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급서로 20대 후반의 나이에 한 나라의 지도자로 등장한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게 핵무기는 무엇일까? 아버지가 물려준 전략적 자산일까, 부채일까? 억측의 영역에 속할 수밖에 없는 질문들을 떠올린 이유는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의 미래를 '김정은 체제가 핵문제에 대해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라는 질문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아들 김정은 역시 혼란스러울 것이다. "대국들의 틈에 끼여 파란많던 이 땅을 영영 누구도 넘겨다보지"(노동신문 2011년 12월 28일자) 못하게 하는 강력한 억제력으로 간주한다면, 핵무기를 '자산'이라고 여겨질 것이다. 동시에 핵무기를 갖고 있는 상태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유훈이자 자신의 당면 과제인 "인민들이 이밥에 고깃국 먹는" 세상을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북핵의 또 다른 얼굴인 '부채'이다. 20대 후반의 나이에 짊어지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운 딜레마인 셈이다.
북한의 지도부는 일단 '자산'에 방점을 찍었다. 북한은 2011년 12월 19일 김 위원장 사망을 공식 발표하면서 "그 어떤 원수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핵보유국, 무적의 군사강국으로 전변시켰다"고 주장했고, 사흘 후 <노동신문> 사설에서도 "조국을 그 어떤 원수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강력한 핵보유국으로 전변시키신 것은 만대에 불멸할 업적"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위대한 김정은 동지의 선군영도를 높이 받들고 나라의 자위적 국방력을 백방으로 강화해 사회주의 제도와 혁명의 전취물을 굳건히 지켜나가야 한다"며, 선군정치의 계승 입장을 분명히 했다. 강조했다. 급기야 2011년 12월 28일자 <노동신문>은 김 위원장의 혁명유산은 "핵과 위성, 새 세기 산업혁명, 민족의 정신력"이라며 "핵보유국과 위성 발사는 대국들의 틈에 끼여 파란 많던 이 땅을 영영 누구도 넘겨다보지 못했다"고 천명했다.
이러한 북한의 화법은 중국의 마오쩌둥 사후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 천명한 양탄일성(兩彈一星), 즉 원자탄과 수소탄 그리고 위성 보유를 찬양하고 이를 바탕으로 중국이 강대국으로의 부상과 급격한 경제성장이 가능했다고 주장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북한이 꿈꾸는 '중국식 모델'은 바로 이런 것일 지도 모른다. 중국이 걸어온 길은 북한이 걸어가고 깊은 길일 수 있고, 1950-60년대 중소관계는 오늘날 북중관계의 한 단면을 비춰주는 거울일 수 있다.
중국식 모델을 둘러싼 '동상이몽'
한국전쟁 당시 '조국해방전쟁'과 '향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을 앞세워 혈맹이 되었던 북한과 중국의 엇갈림만큼이나 극적인 현상도 드물다. 오늘날 북한은 외부의 원조없이 먹고사는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한 반면에, 중국은 G-2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북한이 선택해야 할 바람직한 미래와 관련해 '전가의 보도'처럼 나오는 말이 바로 '중국식 모델'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2010년 11월 14일 일본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에는 중국을 모델로 해야만 한다고 항상 말하고 있으며, 중국 정부에도 북한을 중국처럼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다"고 있다고 밝혔다. 이보다 3일 앞서 가진 중국 후진타오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도 이명박은 "북한이 중국을 보면서 '훌륭한 모델이 바로 옆에 있는 이웃'이라 생각하고 따라올 수 있도록 중국이 더 노력해달라"고 요구한 바 있다. 또한 10월말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도 "평화의 정착과 공동 번영이 궁극적으로 통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북한에 대해서 중국식 개혁개방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한국의 대통령이 북한의 발전 방향에 대해 공개적으로 중국식 개혁개방을 촉구하고 나선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물론 국내외의 대다수 언론과 전문가들은 북한의 살길이 중국식 개혁개방에 있다는 주장을 펼쳐오기는 했다. 특히 북한의 추락과 중국의 부상이 극적으로 대비되고 있고, 북한이 3대 세습을 공식화 하면서 이러한 주문은 더욱 강해지고 있다. 그러나 '3대 세습'에 나선 북한이 중국식의 개혁개방을 선택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도 팽배하다. 중국 개혁개방정책의 기수였던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오류를 비판하면서 개혁개방을 추진할 수 있었던 반면에, "김일성과 김정일을 계승하는 데에서 정권의 정통성을 찾을 수밖에 없는" 김정은이 "김일성과 김정일의 노선을 비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에 따라 "김정일-김정은 정권의 개혁·개방이 중국, 베트남과 같은 수준의 과감한 개혁·개방까지 이를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대단히 회의적"이라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북한이 살길은 중국식 개혁개방인데, 핵개발과 3대 세습과 같은 퇴행적인 선택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북한에게 이를 기대하기는 대단히 어렵다는 것이다.
