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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의 공격성(攻擊性), 우리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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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일베'의 공격성(攻擊性), 우리는 없는가? [기고] 사회의 진보는 이성과 감성, 모두에서 함께 진행돼야
적대적 감정의 배설구, 일간베스트

진보세력을 '좌좀(좌익좀비)', 전라도를 '홍어', 한국여성을 '김치녀'라고 비하하면서 논란되었던 온라인 커뮤니티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가, 최근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군이 개입한 폭동'이라 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희화화한 합성사진 '인증샷'을 올려 물의를 빚었다.

아래는 '일베' 중독회원을 인터뷰한 지난 22일 자 <한겨레> 기사, '일베' 중독회원 만나보니 "'김치×'라고 쓰면 기분이 풀린다" 중 일부이다.

일베 중독회원 김 아무개(22) 씨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은 욕은 왜 하나
=사람들이 유행어를 만드니까. 나도 따라 했다. 대통령 합성 사진 보면 재밌고.

-고등학교에서 현대사 배웠나
=안 배웠다.

-광주민주화운동 알아?
=광주폭동? 전두환이 탱크로 밀어버렸잖아. 일베에서 처음 알았다. 학교에서 배운 적 없다.

'일베' 회원들이 일정한 대상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데에는, 어떤 객관적인 근거나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이유를 찾기 어렵다. 그 형태는 대단히 '폭력적'이고 그 감정적 기저는 '적대적'이며, 그리고 근본적인 동기는 '재미'이다.

-하는 일은?
=취업준비 중고등학교 중퇴했다. 나쁜 짓 해서 소년원 들어갔다. 4개월. 누명 썼었다. 일베는, 인터넷에서 하는 거 보고 친구가 알려줘서 시작했다. 재밌다고. 여자를 비난하고. 욕하고 그런 이상한 글 쓰고 재밌다고. 그래서 들어가 봤더니 진짜 재밌더라. 중독 돼서 하루 10시간씩도 하고. 욕도 마음껏 할 수 있다. 나는 여자를 싫어한다. 남자를 무시하는 거 같아서. 요샌 잘나가는 여자들이 많다. 그게 싫다. 김치×, 욕설을 쓰면 기분이 풀린다.

-직업은 왜 없나?
=직업 갖기가 어렵다. 여자들이 얼굴 따지는 것도 싫고. 나는 여자 친구 한 번도 없어. 일베 해서 더 여자혐오증이 생기고 있다. 가끔 주말에 택배 아르바이트는 한다.

-사회 불만 뭐가 제일 큰가?
=돈 많은 사람, 똑똑한 사람, 공부 잘하는 사람이 싫다. 공권력 갖고 무시하는 사람 싫다. 나는 그런 데 속하지 못하니까 불만이 있다. 근데 일베를 하다 보면 속이 풀린다. 여자 비난하고, 그러면 재밌는 사진 올라오면 가끔 새벽에 음란물도 올라오고, 해방감을 느낀다.

일베 회원들은 현재 우리 정치와 경제를 주도하는 '강남의 부유한 보수층'이 아니다. 이들은 사회에서 소외된 서민층의 일부분이다. 그들은 '일베'라는 공간에서 욕설을 함으로써 사회로부터의 소외감을 적대적으로 해소한다. '좌좀' '홍어' '김치녀' 등을 자신보다 '더 못한 대상'으로 설정하고, 그 대상을 집단적으로 학대(虐待)함으로써 우월감과 사디즘(sadism)적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다. "김치×, 욕설을 쓰면 기분이 풀린다"는 대답이 그것이다.

현재 '일베' 외에는 이러한 적대적 감정을 배설(排泄)할 수 있는 곳이 없다. 따라서 그들에게 폭력적인 언어와 적대적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자유를 준 '일베'는 그들에게 친화적(親和的)인 감정으로 수용(受容)된다. 이러한 친화적 환경을 기반으로 변희재 씨와 같은 '일베'의 보수적 이론가(?)의 주장이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광주민주화운동 알아?
=광주폭동? 전두환이 탱크로 밀어버렸잖아. 일베에서 처음 알았다. 학교에서 배운 적 없다.

-투표해본 적 있나?
=대통령 선거 때 박근혜 후보 뽑았다.

-문재인은?
=그냥, 문재인은 싫다. 의자 비싼 거 사가지고 싫었다. 박근혜는, 일베에선 다 박근혜 뽑으라니까.

