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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은 핵무기를 사랑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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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정일은 핵무기를 사랑한 남자? [정욱식의 '핵과 인간'] '북한의 패턴' 있다는 건 신화다
기아와 핵.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살아 있을 때, "주민들은 굶어죽는데 핵무기 개발에만 몰두한다"는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김정일과 대화와 협력을 통해 문제를 풀려고 했던 김대중과 노무현은 "우리가 퍼준 돈이 핵무기 개발로 돌아왔다"는 보수.수구 세력의 정치적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이 급서했을 때 세계의 많은 언론들은 그의 죽음을 기아와 핵으로 연상시켰다. 북한의 매체들은 "조국을 그 어떤 원수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강력한 핵보유국으로 전변시키신 것은 만대에 불멸할 업적"을 세웠다고 찬양했다. 핵에 내재된 양면성처럼, 그에게 핵은 비난의 대상이자 찬양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기실 김정일에게 핵은 악의 분신처럼 따라다니고 있지만, '핵과 인간'에 있어서 김정일은 이단적인 존재만은 아니었다. 북한과 함께 미국의 핵 위협에 시달렸던 중국의 마오쩌둥은 핵무장을 통해 미국의 핵 위협을 억제하려고 했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 패배와 주한미군 감축에 직면했던 박정희도 핵무장을 추진했었다. 아랍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는 이스라엘도, 중국과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인도도, 그 인도와 적대 관계에 있는 파키스탄도 핵무장을 통해 생존을 도모하려고 했다. 2011년 초에 열린 한 토론회에서 합리적 보수주의자 남재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마어마한 정확도를 가진 미군이 김정일·김정은 부자를 언제 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북이 핵 개발을 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김정일에게 핵은 무엇이었을까? 애초부터 갖고 싶었고, 그래서 절대로 포기할 생각도 없었던 분신과도 같은 존재이었을까? 아니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얼떨결에 손에 쥐게 된 이었을까? 아마도 이 중간 어딘가에 진실이 있었을 것이다. 이 문제를 포함한 김정일에 대한 평가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념적 잣대를 내려놓고 상식과 이성의 눈으로 그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에 다가설수록 그의 아들인 김정은의 행보도 보다 많이 볼 수 있고, 그래서 핵을 포함한 한반도 문제의 뿌리를 캐낼 수 있는 실마리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데자뷰: 아이젠하워와 김정일

여기서 잠깐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핵 위협과 오늘날 북한의 핵 게임을 비교해보자. 북한의 핵 개발 이후 제기되어온 북한의 '핵 게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정확히 미국이 한국전쟁 당시 했던 일과 대단히 흡사하기 때문이다. 한미 양국에서는 북한이 한반도 유사시 미군 증원을 저지하기 위해 주일미군이나 미국 본토에 핵 공격 위협을 가할 것이라는 지적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미국은 한국전쟁 당시 중국과 소련의 개입을 억제하기 위해 핵 위협을 지속적으로 가했다. 북한이 기습 남침 후 휴전 협상을 제안하고 이 협상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협상을 이끌기 위해 핵 공격 위협을 가할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그런데 이 역시 정전협상 당시 미국이 했던 '핵 강압 외교'의 핵심이었다. 또한 북한이 2010년 11월 남한의 연평도 포격을 감행한 데에는 핵의 위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는 주장들이 있는데, 미국이 한국전쟁 당시 38선을 넘어 북진을 감행한 것이야말로 핵의 위력을 믿었던 미국의 전략적 실책이었다.

'게임의 법칙'이 바뀌고 있다는 것은 북한으로부터도 나온다. 북한 스스로 강압 외교의 수단으로 핵 위협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일례로 김영춘 인민무력부장은 2011년 1월 하순 로버트 게이츠(Robert Gates) 미국 국방장관에게 서해상 북방한계선(NLL)을 둘러싼 긴장완화, 한반도 비핵화, 북한 내 미군 유해 발굴 등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한 북미 고위급 군사회담을 제의하면서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방치하면 "핵참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위협했다. 이에 앞서 2011년 신년 공동사설에서도 남북관계의 대결 상태 및 한반도 전쟁 위기 종식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이 땅에서 전쟁의 불집이 터지면 핵참화밖에 가져올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김정일 정권이 "핵참화"를 위협하면서 달성하고자 하는 외교적 목표는 "조미 적대관계의 평화관계로의 전환"이며, 이는 구체적으로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였다.

