국가들은 원자로 가동과 의료용 연구 원자로에 필요한 핵연료를 외부에서 제공할테니 우라늄 농축을 포기하라고 요구한다. 반면 이란은 핵연료를 외부에 의존할 경우 그 연료를 제공하는 국가에 정치적.경제적으로 종속될 수 있으므로 자체적으로 보유할 것이라고 맞받아친다. 넷째, 미국의 이중잣대 문제이다. 미국은 NPT 비회원국인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의 핵무장은 방조한 반면에, NPT 회원국인 이란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보유는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이란의 의도가 핵무장에 있는지의 여부도 핵심 포인트이다. 이스라엘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과 다수 유럽 국가들은 이란의 의도가 핵무장에 있다고 믿고 있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란의 핵협상 대표와 국가안전보장 회의 수장을 역임한 하산 로와니(Hassan Rowhani)는 "핵무기 제조와 관련해 우리는 결코 그 길로 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 핵연료 주기도 완성하지 못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발언의 핵심은 이란이 원하는 것은 핵무장이 아니라 핵연료 주기를 완성해 핵의 평화적 이용과 더불어 핵무기 개발 잠재력을 보유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란 문제 전문가인 주안 코일(Juan Coyle) 역시 "이란의 목표는 핵 잠재력(nuclear latency)" 확보에 있다며, "이는 핵무장에 따른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실제 핵보유보다 이점이 많다"고 주장했다. 이를 뒷받침하듯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이란이 핵무기 개발로 이어질 수 있는 우라늄 농축을 진행해 왔다고 지적하면서도, 핵탄두 개발을 위한 일련의 프로그램 재개를 결정한 것은 아니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생각은 다르다. 이란이 우라늄 농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만큼, 무기급 고농축우라늄(HEU)을 생산한다면 "핵무기 보유로 이어지는 남은 과정은 이란 과학자들에게는 매우 쉬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를 '면역 구역(zone of immunity)이라고 부른다.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저지하지 못할 정도로 이란은 곧 핵 능력을 갖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쉽게 말해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이란이 그 문턱을 넘어서기 전에 선제공격을 통해서라도 이란의 핵 개발을 저지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지도상에서 없애야 한다", "홀로코스트는 유대인이 이슬람 세계 한가운데에 유대 국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사용된 신화다"와 같은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강경 발언을 자주 거론하면서, "이란이 핵무기를 가지고 제2의 홀로코스트를 자행하기 전에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단독으로, 혹은 미국과 함께 이란을 공격할 경우,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질 것이다. 이란의 반격 카드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이란이 원유 생산을 중단하고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면 국제 유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아 이미 침체기에 빠진 세계 경제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 이란이 이라크의 시아파 민병대를 지원해 반미 투쟁을 격화시킬 가능성도 거론된다. 레바논의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와 연합 전선을 구축해 이스라엘에 공동으로 맞설 가능성도 있다. 이란이 '샤하브-3', '세질-2' 같은 탄도 미사일을 동원해 이스라엘을 보복 공격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은 이란의 핵무기 보유 열망에 '찬물'이 아니라 '기름'을 붓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이란의 핵시설은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고 이 가운데 일부는 지하에 있어 제한적 공습을 통해 이를 완전히 파괴하기란 불가능하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공격은 이란 핵무장의 필요성을 확인시켜주었다는 인식이 강해질 것이고, 이란은 최고의 국가 이익이 침해되면 NPT에서 탈퇴할 수 있다는 제10조에 근거해, 이 조약에서 탈퇴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은 중동에서 또 하나의 '지옥의 문'을 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미국이 사전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일단 이란을 공격하면 미국도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지원할 수밖에 없다고 믿을 공산이 크다. 그래서 미국의 고민은 이란이 금지선(red line)을 넘는 것 못지않게 이스라엘이 그 선을 넘는 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에 있다.
이란 핵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한반도에도 '강 건너 불'이 아니다. 이미 2010년에 미국으로부터 독자적인 이란 제재 요청을 받은 한국은 금융 제재에 동참한 바 있다. 2012년 들어서는 자국의 국방수권법을 근거로 한국에게 이란 원유 수입을 삭감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문제는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 있다.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거나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에 의한 전쟁 발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석유와 무역 의존도가 대단히 높고 국제 경제 움직임에 대단히 민감한 한국 경제에 미칠 타격은 그야말로 '대재앙'이 될 것이다. 대한석유협회에 따르면, 한국은 중동으로부터 약 80%의 원유를 수입한다. 그리고 60% 정도는 호르무즈 해협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온다. 경제뿐만이 아니다. 중동에서 또 다시 전쟁이 발발하면, 한반도 정세 및 한국의 외교안보에도 심대한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그랬듯이, 이스라엘, 혹은 미국의 이란에 대한 선제공격은 북한으로 하여금 "핵 억제력"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만들 공산이 크다. 미국의 관심도 중동에 쏠려 6자회담이나 북미대화의 재개 가능성도 그만큼 위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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