일베의 보수적 이론가들은 북한을 비판하면서, 새누리당 외의 모든 정치세력을 '종북좌파'로 매도한다. 북한의 비(非) 민주성과 낙후한 경제는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인 팩트(fact)이기 때문에, '종북좌파'를 비판하는 것은 일베 회원에게 너무도 자연스럽게 수용된다. 여기에 '노무현' 또는 '문재인'이 왜 북한과 연결되는지 어떤 논리적 증명이 없음에도, 일베 회원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노무현과 문재인을 부정한다.

▲ 23일 오후 8시 현재, '일간 베스트 저장소'에 접속한 '일베인'은 2만 458명이다. '일베' 운영진은 전날 공지를 통해 "특정 게시글·댓글 탓에 언론 매체 등의 주목을 받고 있고 이로 인해 수사기관의 게시자 정보 요청이 끊임없이 접수되고 있다"고 밝혔다. ⓒ일베 홈페이지 캡처

인간은 이성적인가, 감정적인가

인간이 어떤 대상을 인지(認知)하고 사고를 전개하며 결론을 내리는 과정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진행될까, 아니면 감정에 의해 좌우될까?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 등의 신경과학자들이 비슷한 의문을 던졌다. 위 질문을 거꾸로 만들면 오히려 답이 쉬워진다.

즉, 하나의 텍스트를 선입견이나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독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게 하려면 종전의 선입견이나 감정에 충동되지 않으려고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긴장을 유지해야 하고, 이러한 긴장의 과정을 상당한 횟수로 반복해서 훈련해야만 한다. 덧붙여 관련된 여러 정보들이 취합되어 최종적으로 정리될 때까지 확정적인 결론을 유보하는 중립적인 자세도 계속 견지하여야 한다. 때에 따라서 잠정적인 결론이 중간에 채택되었더라도 오류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전제해야만 한다.

그런데 위와 같이 피로(疲勞)한 인지과정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선험적(先驗的)으로 어떤 결론을 잠정 채택하고, 거꾸로 그 결론에 부합하는 증거들을 사후에 취사하는 역전(逆轉)된 방식을 취한다. 이러한 선험적(先驗的) 결정은 당연히 종전에 가지고 있었던 프레임에 의해 조종되며, 한편 그 대상이 인지자에게 친화적 감정을 주는가, 적대적 감정을 주는가에 따라 그 결정 역시 달라진다. 즉 문재인 후보가 TV 정치광고를 하면서 앉았던 의자가 비싼 것이었다는 사실이 주는 적대적 감정은, 문재인에 대한 이성적 판단을 하기 이전에 그를 '적대적 대상'으로 결정해 버린다.

요컨대 일베 회원들에게 폭력적인 언어와 적대적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자유를 준 '일베'는 그들에게 친화적(親和的)인 감정으로 수용(受容)되어, '일베'의 보수적 이론가(?)의 주장이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국가와 민족'이라는 친숙한 개념도구와 '반북(反北)'이라는 배타적 프레임이 결합되면서 지금의 '일베'라는 괴물을 낳은 것이다.

김한길 대표의 멱살을 잡은 노사모 회원

그런데 이러한 '적대적 감정'과 '폭력적인 공격성'은 '우파'들, 즉 새누리당 지지자들만의 문제일까?

얼마 전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제'에서 한 노사모 회원이 김한길 민주당 대표의 멱살을 잡았다. 그는 왜 그랬던 것일까? 김한길이 노무현과 친노세력을 비판했기 때문인가? 도대체 '노무현'은 비판받아서는 안 되는 존재인가? 설령 비판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잘못된 비판은 토론의 과정에서 논쟁되어야 하지 멱살잡이로 해결할 문제일까?

지난 민주당 당대표 선거는 지금 우리의 정치수준이 얼마나 조잡하고 저열한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였다. 물어보자. 계파정치가 나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의회가 여러 정당의 경쟁의 장(場)인 것처럼, 한 정당 내에서도 여러 계파가 경쟁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의 정파'만이 존재할 때에 나타나는 독선과 오류의 가능성, 그리고 부패의 가능성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혁명적 봉기에 의해 사회를 변혁시킬 것인가 아니면 의회정치에 의해 변혁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살아 있었던 제1인터내셔널(International) 이래 100여 년이 넘게 논쟁 되었던 주제였다. 그러다가 소련과 동유럽 체제가 무너지면서 이 문제는 너무도 어이없게 답을 찾았다. 설령 혁명을 통해서 노동계급과 농민을 대변한다고 자임하는 프롤레타리아 정당이 권력을 장악하더라도, 서로 경쟁하지 않으면 그 오류와 부패를 시정할 수 없다는 너무도 단순한 원리가 그 해답이다. 프랑스 68혁명으로 드골 정부가 의회를 해산한 이후 사회당이 선거참여를 선언한 것과 달리 공산당은 계속적인 총파업과 혁명적 봉기를 주장하였다. 그런데 시민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왜냐하면, 의회주의 체제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혁명의 가능성이 있는 나라는 중국과 북한이다.