그런데 싸우면서 닮아가는 것일까? 이러한 북한의 핵 위협을 통한 강압 외교는 1953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했던 방식과 거의 일치한다. 한국전쟁 종식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북한과 중국을 상대로 핵 공격 계획을 수립했다. 특히 교착상태에 빠졌던 휴전 협상을 미국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여러 경로를 통해 북한 및 중국에게 핵 공격 위협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로부터 60년 가까이 지난 후, 김정일 정권도 아이젠하워와 비슷한 방식을 택했다. 우선 핵 강압 외교의 목표로 아이젠하워는 정전협정 체결을, 김정일은 평화협정 체결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유사점이 있었다. 또한 김정일이 김영춘 인민무력부장을 통해 게이츠 국방장관에게 서한을 전달한 것도 아이젠하워가 클라크 사령관을 통해 김일성 및 팽더후이에게 최후통첩을 보낸 방식과 흡사하다. 한국전쟁 때부터 북한이 미국의 호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미국의 핵 위협을 끊임없이 강조해왔던 방식을 북한 스스로 취한 것이다.

싸우면서 닮아가는 현상은 한국에서도 나타난다. 북한의 핵실험 이후 국내외 일각에서는 한국의 독자적인 핵무장이나 미국 전술 핵무기 재배치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의 근저에는 북한이 핵을 보유한 만큼, 남한도 어떠한 형태로든 핵 능력을 갖춰 '공포의 균형'을 달성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특히 독자적인 핵무장론은 "한국도 자위수단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어디에서 많이 들어봤던 것이다. 북한이 미국의 핵 위협을 거론하면서 자신의 핵무장을 '자위용'이라고 주장한 것과 판박이인 것이다. 또한 '공포의 균형론'이 담고 있는 목표는 북핵에 대한 강력한 억제 수단을 갖으면서 북한을 압박해 핵 포기를 유도한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과 유대관계에 있으면서 동북아 핵 도미노를 우려하는 중국을 압박하는 효과가 클 것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그런데 이 역시 북한 논리의 판박이이다. "조선반도 비핵화"가 고(故)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던 김정일은 핵무장을 통해 "조선반도의 핵전쟁을 억제하고" 미국의 적대시정책을 철회시켜 "조선반도 비핵화"를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미국 전술핵 재배치가 북한과 중국에게 압박을 줄 수 있다는 주장 역시 "핵참화"를 운운하면서 한국과 미국을 압박하려는 북한의 '강압 외교'와 흡사하다.


▲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뉴시스

북한의 패턴 대 미국의 패턴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5월 26일 오바마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2006년 10월, 1차 북한 핵실험 때 북한이 오히려 국제 사회와의 대화가 재개되는 등 보상을 받았던 경험을 우리가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에도 이런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지 않도록 국제 사회가 긴밀히 공조해서 대응해야 합니다." 그러자 오바마는 6월 16일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호응했다. "과거의 북한에 행동 패턴이 있었습니다. 호전적으로 행동을 하고 오래 기다리면 도발 행위에 대한 보상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보내는 메시지는 그런 패턴을 깨자는 것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두 정상의 발언이 잘 보여주는 것처럼, 이명박-오바마의 대북 정책의 이면에는 '북한의 도발을 달래기 위해 대화를 하고 보상을 하는 지난 20년간의 패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이는 1기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악행에 보상하지 않겠다'는 접근법과 너무나도 닮은 것이다. 부시를 강력히 비판하면서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등장한 오바마에게 '부시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은 지독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엇박자'가 불가피해 보였던 이명박-오바마 조합은 북한의 연이은 강경책에 확고한 공조 체계를 구축했고, '북한의 패턴'을 종식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그렇다면 김정일은 한국과 미국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자기 마음대로 요리한 '외교의 달인'이었을까? '도발→대화→보상'으로 이어진다는 '북한의 패턴'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아마도 김정일이 북한의 핵정책에 깊숙이 관여한 시점은 아버지 김일성과 '공동 통치'를 했던 1990년대 초반부터일 것이다. 그리고 '북한의 패턴에 놀아났다'는 한미 양국의 피해의식은 이 시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93년 북한이 NPT에서 탈퇴해 핵개발에 나서자, 미국은 대화를 재개하기 시작했고, 결국 북한의 핵동결 및 궁극적인 폐기 약속의 보상으로 경수로와 중유 제공, 정치적·경제적 관계 정상화, 핵무기 불사용 등을 약속했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강경파가 "북한의 도발에 미국이 굴복했다"고 말하는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의 내용이다.

