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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화신 '구미호', 셰익스피어 희곡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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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화신 '구미호', 셰익스피어 희곡이라면… [親Book] 미하엘 쾰마이어의 <한 권으로 읽는 셰익스피어>
공기는 뜨겁고 바람은 적었다. 한 여름 내내 지속되는 습하고 무더운 밤을 견디며 즐겁게 본 드라마 한 편이 있었다. 월화 드라마 <구미호 여우 누이전>이다.

드라마 '구미호'는 유사한 패턴을 조금씩 바꿔가며 방영되는 오래된 납량물이다. 인간이 되기 위해서 인간의 간이 필요했던 구미호는 아홉 개의 꼬리를 감춘 채 은밀한 모습으로 인간을 유혹하고 해쳤다. 그런데 올해 구미호는 이전과는 매우 색다르다.

구미호가 인간의 간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구미호의 간이 필요해진 것이다. 모성이라는 본능을 발휘하며 자식의 목숨을 지키려는 구미호와 빼앗으려는 인간 사이에 한판 승부가 벌어진다. 금수(禽獸)와 인간의 관계가 역전된 것이다.

이제 두려운 것은 구미호의 손톱이 아니라 인간의 칼이다.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 세상과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구미호의 변신쯤은 아무런 두려움도 되지 못하는 현실이 반영된 것 같아 한편으로 서글퍼지기도 한다.

드라마도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처럼 인간과 사회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창(窓)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한 편의 좋은 고전은 다양한 인간의 모습과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한다. 오랜만에 다시 읽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야말로 다양한 삶의 욕망을 이해하고, 인생의 진실을 살피는 데 손색이 없다.

셰익스피어의 대표작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러나 당연하게 다가오는 이 친숙함이 오히려 작품 읽기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요즘 학교 권장 도서 목록에서 셰익스피어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은 그의 대표작 몇 편쯤은 이미 읽어 보았을 것이라는 전제가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 <한 권으로 읽는 셰익스피어>(윌리엄 셰익스피어·미하엘 퀼마이어 지음, 김희상 옮김, 작가정신 펴냄). ⓒ작가정신
하지만 어린 시절 줄거리나 이해할 정도의 편집된 책으로는 제대로 된 작품 이해에 도달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어려운 희곡 원본을 청소년이 찾아 읽기도 힘들다. 그래서 골라 낸 책이 <한 권으로 읽는 셰익스피어>(김희상 옮김, 작가정신 펴냄)다. 이것은 미하엘 쾰마이어가 원작의 분위기를 최대한 살려 해박한 고전 지식을 바탕으로 개작한 것이다. 이 책에는 셰익스피어의 대표작이라고 부를 만한 <맥베스>, <오셀로>, <겨울 이야기>, <한여름 밤의 꿈>, <아테네의 티몬>, <리어 왕>, <뜻대로 하세요>, <로미오와 줄리엣>, <줄리어스 시저>, <끝이 좋으면 다 좋아>, <햄릿> 순으로 작품이 묶여져 있다.

욕망, 고뇌, 사랑, 희망, 의무, 야망, 운명, 좌절, 질투, 우정, 죽음, 배신 등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어들이다. 이것들은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주제어로 작용한다. 복잡하게 얽힌 우리네 삶도 잔가지들을 정리하고 나면 바로 이런 단어들이 굵직한 매듭으로 인생을 동여맨다. 아홉 개의 꼬리를 감추고 금기된 욕망을 꿈꾸는 구미호의 모습이 다양한 욕망의 화신이 되어 질주하는 인간들의 내면을 상징하듯이 사랑과 욕망에 눈이 먼 셰익스피어의 등장인물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과도 쉽게 오버랩 된다.

착하고 순수하나 세상물정 모르다가 눈을 잃고서야 비로소 세상을 바로 보고 참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된 리어왕, 운명적인 사랑을 만났으나 질투에 눈이 멀어 아름다운 사랑을 가꾸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오셀로, 친구들에 대한 무한한 헌신이 갑절의 믿음과 우정이 되어 되돌아오리라 믿었지만 자신의 재산과 우정이 단지 친구들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워주는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인간을 저주하게 된 아테네의 티몬, 자기안의 욕망을 끊임없이 사회적인 책무로 정당화시키며 자신을 파멸로 몰아간 줄리어스 시저의 브루투스, 아버지를 살해한 원수가 다름 아닌 자신의 육친(肉親)이고, 그 육친(肉親)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어머니를 부정해야 하는 비극적 운명 속에서 고뇌하는 햄릿까지 그 인간형은 시대를 떠나 인생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을 극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 작품 속에는 등장인물이 이처럼 자신들의 욕망과 의지로 삶을 불태운다. 나무가 햇살을 받고 조금씩 생명의 키를 키우듯이 삶에 대한 치열함으로 생명의 반경을 넓혀 나간다. 물론 그것이 늘 행복한 결말을 예고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극의 정점에서도 인간은 인생을 성찰하고 비극이 완성되며 삶은 온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언급된다. 서기 2500년경 고도의 과학기술과 전체주의가 결합되어 나타난 미래 사회, 세균이 멸균되듯이 인간의 비판력과 창의력이 실종된 암울한 디스토피아에서 존이라는 인물은 자신이 어린 시절 읽었던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떠올린다. 인간성이 사라지고 기계적 삶을 살아가는 시대에 셰익스피어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의 고뇌가, 불완전한 그들의 모습이 오히려 인간의 본성을 일깨우고 인간성을 회복하는 기제로 작용한 것이다.

극단적으로 그려진 <멋진 신세계>와는 다르겠지만 지금의 현실 또한 만만치 않다. 우리 사회 전반에 효율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무섭도록 질주하는 경쟁 논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적 가치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시장주의만이 모든 가치를 평가하는 척도가 되어 인간성은 끝없이 폄하되고 왜곡된다.

한창 성숙을 위해 빛나게 생활해야할 학생들은 지치고 무기력하게 생활한다. 내일의 야망이 현실의 삶을 파괴했던 맥베스의 삶같이 현대인들은 내일의 삶을 위해 현재를 바쳐야 하는 모순적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어디에서고 현재를 인정하고 즐기는 삶의 여유는 쉽사리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이 오래된 책, 셰익스피어를 함께 읽어야 할 또 다른 이유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원본을 살려 희곡으로 읽을 때 가장 좋다. 책이 귀하던 어린 시절 친척집에서 빌려 보았던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깨알 같은 세로쓰기 책이었다. 그때 어렵게 읽었던 작품들은 지금도 경이로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일렁이는 햇살 같고 아침이슬 같이 빛나는 시어들, 입을 벌리면 토할 듯이 쏟아져 나오던 정열적인 단어들, 주렁주렁 달려 있다가, 우렁차게 달리다가, 땅으로 곤두박질칠 것 같던 단어들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런 느낌을 살려 읽고 싶다면 아침이슬에서 펴내는 시인 김정환이 원문을 직접 번역해 내는 책들을 권하고 싶다.

마지막까지 모성을 품고 생명의 위대함을 보여준 구미호 이야기도 끝이 나고 학교도 방학을 마치고 개학을 했다. 간직하고 싶은 지난 여름의 기억들은 벌써 한여름 밤의 꿈이 된 듯 저만큼 물러나 있다. 일상은 분주하고 할 일은 쌓여간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뜻대로 하세요>에 나오는 로잘린느의 마지막 대사 "as you like it"처럼 자신을 믿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 방향을 틀어 나간다면 새로운 삶의 길이 끊임없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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