민주당의 문제점을 계파정치로 보고서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의 부재를 아쉬워하는 평론가가 있었다. 그러나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모든 계파를 압도한 형태가 바로 한국 정치사에서 계속 지적되었던 '제왕적 총재'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라. 오히려 지금은 독선으로 얼룩졌던 제왕적 총재 중심의 정당체제로부터 벗어나는 과도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민주당의 문제점은 '계파정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계파가 아무런 정책적 비전 없이 단지 인맥으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데에 있다. 각 계파가 미래에 대한 비전과 정책적 차별성을 제시하지 않고, '너희들 때문에 대선에서 졌다'는 투로 '패거리 싸움'만을 일삼았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정치인들뿐 아니라 그 지지자들 역시 트위터에 '한길이는 안 돼' 혹은 '친노는 안 돼'라는 식으로 어떠한 합리적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극한적인 감정대립에 합류하였다.

민주당이 대선에서 패배한 이유는 '친노' 때문도 '비노' 때문도 아니다. 민주당이 '민주 대 반민주 프레임'과 '정권심판론'이라는 네거티브 전략에 갇혀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비전'을 부각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민주 대 반민주 프레임'은 '적대적 감정'에 기초해 있다. '폭력적 공격성'과 '적대적 감정'은 '일베'만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정의의 관념은 이성적인 주제인가, 아니면 감정적인 주제인가

'무엇이 옳은가' '정의(正義)란 무엇인가' 또는 '공정(公正)한가 불공정(不公正)한가?'라는 관념은 이성적인 주제일까 아니면 감정적인 주제일까? 1982년 독일 훔볼트대의 베르너 구스 연구팀이 개발한 최후통첩 게임(ultimatum game)을 예로 들어보자.

여기에 100만 원이 있는데 A(제안자)는 분배할 권한을 가지고 B(반응자)는 수락할 권한만을 가지며, 합의되지 않으면 둘 다 한 푼도 가질 수 없다. '게임이론'에 따르면 반응자는 제안자가 아무리 적은 금액이라도 제시해 오면 0이 아닌 이상 거절하는 것보다 무조건 받는 것이 이득이다. 따라서 제안자는 9 : 1 혹은 9.9 : 1 등 자신의 이득을 극대화하여 반응자에게 최소한의 금액만 제시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실험의 결과는 전혀 달랐다. 제안자는 5 : 5로 나누겠다는 비율이 가장 많았고, 6 : 4나 7 : 3으로 나누겠다는 제안자의 비율까지 합하면 거의 80%가 넘었다. 사람들은 9 : 1 또는 9.9 : 1로 나눠 자신이 대부분의 몫을 가져도 되는 상황에서 상대방에게 왜 큰돈을 제시할까? 한편 반응자는 아무리 낮은 금액이라도 무조건 받는 것이 이득이지만 8 : 2나 9 : 1로 나누겠다는 제안을 받은 경우 제안을 거절한 사례가 67퍼센트나 되었다.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명백히 이익인 상황에서도 왜 거절해서 둘 다 받지 못하게 하는 걸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프린스턴대의 신경과학자 조너선 코언(Jonathan Cohen)은 이 게임을 하는 동안 반응자를 자기공명영상장치(MRI) 안에 넣어 두고 9 : 1이라는 매우 불공정한 제안에 대해 받아들일지 여부를 결정할 때 뇌 활동 패턴을 촬영했다. 그런데 반응자가 제안을 받을 때와 거절할 때의 뇌 활동 패턴이 매우 달랐다.

수락한 반응자의 뇌는 '전전두엽의 측배 쪽'(Dorsolateral prefrontal cortex)이 매우 활성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 영역은 합리적인 추론을 하는 영역으로 알려진 곳으로, 이 반응자는 제안이 불공정하더라도 받아들이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익이라고 합리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9 : 1의 제안을 거절한 대다수의 반응자는 측배 전전두엽이 그다지 활발하게 활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슐라(Insula)와 전대상회피질(Anterior cingulate cortex)이 크게 활성화되었다. 인슐라는 '길을 가다가 바닥에 똥이 있을 때 또는 전봇대에 전날 술 취한 사람이 피자를 거하게 한 판 쏟아낸 걸 볼 때' 활성화되는 부위다. 다시 말해서 역겨움이나 인간관계에서 얻는 고통이 표상되는 곳이다. 그들이 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말 그대로 '더럽고 치사해서'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슐라의 활성화 패턴으로 짐작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네이버 블로그 Phillip & Company [DBR]최후통첩게임 참고

반응자는 제안자가 아무리 적은 금액이라도 제시해 오면 무조건 받는 것이 이득임에도 9 : 1의 제안에 대해 대다수의 반응자가 거절을 했다. 이것은 '더럽고 치사해서'이다. 즉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의 결과이다. '무엇이 정의로운가'라는 질문에 인간은 공평(公平) 또는 공정성(公正性)을 가장 우선적인 기준으로 판단하며, '정의(正義)'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가 아닌 바로 '공평하지 않다는 분노의 감정'에 기초해 있다.