북한의 김정일 정권이 개혁개방을 한사코 거부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가능하지만, '과연 중국식 모델이 북한에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거꾸로 던져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반문 속에는 '어쩌면 중국식 모델을 간절히 원하는 쪽은 북한이지만,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해석도 가능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오늘날 북한은 바라보면서 불문율처럼 굳어지고 있는 인식이 있다. 핵개발과 개혁개방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비핵개방3000'이라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명칭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정작 이명박 정부가 북한에게 따라 배우라고 요구한 대상인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의 이면에는 핵무장이 자리잡고 있다. 적어도 중국 지도자들인 이렇게 간주해왔다.
한국전쟁 이전까지 원자폭탄을 '종이호랑이'에 비유했던 중국은 한국전쟁과 대만해협 위기를 거치면서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1964년 10월에는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고, 32개월 후에는 수소폭탄 실험에도 성공했다. 또한 핵무기 운반수단인 탄도미사일도 1960년대 후반에 개발·생산해 실전배치에 들어갔다. 이와 관련해 개혁개방의 기수였던 덩샤오핑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60년대 이래 중국에 원자탄, 수소탄, 인공위성 발사가 없었다면 중국은 중요한 영향력을 갖춘 대국이라 할 수 없었을 것이며 현재와 같은 국제적 지위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민족의 능력을 반영한 것이며 민족과 나라의 번영과 발전의 표지가 됩니다." 그의 후계자인 장쩌민도 "양탄일성(兩彈一星)은 신중국의 발전과 중화민족의 영광과 자부심을 상징하는 위대함"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나라 이름만 북한으로 바꾼다면, 북한이 핵실험이나 인공위성을 발사하고 나서 내놓은 성명과 거의 다를 바 없는 내용이다.
중국은 핵무장 이후 개혁개방정책과 관련해 두 가지 중요한 성과를 거뒀다. 하나는 군사비 증액을 억제해 경제개발에 우선적으로 투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은 개혁개방정책을 본격화한 1980년대 들어 10년간 연간 군사비를 50억 달러 수준으로 유지했는데, 이는 당시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또 하나는 핵무장에도 불구하고 숙적이었던 미국 및 일본과의 관계정상화를 이뤄냈다는 것이다. 미국 및 일본과의 관계정상화는 중국의 안보 불안을 크게 덜면서 개혁개방에 집중할 수 있었던 대외적 환경을 창출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정상화 이듬해인 1980년 중국에 최혜국(MFN: most-favored nation) 지위를 부여해 중국에게 무역과 투자의 문을 열어주었다. 일본은 공적개발원조(ODA)를 통해 중국의 경제개발을 적극 도왔다. 일본 외무성 자료에 따르면, 1979년부터 25년간 일본이 중국에 차관, 무상원조, 기술협력 등의 형태로 제공한 공적개발원조(ODA)는 약 3조4천억엔(약 46조원)에 달한다. 이는 중국 정부도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중국의 경제성장의 중요한 물적·기술적 토대가 되었다.
