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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죽였다. 아니, 나는 범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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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죽였다. 아니, 나는 범인이 아니다!" [김용언의 '잠 도둑'] 코넬 울리치 <죽은 자와의 결혼>
초등학교 도서관에 왜 그리 많은 추리 소설이 꽂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3학년 어느 날 점심시간, 어쩌다가 도서관에 들어갔는지도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 셜록 홈즈 시리즈를 발견하고 매일 점심시간마다 도시락을 순식간에 먹어버린 다음 바로 도서관으로 달려가 홈즈를 탐독하기 시작했다.

홈즈 시리즈 옆에는 괴도 루팡(그때는 '뤼팽'이라고 표기하지 않았다) 시리즈가 있었고 그 옆에는 해문추리문고 몇 권도 자리 잡고 있었다. 아마 홈즈 시리즈와 그 이후 중학교 시절을 사로잡은 애거서 크리스티 시리즈 사이에, 진심으로 추리 소설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해문추리문고 중 발견했던 코넬 울리치의 <검은 옷의 신부>였던 것 같다.

결혼식을 막 마치고 교회 밖으로 나온 행복한 신혼 부부, 그리고 그들 앞으로 들이닥친 검은 색 자동차, 순백의 웨딩드레스에 튀긴 핏자국, 이어지는 복수…. 얼마 전 나온 <검은 옷의 신부>(홍연미 옮김, 페이퍼하우스 펴냄)를 다시 읽으니 해문추리문고 버전은 거의 3분의 1 수준으로 축약된 버전임을 깨달았지만, 아동용 추리 소설의 한계려니 하고 너그럽게 이해하기로 했다. 중요한 건 11살짜리에게도 코넬 울리치의 로맨틱한 파국은 홈즈와 루팡 따위는 머리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릴 만큼 매혹적이었다는 사실이다.

프란츠 카프카가 추리 소설을 썼다면, 앨프리드 히치콕이 카메라 대신 펜을 들었다면, 에드거 앨런 포가 20세기 뉴욕에 살았더라면 그들 모두 이 사람처럼 글을 썼을 것이다. 윌리엄 아이리시라는 필명과 코넬 울리치라는 본명으로 엄청난 양의 추리 소설을 썼던 이 작가 말이다. 1903년에 태어나 1940년대에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코넬 울리치는 작가로서의 부와 명성을 거머쥐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로 내몰면서 뉴욕의 호텔을 전전하는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그런 뉴욕 뒷골목의 정서와 분위기를 완벽하게 체화했기 때문에 그의 추리 소설들은 다른 작가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별한 분위기가 떠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저항하는 인간들에 대한 섬세한 연민과 도저한 낭만성, 화려하고 쓸쓸한 대도시의 밤거리가 손에 잡힐 듯 묘사되는 생생한 단어들.

코넬 울리치(혹은 윌리엄 아이리시라는 필명도 자주 썼다)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아무래도 (소위 세계 3대 추리 소설 중 한 편으로 손꼽히는) <환상의 여인>(이승원 옮김, 창 펴냄)일 것이다. "밤은 젊고 그도 젊었다." 아내가 살해당하던 날 밤, 남자는 누구든지 기억할 수밖에 없는 화려하고 기묘한 오렌지색 모자를 쓴 여인과 마주치고 몇 시간을 함께 보낸다. 그리고 아내의 살인범으로 체포된다.

▲ <죽은 자와의 결혼>(윌리엄 아이리시(코넬 울리치) 지음, 김석환 옮김, 해문출판사 펴냄). ⓒ해문출판사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선 오렌지색 모자의 여인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이름도 주소도 나이도 모른다. 그녀와 함께 보낸 저녁 내내 마주쳤던 사람들을 찾아 나서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아니요, 당신은 그날 혼자 있었습니다"라고 증언한다. 유령처럼 사라져버린 오렌지색 모자의 여인을 찾기 위한 여정은 남자의 사형 집행 직전에서야 가까스로 진범이 밝혀지는 장면까지 독자의 목을 조르듯 숨 가쁘게 진행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울리치의 최고 걸작은 <죽은 자와의 결혼>(김석환 옮김, 해문출판사 펴냄)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가진 것 없고 절망에 휩싸인 젊은 여인 헬렌은 열차에서 부유한 신혼부부와 마주친다. 남편 휴의 사랑을 누리는 부인 패트리스는 임신 7개월이었다. 패트리스는 임신 8개월째인 헬렌의 처지를 동정하여 그녀에게 호의를 베풀고 두 사람은 하룻밤 사이 친구가 된다. 패트리스와 휴는 유럽에서 만나자마자 순식간에 사랑에 빠져 눈 깜짝할 사이에 결혼했고, 이제야 얼굴도 모르는 휴의 가족을 만나러 미국에 온 참이었다. 그러다 불의의 열차 사고가 발생한다. 헬렌이 정신을 차렸을 때 패트리스와 휴는 모두 숨을 거두었고, 그녀는 기이한 우연에 의해 자신이 패트리스로 오해받는다는 걸 깨닫는다.

"기차는 기적을 울리고 있었다. 달리고 있는 기차라면 모두 내는 기적이다. 그러나 그녀의 귀에만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되돌아가, 되돌아가.
덜커덩덜커덩.
지금 당장 그만둬. 아직 돌아갈 수 있어."


헬렌은 다시 찾아올 것 같지 않은 이 기회를, 은밀한 죄책감으로 받아들인다. 패트리스의 시부모는 더할 나위 없이 그녀를 아껴준다. 헬렌은 처음으로 경험한 이 행복하고 다정한 삶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리고 헬렌의 정체를 알고 있는 유일한 남자, 그녀의 전 남편이 등장한다. 그는 돈을 원한다. 결국 살인이 일어난다.