그러한 연유로 모든 정치토론은 지극히 '이성적인 작업'일 거라는 예측을 깨트리고, 그 마지막에 항상 어김없이 상대방에게 분노를 표출하게 된다.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의 기준에 상대방이 위반된다고 판단한 순간, 곧바로 '적대적 분노'로 귀결되는 것이다.

감정의 측면에서, 진보의 가치는 어떻게 구현되는가

현대의 민주정치는 부유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투쟁이 아니다. 보수적인 정당을 지지하는 서민과 진보적인 정당을 지지하는 서민, 즉 서민들끼리의 각축(角逐)인 것이다. 왜냐하면 부유한 자들의 표는 5퍼센트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수적인 정당은 본질적으로는 부자들의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서민들을 포섭하는 유능함을 보이며, 진보적인 정당들은 서민들의 계급적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그들을 매료시키지 못하는 무능함을 보인다. 단적으로 지난 대선에 나왔던 두 명의 노동자 후보는 단 1퍼센트의 지지도 얻지 못했다. 그들이 자신의 무능함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여하튼 위와 같은 이유로 현대의 민주정치를 투쟁과 대립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오로지 '현재 보수적인 정당을 지지하는 서민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가'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진보의 가치는 이성적인 주제로만 구성되는 것일까? 좀 더 정의로운 경제강령과 교육강령, 사회 · 문화강령만 갖추면 사회의 진보는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돌이켜 보라. 만약 지금 당신이 진보적인 정당을 지지하고 있다면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를. 이론적이고 이성적인 탐구의 결과인지 아니면 감정의 이끌림이었는지를. 돌이켜 보면, 주변에서 핍박받고 억울함을 당하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공감(共感), 그들의 시각으로 함께 아파했던 동료애의 감정이 그 출발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러한 연대(連帶)의 감정으로 '진보의 가치'를 선택하고, 그러고 나서 그 가치가 정의로운 것이라는 이성적인 이유들을 취합해 온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인식론적 경로이다.

분명 정의의 관념에는 '불공정에 대한 분노'가 깔려 있다. 불산 누출로 생명을 위협받는 노동자에 대한 공감은, '돈만 벌면 되지 않느냐'고 대답한 삼성계열사의 CEO에 대한 분노와 엉켜 있다. 그러함에도 불공정의 문제는 '좀 더 정의로운 법률'을 구축함으로써 제도적으로 해결하여야 하지, 단지 적대적 분노를 확산시키는 것은 아무런 해결책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보수당이 원하는 바로, 적대적 분노의 확산은 공포정치와 경찰국가의 명분이 될 뿐이다.

이 사회를 진보하게 하려면, 좀 더 정의로운 경제체제와 교육체제를 실현하는 것만큼이나, 통합과 화해의 감정, 연대와 동료애의 감정을 확산시켜야만 한다. 그래서 스스로 진보주의자를 자처한다면 적대적 감정에 치우친 대립을 피해야 하고, '폭력적인 공격성'을 지양해야 한다. 이것들은 그 자체로 역사를 퇴보시키는 반동적인 가치들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분노에 기초한 모든 변혁이론 역시 수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시작이 똘레랑스(tolérance)이다. 자신과 다른 정치적·종교적 입장에 대해 우선은 존중하고 용인해야 한다. 그 경계 내에서 감정적이지 않은-이성적인 토론을 통해서 합일점을 찾아 나가는 합리적인 과정을 정착시켜야 한다. '합리적인 토론문화'는 그 자체로 우리 사회의 진보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일베'에 대해서도 똘레랑스의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똘레랑스의 관용(寬容)은 똘레랑스의 규칙을 준수한 자에 대해서만 허락되어야 한다.

억압받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와 동료애의 감정은 우월적 지위에서 아래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는 연민(憐愍)이 아니라 동등한 인간으로서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는 공감(共感)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따뜻한 감정들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아이들에게, 그러한 동료애의 감정이 당연한 것으로 익숙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2017년에 야당이 집권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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