정리하자면, 중국은 핵무기 보유를 통해 재래식 군사력 부담을 크게 줄여 경제성장에 필요한 자원의 일부를 조달할 수 있었고, 핵무장에도 불구하고 미국 및 일본과의 관계정상화를 통해 경제발전에 우호적인 대외 환경과 제도적, 재정적, 기술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자, 세계 2위의 군사비 지출 국가가 되었다. 북한이 원하는 모델이 바로 이러한 '중국식'일 수 있다는 해석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다. 북한은 핵무장을 통해 재래식 군사력의 부담을 줄여보고 싶어한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고, 미국 및 일본과 관계정상화도 이루며,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길 희망한다. 그러나 이는 북한의 희망사항이다. 북한은 핵무기를 가진 상태에서 중국이 쟁취한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과 북한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반대로 이러한 차이를 간과하면서, 더욱 중요하게는 중국의 성공이 가능했던 대외적 환경 조성에는 눈 감으면서 북한 지도부에게 '중국식 모델'을 따를 것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허무하게 들리는 까닭이기도 하다.
김정은 시대의 북핵 해결, 더욱 어려워진 이유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북한은 고(故) 김정일 위원장의 대표적인 업적과 유산을 핵무기와 위성 보유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북핵 해결 가능성은 더욱 위축되거나 오랜 시간이 요구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김정은 체제가 '핵은 절대로 포기 안 하겠다'고 입장을 정했다고 볼 필요는 없다. 북한에게 핵은 군사적 '억제력'인 동시에 국제적 고립과 궁핍에서 벗어나는 것을 근본적으로 어렵게 하는 '족쇄'이며 자신이 얻고자 하는 바를 이뤄질 수 있는 외교적 '카드'로써의 특징을 함께 지닌다. 이러한 속성은 김정일 시대에도 마찬가지였고 김정은 시대에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이 2012년 신년 사설에서 핵문제에 대해 일절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것도 협상의 여지를 남겨두려는 것이라는 해석을 가능케 해준다. 이를 뒷받침하듯, 김정은 정권은 2012년 2월 하순 오바마 행정부와의 고위급 회담을 통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가동 중단, IAEA 감시단 복귀, 핵과 미사일 실험 유예와 미국의 대북 인도적 지원을 맞바꾸는 합의에 도달했다. 이러한 합의는 김정일 사망 직전에 북미간에 이미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김정은 시대에 접어들면서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가능성이 이전보다 낮아졌다고 본다. 우선 국가안보상의 필요가 더 커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김정일 시대에도 한미 양국의 대북 강경책에 맞서 "핵 억제력"의 필요성을 공공연히 말해왔다. 신생 정권인 김정은 체제는 안정적인 권력 이양을 위해서는 안보를 튼튼히 하는 것이 더욱 절실하다고 판단할 것이고 "핵 억제력"은 이를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고 여길 것이다. 더구나 김정일의 사망을 두고 북한 급변 사태론과 연계시켜 사고하는 한·미·일의 흐름은 북한의 새 정권으로 하여금 "핵 억제력"을 유지·강화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낳을 공산이 크다. 미국이 전반적인 군비 감축에도 불구하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군사력을 유지.강화하고,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연이어 실시하고 있으며, 남북한 사이의 재래식 군사력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는 점 역시 "핵 억제력" 유지의 필요성을 증대시켜 줄 것이다.