헬렌은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누가 범인인가? 그녀의 새로운 연인인가? 그러나 그녀는 연인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혹은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누가 범인인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고, 결국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불안감의 지속이라는 짐을 짊어지게 된다. <죽은 자와의 결혼>의 마지막 문단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이 일과 싸워왔다. 생각나는 모든 방법으로. 남겨진 모든 방법으로. 방법이 없다. 어쩔 수 없다. 도망갈 길은 없다. 우리는 올가미에 걸려 꼼짝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가 범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내가 범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게다가 그도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로서는 뚫고 나갈 수 없다. 도망갈 길은 없는 것이다. 어떤 게임인지 나는 모른다. 어떤 식으로 하는 것인지 방법도 모른다. 다른 사람은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이다. 단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 게임 도중 어딘가에서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는 사실 뿐이다. 이 게임에서 이겼다면 어떤 상품을 받게 되었을지 나는 모른다.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 상품을 받지 못했다는 것뿐. 우리는 졌다. 나로서는 그것밖에 모른다. 우리는 패배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미 게임이 끝난 것이다."

사실 셜록 홈즈나 에르퀼 포아로, 브라운 신부, 엘러리 퀸 등의 정교하고 이성적인 추리 방식에만 익숙해져 있던 독자에게 코넬 울리치의 소설은 매우 낯설 것이다. 울리치는 '범인이 누구인가'를 찾아가는 추리 해결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그는 독자에게 탐정과 함께 두뇌 싸움을 벌이자고 권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범인이 아예 주인공으로 전면적으로 나서거나, 죄 없는 누명을 뒤집어쓴 무명의 주인공들이 필사적으로 정해진 시간 내게 진짜 악당을 찾아 헤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무도 주인공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도움을 주려 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그들은 스스로에게 모든 것을 배팅해야만 한다. 그럼으로써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추리가 아니라, 재빠르고 집요한 행동 자체가 중요해지며 거기서 빚어지는 순수한 스릴과 서스펜스가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예를 들어 연인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광기에 빠진 남자는 자신의 연인을 죽게 만든 5명의 사내들을 차례로 찾아간다. 그는 그 사내들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차례로 살해한다. 차근차근, 다음 번에는 어떻게 될까? 그때도 누군가 죽게 될까, 아니면 남자를 좇는 형사가 기어이 마지막 살인 이전에 남자를 체포할 수 있을까?

"마치 하늘의 빛을 비친 듯이 빛나는 도로가 곧장 뻗어 있고, 그 위로 그녀의 소형 로드스타가 달려갔다. 그 로드스타는 어떤 형사라도 따라가지 못하리라. 그것을 운전하는 여자는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날개가 있다. 속도계 따위를 읽을 필요가 없다." (<상복의 랑데부>(김종희 옮김, 동서문화사 펴냄))

새벽 댄스홀에서 마주친 젊은 남녀는 서로가 동향 출신이라는 걸 알게 된다. 가혹한 도시 생활에 지친 그들은 다음 날 아침 첫 차를 타고 고향에 내려가기로 약속하지만, 뜻하지 않은 살인 사건에 휘말렸다는 걸 깨닫는다. 이제 그들은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첫 차를 타기 전까지 스스로 살인범을 찾아내고자 텅 빈 도심 한복판을 달린다. (<심야의 추적>)

코넬 울리치의 소설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부터 시작한다.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쓴 평범한 남녀, 운명적 사랑을 갈구하는 청춘, 불가해한 어른들의 세계를 엿보는 어린 아이, 말없이 꾸준하게 범죄의 흔적을 따라 추적을 지속하는 내성적인 형사 등이 오로지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는 어떤 목표 때문에 필사적으로 내달린다. 그들은 일상에 불현듯 침투한 악몽 같은 사건 속에서 혼란에 휩싸인다.

자신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확신하면서도 내심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저질렀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몸서리치면서,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기 전에 혹은 목표로 한 사냥감에게 다다르기 위해 언제나 시간과 필사적인 경주를 벌인다. 대부분은 언제나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데, 그런 선택의 순간에조차 이 모든 것은 그들을 위해 예정되어 있었다는 불가피한 느낌을 준다. 불합리한 삶은 한순간 붕괴해 내리고, 거기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다는 느낌,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잘못될 것이라는 숙명적인 패배감과 체념을 동반한다.

<죽은 자와의 결혼>은 심지어 진범이 누구인지 알려주지도 않은 채 끝난다. 질서의 회복, 정의의 승리, 합리적 사유의 우위를 과시하는 추리 소설의 범위에는 들어맞지 않는 결말. 누군가 그랬다. 코넬 울리치의 작품을 읽으면 한밤중의 비명 소리가 들려올 것이라고. 20세기 중반의 화려한 대도시 한복판에서 절망에 휩싸인 남녀의 공포와 서스펜스는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에도 유효하다. SF 소설가 레이 브래드버리는 "코넬 울리치는 매 세대마다 재발견되어야 하는 작가다"라는 상찬을 바쳤다.

덧붙임. 몇 년 전 장르 문화 전문지 <판타스틱>에서 에디터로 근무할 때, 코넬 울리치의 <이창>을 번역할 기회가 생겼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다시피 앨프리드 히치콕이 연출하고 제임스 스튜어트와 그레이스 켈리가 주연을 맡은 영화 <이창>의 원작 단편이었다. 주인공의 강박증적인 심리 묘사에 더 주의를 기울였던 영화 버전과 달리, 소설 <이창>은 침착한 호흡과 정교한 추리로 느긋하게 진행된다. 번역 작업을 통해 어떤 작가를 더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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