1998년 8월에는 북한 금창리 핵의혹 시설과 북한의 소형 인공위성 '광명성 1호'(한.미.일 3국은 이를 탄도 미사일인 '대포동 1호'로 부른다) 발사가 연이어 터졌다. 북미간에는 거친 신경전이 전개되었지만, 결국 미국은 북한의 핵의혹 시설을 방문하는 대가로 50만 톤의 식량을 지원했고, 북한이 추가 미사일 발사를 유예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경제 제재를 부분 해제했다. 이러니 북한의 도발에 대한 보상처럼 보일 수 있다. 부시 행정부 막바지에도 이와 비슷한 패턴이 나타났다. 줄곧 북한과의 직접 대화를 거부했던 부시 행정부는 2006년 7월 북한이 탄도 미사일을 시험 발사하고 그 3개월 뒤에 핵실험을 벌인 이후에야 비로소 직접 대화에 나섰다. 북한의 영변 핵시설 봉인과 폐쇄에 대한 보상으로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 해결, 20만 톤의 중유 제공을 약속했다. 미국의 BDA 문제 해결이 지연되자 북한도 핵시설 봉인과 폐쇄를 미루면서 각을 세웠다. 2008년 8월에는 북한이 진행 중이던 영변 핵시설 불능화를 중단했고 원상 복구를 경고했다. 그러자 미국은 테러 지원국 해제라는 '보상'을 하고서야 불능화 재개를 받아낼 수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물론이고 오바마 대통령도 이러한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의 전개 과정에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두 정상의 눈에 비친 패턴은 북한이 도발을 하면 미국이나 한국이 대화에 나서 보상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의 2009년 4월 장거리 로켓 발사도, 5월 2차 핵실험도 북한이 과거와 같은 보상을 노리고 도발할 규정하고 '도발에는 보상이 없다'며 한목소리를 낸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미 양국은 북한의 '광명성 2호'(한-미-일 3국은 이를 탄도 미사일인 '대포동 2호'로 본다)에는 유엔 안보리 의장 성명으로, 2차 핵실험에는 고강도의 대북 제재가 담긴 안보리 결의안 1874호로 응수했다. 그리고 이후 북한의 적극적인 대화 제의에 한미 양국은 극히 소극적으로 일관했다. 북한의 패턴을 끊겠다는 다짐과 함께.

그러나 지난 20년간의 북핵 협상을 '도발과 보상이 반복되는 패턴'으로 이해하는 것은 객관적인 진실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1993년 3월 북한의 NPT 탈퇴는 특별 사찰을 둘러싼 북한과 미국 및 IAEA와의 갈등, 한미 양국의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 미국의 북미 고위급 회담 불응이라는 원인이 있었다. 북한이 NPT 탈퇴를 유보할 수 있었던 데에는 3개월 후 북미 고위급 회담이 열려 상호간의 우려를 대화로 풀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후 비교적 순탄하게 전개되던 북미 협상은 "핵을 가진 자와 악수할 수 없다"는 김영삼 정부의 초강경 대북 정책과 미국 내 강경파의 반격, 그리고 북한의 핵연료봉 인출 시도(이는 무기급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재처리의 전단계로 간주되었다)가 맞물리면서 최악의 위기로 치달았다. 미국의 북폭론과 북한의 전쟁불사론이 충돌하면서 전면전의 위기가 감돌았던 한반도 정세는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으로 극적인 반전에 성공했다. 북미 고위급 회담이 재개되었고, 김영삼 정부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해 10월 제네바 북미 기본 합의가 체결되었다.