아울러 '백두 혈통'을 권력의 핵심적인 정통성으로 삼은, 그래서 앞으로도 장기간의 유일 지배 체제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은 북한은 안보 문제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공산이 크다. 이러한 장기 독재 체제는 민주적 선거를 통해 정권이 바뀌는 미국과 남한에 대한 북한의 지도부의 근본적인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 클린턴에서 부시로의 정권 교체는 2000년 북미공동코뮤니케를 휴지 조각으로 만들었고, 노무현에서 이명박으로의 정권 교체는 6.15와 10.4 선언을 "잃어버린 10년"에 묻어버렸다. 이러한 사례는 북한으로 하여금 핵 포기라는 전략적 결단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남한 및 미국의 현 정권과의 합의가 이후에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 있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 내부적인 문제들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김정은 정권이 권력을 공고화하기 위해서는 군부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지적된다. 그런데 비핵화를 선택하는 것은 군부의 이해관계에 반할 수 있다. 또한 북한에게 핵 포기는 가장 어렵고도 전략적인 선택인데, 김정은이 이러한 선택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리더십과 카리스마를 확보하는 것은 당분간 쉽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김정일이 "조선반도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고 일관되게 말했던 것과는 달리, 김정은 체제는 이러한 유훈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이 덜 할 수 있다. 북한의 지도부가 김정일 사망 직후 핵과 위성을 그의 핵심적인 업적으로 찬양한 것도 이러한 우려를 뒷받침한다.
북중관계의 맥락에서 북핵 문제를 접근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해졌다. 우선 김정은 정권은 중국으로의 과도한 종속을 견제할 카드가 필요하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에, 핵무기를 손에서 놓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최근 몇 년간 북한의 중국 의존도는 눈에 띄게 증가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 위원장의 급서는 김정은 정권으로 하여금 중국에 더욱 의존하게 만들 것이다. 이는 선택이 아니라 필연에 가깝다. 그러나 김정은 정권은 중국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중국의 과도한 영향력을 견제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핵무장이야말로 북한의 자주성과 정책 자율성을 유지하는데 유용하다고 볼 것이다.
이는 과거 중국-소련 관계에서도 잘 드러난 바 있다. 핵무기를 '종이호랑이'에 비유했던 마오쩌둥이 핵무장을 선택한 데는 한국전쟁과 대만 해협 위기를 거치면서 미국의 핵위협이 커진 탓도 있었지만,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소련의 안보 우산에 의존하는 한, 중국의 주권과 정책 자율성은 침해받을 수밖에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당시 중소관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북한이 마오쩌둥과 유사한 선택을 내렸을 가능성은 대단히 크다.
반세기 전 마오쩌둥이 핵 강대국인 미소간의 냉전을 이용해 중국의 입지를 다졌던 것처럼, 오늘날의 북한도 중국과 미국 사이의 라이벌 관계를 활용하고 있을 것이다. 마오쩌둥은 "미국의 핵 전쟁 위협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며, 대만 해협 위기를 조장했다. 당연히 중국의 동맹국이자 핵보유국인 소련은 미중 전쟁에 휘말릴 수 있다는 우려를 갖게 됐다. 그리고 소련은 중국의 핵 개발을 도와 중국 자체적으로 핵 억제력을 갖게 함으로써 이러한 우려를 해소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마찬가지로 북한도 미국의 핵 위협을 거론하면서 '전쟁불사론'을 외쳐왔다. 강력한 전쟁 의지 자체가 미국의 공격을 억제할 수 있다고 믿는 동시에, 그 의도 여부와 관계없이 북한의 전쟁불사론은 중국의 전략적 우려를 자극해왔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지면, 중국도 어떠한 형태로든 개입할 수밖에 없고, 이는 곧 또 다시 미국과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부담으로 이어진다.
'선제공격론'과 '정권교체론'으로 대표되는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책과 이명박-오바마 행정부의 북한급변사태 대비 '작전계획 5029'의 구체화는 중국의 전략적 우려를 더욱 자극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북한은 대담해졌다. 중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2006년과 2009년에 핵실험을 강행했다. 천안함 침몰과 한미 양국의 대규모 군사훈련 실시로 남북한 사이에는 물론이고 미중간에도 긴장이 고조되던 2010년 11월에는 연평도 포격까지 감행했다. 아마도 북한의 의도는 한반도 전쟁위기를 크게 고조시켜 미중간의 전략적 타협을 유도하는 한편, '한반도 전쟁에 휘말릴 수 있다'는 중국의 우려를 자극해 자신의 핵무장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하는데 있었을 것이다.