2차 핵위기로 그 빛이 바래긴 했지만, 한.미.일 3국은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한의 핵개발을 8년간 '동결'시키는 성과를 얻었다. 만약 이 합의가 없었다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졌거나 북한의 핵보유 시점이 10년 정도 빨라졌을 것이다. "1993년 미국 정보기관의 비밀 평가에 따르면 북한은 2000년까지 60~100기의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양의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제네바 합의를 통해 이를 봉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한이 얻은 것은 중유 수백만 톤밖에 없다. 2003년까지 북한에게 지어주기로 한 경수로는 2003년부터 공사가 중단되었고, "남겨진 협상의 기념물은 콘크리트로 메워진 두 개의 거대한 구덩이 뿐이다." 미국이 약속한 소극적 안전 보장(핵무기 사용 및 사용 위협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미국이 1990년대 본토에서 북한을 상정한 모의 핵공격 훈련을 실시했다는 것이 비밀문서 해제로 확인되면서 공약(空約)으로 끝났다. 정치적·경제적 관계를 완전히 정상화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 역시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니 제네바 합의에 대한 배신감은 북한이 더 강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제네바 합의 이후 미국의 관심사에서 멀어진 북한은 1998년 8월 금창리 핵의혹 시설 논란과 '광명성 1호' 발사가 이어지면서 화려하게(?) 컴백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를 북한의 악행이나 도발로 볼 수 있을까? 금창리 논란은 미국 정보기관이 <뉴욕 타임스>에 첩보를 흘리면서 불거졌다. 이로써 미국에서는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위반했다는 주장이 비등해졌다. 그러나 미국이 지하 핵시설로 지목한 금창리는 '텅 빈 동굴'이었다. 이것은 북한의 해명을 믿지 않았던 미국이 50만 톤의 식량 지원을 약속하고 두 차례에 걸쳐 금창리를 방문하고 나서야 확인한 결과였다. 이에 따라 금창리 논란은 '북한의 악행을 보상한 것'이 아니라 '미국이 정보 조작의 대가를 스스로 지불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광명성 1호' 혹은 '대포동 1호'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기실 탄도 미사일인 '대포동 1호'는 미국이 붙여준 이름이고, 북한이 당시에 발사한 것은 미국 정보기관도 나중에 인정한 것처럼 인공위성인 '광명성 1호'였다. 당시에는 북한이 로켓 발사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적도 없었고, 이를 금지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도 없었다. 쉽게 말해 당시 '광명성 1호' 발사는 어떠한 합의나 국제규범을 위반한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이 로켓 발사를 계기로 미국은 대북정책을 재검토하기 시작했고, 김대중 정부의 적극적인 대미 개입에 힘입어 '페리 보고서'가 나올 수 있었다. 1999년 9월에는 북미 베를린 합의가 나와 북한이 추가적인 탄도 미사일 발사 유예를 약속했고, 미국은 경제 제재 완화를 약속했다. 9개월 후 이행된 미국의 경제 제재 완화는 상징적 수준에 머물렀다. 이는 테러 지원국 해제가 이뤄지지 않은 탓이 컸다.

북한의 탄도 미사일 시험 발사 유예 약속은 2006년 7월 초까지 지켜졌다. 2003년에는 부시 행정부의 대화 거부와 적대시 정책을 문제 삼으면서 유예 약속이 유효하지 않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북한이 미사일 발사를 유예한 8년간의 '협력'의 대가로 얻은 것은 무엇일까? 앞서 언급한 상징적 수준의 경제 제재 완화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클린턴 행정부 막바지에 타협 일보 직전까지 갔던 미사일 협상은 MD 구축을 사활적 이해로 간주한 부시 행정부의 2001년 등장과 함께 없던 일이 되었을 뿐이다. 이 사이에 북한이 대규모의 식량 지원을 받았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식량 지원은 정치와 무관하다"는 미국 외교원칙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오히려 북한이 1994년 제네바 합의와 1999년 베를린 합의를 이행하고 있던 시기에 미국은 '악행'으로 응수했다. 부시 행정부는 집권 직후부터 2000년 양국 관계의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개선 방안을 담은 북미 공동 코뮤니케를 무시했다. 타협 일보 직전까지 갔던 미사일 협상을 중단하고는 '북한위협론'을 근거로 MD 구축을 선언해버렸다. 급기야 2001년 핵태세 검토 보고서에서는 북한을 핵 선제공격 대상으로 명시했고, 2002년 1월에는 9.11 테러와 아무런 관계가 없던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부시 행정부가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이행하고 있다며 중유를 제공하고 있었다. 따라서 북한의 '악행에 대한 보상'은 고사하고 '선행에 대한 배신'이었던 셈이다. 북한이 2006년 7월과 10월 탄도 미사일 시험과 핵실험 역시 BDA 문제와 함께 부시 행정부가 직접 대화를 거부한 데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했다. 이를 반영하듯 2007년 초부터 북미 직접 대화가 시작되면서 비핵화 과정이 빠르게 진행됐다.

2007년 2.13 합의에 따라 북한이 약속한 영변 핵시설 봉인과 폐쇄의 '일시' 불이행 역시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미국은 30일 이내에 BDA 문제 해결을 약속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 시한을 지키지 못했고, 이에 따라 북한은 영변 핵시설을 봉인·폐쇄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BDA 문제가 해결되자 북한은 즉각 자신의 약속을 이행했다. 2008년 하반기에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8월 중순 북한은 10.3 합의에 따라 진행했던 영변 핵시설 불능화를 중단하고 원상 복구를 경고하고 나섰다. 당시 국내외의 많은 전문가들은 이러한 북한의 강경 조치를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 문제와 연계시켰다. 그러나 북한의 불능화 중단은 김정일의 건강 문제 때문이 아니라 미국이 8월 11일까지 하기로 한 테러 지원국 해제를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거진 일이었다. 10월 중순에 미국이 이 약속을 지키자 북한도 불능화 작업을 즉각 재개했다.