중국이 북한의 핵무장을 현실로 받아들일 가능성도 점쳐볼 수 있다. 중국은 두 차례에 걸친 북한의 핵실험에도 북한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아 왔다. 이는 한반도 비핵화보다 북한의 안정에 더 큰 전략적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북한의 핵무장에 대한 중국의 득실관계 판단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북한의 핵무장에 따른 중국의 가장 큰 우려는 한반도의 불안정과 동북아에서 '핵 도미노'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데에 있었다. 그런데 중국은 북한을 안정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경제력과 외교력을 확보하고 있다. 또한 북한의 핵무장이 한국-일본-대만 등으로 이어지는 동북아 핵 도미노 현상을 일으킬 가능성도 현재로서는 없어 보인다. 반면 북한이 핵무장을 통해 한·미·일을 상대로 자체적인 "억제력"을 확보한다면, 중국으로서도 안보 부담을 크게 덜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필자가 만나본 복수의 중국 전문가들이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가 공격당한 사례는 없다"며 "북한의 안보 불안이 근본적으로 해소되지 않는 한, 북한의 핵 포기를 기대하는 것은 난망한 일"이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준다.
정리하자면 김정은 체제가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더욱 낮아지고, 중국도 북한의 핵보유를 현실로 받아들이거나 북핵 해결을 '장기적 과제'로 미룰 가능성이 높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이명박의 화법은 '핵을 포기해, 그럼 도와줄게'였다. 뒤집어서 말하면 '핵을 포기하지 않으면 국물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핵무기를 보유한 나라가 '그림의 떡'을 보고 핵을 포기한 사례는 없다. 이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인 '비핵개방 3000'의 참담한 실패로 거듭 입증되었다. 지금까지 한-미-일 정부가 택한 방법은 북한에게 고통의 크기를 늘려 핵 포기를 유도·압박한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채찍론'이다. 그러나 북한 정권이 인민의 먹고사는 문제보다 국가안보를 우선시하고 중국이 버티고 있는 한, 채찍은 북한의 핵 포기를 가져올 만큼 치명적일 수 없다. 이는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남한도 핵무기를 개발하거나 미국 핵무기라도 들여와서 '공포의 균형'을 이뤄야 할까? 비현실적이고도 자학적인 방법이다. 지금처럼 남한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서, 북한은 "핵 억제력"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평화공존을 모색해야 할까? 북한이 핵을 보유한 것이 엄연한 현실이고, 과거 미국과 소련, 미국과 중국이 서로 핵을 가진 상태에서 데탕트를 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남북한 사이에는 핵을 제외하고도 풀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는 점에서 고민해 봐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서로를 절멸시킬 수 있는 독침을 품고 있는 상태에서의, 평화는 냉전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 남북관계, 남북한 내부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한반도 분단체제에서 '공포의 균형'과 평화공존이 양립하기 어렵다는 것이 냉엄한 현실일 게다.
다시 한국전쟁으로 돌아가 보자. '북핵의 뿌리'는 바로 이 전쟁에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AP> 통신은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이해 미국의 비밀 해제 문서를 분석해 다음과 같은 전했다. "1950년대부터 오바마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반복적으로 북한에 대해 핵무기 사용을 고려해왔고, 계획해왔으며, 위협해왔다." 그러면서 "미국의 핵 위협은 북한에게 핵무기를 개발·보유할 구실을 주고 있다. 북한은 이러한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라고 결론지었다. '불편한 진실'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지 않는 한, 사활적인 이해가 걸린 북핵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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