한반도 정세가 뒷걸음 친 2009년 상반기의 상황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2009년 4월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와 5월 2차 핵실험은 이명박-오바마가 '북한의 패턴을 종식시키겠다'고 다짐한 결정적 사건들이었다. 그런데 실망과 좌절은 한국과 미국만의 몫은 아니었다. 당시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고 오바마 행정부에 대한 북한의 실망감도 대단히 컸다. 미국이 대북 특사 파견을 타진한 2009년 2월말∼3월초는 북한이 강력히 반발했던 한미합동군사훈련 '키 리졸브'를 앞둔 시점이었다. 이 훈련의 실시 여부를 새롭게 출범한 미국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판단 기준으로 삼은 북한은 유엔군(미군)과의 장성급 회담을 통해 이 훈련의 취소를 요구했지만, 미국은 이를 일축했다. 더구나 이때를 전후해 한국의 국방장관과 주한미군 사령관 등 한미연합군 수뇌부는 수시로 김정일의 건강 문제를 거론하면서 북한 급변사태 발생시 한미연합군의 투입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의 위성 발사에 대한 미국의 강경 대응은 대미 불신을 악화시킨 결정적 요인이었다. 미국의 정보기관도 인정한 것처럼, 북한이 쏘아올린 것은 소형 위성을 지구 궤도 위에 올려놓기 위한 '우주발사체'였다. 또한 발사 시점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재추대하기로 한 12기 최고인민회의 및 4월 15일 고(故) 김일성 주석의 생일(태양절)을 앞둔 시점이었다. 이는 북한의 위성 발사가 내부적 목적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미국은 '미국의 관심 끌기'라든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용'이라든지, '우는 아이가 엄마의 젖을 달라는 것'라는 식의 일방적 해석에 매몰돼, 이 사안을 유엔 안보리에 가져가고 말았다. 어떤 나라가 위성을 발사했다는 이유로 유엔 안보리에 회부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으며, 그만큼 북한의 반발도 거셌던 것이다.

이 사례는 '도발→대화→보상'으로 이어진다는 북한의 패턴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것임을 잘 보여준다. 만약 북한의 위성 발사가 오바마 행정부와의 대화를 노린 것이었다면, 북한은 위성을 발사하지 않고도 이를 달성할 수 있었다. 이미 미국은 2월말에 대북 특사 파견을 제안해놓고 있었다. 그런데 북한은 특사 제의를 수용하지 않고 로켓을 쏘아 올렸다. 또한 부시 행정부 말기에 재개된 미국의 식량 지원을 오바마 행정부 들어 중단을 요구한 쪽도 북한이었다. 로켓 발사의 목적이 미국의 관심 끌기나 식량을 받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김정일이 권좌에 있었던 1993-2011년의 핵문제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이명박-오바마가 공유하고 있는 대북 인식은 역사적 진실이라기보다는 '선입견'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기간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이러한 인식과 다른 세 가지 중요한 패턴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흔히 일컫는 북한의 '도발', '악행', '벼랑 끝 전술'은 아무 이유 없이 나온 것이 아니라, 약속 불이행이나 대화 거부 등 미국의 정책에 대한 북한의 반응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는 점이다. 둘째, 미국은 북한이 핵개발에 나서거나 미사일을 쏘지 않으면 북한에 관심이 없다가, 북한이 '도발적인 행동'을 했을 때 비로소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셋째, 미국은 북한이 협력하고 약속을 이행하면 엄청난 보상이 있을 것처럼 말했다가, 실제로는 북한의 '협력' 대가를 지불하는 데 대단히 인색했다는 점이다. 외교 안보란 상대가 있는 게임인 만큼, 북한의 패턴을 종식시키려면 미국의 패턴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지난 역사가 전해주는 교훈인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 분석이 북한을 두둔하거나 북핵을 옹호하자는 취지가 아님은 물론이다. 여담이지만, 필자는 2005년 평양에 갔을 때 북측 인사와 논쟁을 벌이다가, "소련이 핵이 부족해서 망했습니까"고 말했다가 "미제 스파이 같은 소리를 하는구만"이라는 핀잔을 들었다. 여러 차례에 걸쳐 공개편지라는 형식을 통해 김정일 위원장에게 "조선반도 비핵화를 달성하지 못하면 아버지의 유훈을 지키지 못한 불효자가 된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변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김정일에게서 김정은으로 넘겨진 북핵,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패턴'이라는 신화에서 먼저 깨어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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