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을 할 정도로 예민하지 않은 학생들이라면 그 지옥 같은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많은 압력을 받으며 피폐해지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상처를 안고 성장해야 하는 아이들은 입시 경쟁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모순의 희생자가 되고, 사회는 그들의 고통을 외면한다. 그러한 고통 속에서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쓸모없는 꼬리들을 얻는 것은 아닌지?
꼬리 1 : 공부하는 기계
어린 학생들이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타율에 의해 강제된 자율 학습에, 과외 공부에, 학원에 다녀야 한다. 예전에는 대부분 고3 학생들만 하던 것이 이제는 초등학교 학생들도 그러한 과중한 학업에 시달린다. 암기해야 할 공식과 단어, 문제풀이, 각종 시험과 모의고사, 그리고 낙오하면 끝이라는 공포 등, 그 많은 압력으로 어린 학생들의 몸과 마음은 억눌려 있다.
과외나 영어 학원이 벌어들이는 수익은 국민소득에 계산되지만, 이들이 받는 상처는 돈으로 계산되지도 않거니와 계산될 수도 없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비용으로 계산되어 국민소득 계정에 포함된다면, 한국의 국민소득은 2만 불이 아니고, 마이너스 2만 불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우리의 아이들은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시절을 인간으로서 자라는 것조차 거부된 사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아이들이 하루의 대부분을 학교와 학원에서 보내며, 그들이 갖는 인간적 교류 역시 대부분 지식 습득의 목적만이 강조된 학교와 학원에서 이루어진다. 교사들은 시험을 위한 기술을 일방적으로 전달한다. 학생들은 그들이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데 필요한 대화의 상대를 만나기도 힘들고, 그럴 시간조차 없다.
부모 그리고 다른 가족과 함께하는 일상적인 삶을 빼앗긴,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하는 대화나 놀이를 빼앗긴 아이들은 강요에 순응하는 공부하는 기계가 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 직장에서 순종하는 일하는 기계가 되는 그런 교육으로 일관한다. 만약 우리가 자라는 아이들의 마음을 볼 수 있다면, 새싹처럼 파릇파릇한 것이 아니라, 시들어 가는 누런 색깔이 아닐까?
공부하는 기계로 만드는 교육은 사랑, 우정, 여유, 정신적 안정, 명랑함, 아량과 같은 것들을 아이들에게 자양분으로 제공하지 못한다. 이러한 것들은 암기해서 습득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극단의 입시 경쟁에 모든 것을 바치도록 요구하는 한국 사회는 아이들에게 많은 사랑을 주지 못하고 우정이 싹트고 자라게 도와주지 못한다. 그래서 입시 위주의 한국 사회는 여유보다는 각박함, 정신적 안정보다는 스트레스, 아량보다는 계산, 명랑함보다는 우울, 자신감보다는 우월감, 존경보다는 질시라는 독소들을 아이들에게 주사한다. 이러한 독소를 품고 성장해야 하는 아이들의 미래 그리고 그들이 성인이 된 한국 사회의 미래는 희망이 없다.
기계들은 진정한 상호 교류가 필요 없으며 그러한 능력도 없다. 기계의 가치는 그 기계의 유용성이나 생산성의 높고 낮음으로 판단한다. 공부 기계를 만드는 한국의 입시 위주의 교육은 등수나 서열이라는 생산성의 높낮이에 의해 아이의 가치를 결정하고, 주위의 친구들은 경쟁과 비교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만든다. 이러한 입시 경쟁에서의 성공을 최대의 목표로 삼는 한국의 교육은 아이들의 상호 교류 능력의 발달을 저해한다.
한국의 청소년들이 이웃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사회적 상호 작용 역량'이 세계 꼴찌 수준이라고 한다. 한국교육개발원과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2009년 국제교육협의회(IEA)가 세계의 36개 국가의 중학교 2학년 학생 14만600여 명의 설문 조사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 한국의 청소년들은 사회적 상호 작용 역량 지표에서 0.31점(1.00점 만점)을 얻어 35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특히 '관계 지향성'과 '사회적 협력' 부문에서는 점수가 모두 0점으로 36개국 중 최하위였다고 한다. 김태준과 김기헌 연구위원은 "한국 아이들이 지필고사 성격이 강한 영역만 점수가 높고 대내외 활동과 관련된 부문의 결과가 극히 저조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며 "지식 개발에 치중하는 정책을 바꿔 자율성을 길러줄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관련 기사 : )
경쟁을 가르치는 교육에서는 상대가 이겨야 되는 대상이거나 자신의 승리에 이용할 도구로 여기게 된다. 이러한 교육 풍토에서 친구와 이웃과 조화를 이루며 협력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성장하기란 힘들다. 사회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기계와 같이 관계가 단절되고 사회적 협력을 불가능하게 하는 교육은 실패한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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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 2 : 조기 유학으로 잃는 것은?
어떤 학생들은 조기 영어 교육을 위해 외국에 유학을 가기도 한다. 종종 엄마가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학생과 함께 외국으로 가서 낯선 생활의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 많은 아빠들은 아내와 자식들과 떨어져 살아야 하며, 남아서 생활비와 교육비를 벌어야 한다. 부모와 자식들이 같이 살고, 기쁨과 슬픔을 나누며, 삶을 같이 영위하기보다는 영어 교육을 위해 어린 시절부터 영어권 나라에 보내려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가정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새로이 정의해야 할 것이다. 부모와 자식, 또는 남편과 아내가 함께 삶을 영위하며, 어린이들이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보금자리로의 가정의 역할이 이 혹독한 경쟁 사회에서는 거추장스런 떨쳐버려야 하는 부담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몸과 마음의 준비가 되었거나 안 되었거나, 외국으로 가고 부모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특히 어떤 경우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에 맡겨지는 경우도 흔하다.
초등학교 학생이 혼자 유학을 가는 경우를 주위에서 많이 보았다. 그래야 빨리 크고, 사회에 빨리 적응한다고 보내는 부모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할지는 몰라도 속으로는 걱정을 많이 할 것이다. 걱정을 하면서도 "그래도 이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다. 지금 아이들이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겠지만, 자라서 좋은 학교에 가지 못해서 인간 대접 받지 못하는 것에 비할 바냐. 이렇게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는 이 정도는 참아야지. 남들도 다하는데, 우리 자식만 안 하면, 장래를 망치게 되는데 부모로서 이 정도는 참아야지" 하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을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많은 희생을 치루고 보내는 조기 유학, 그 본래의 목적이 달성될 것인가? 단지 영어 몇 마디를 배우는 것은 쉽게 달성 할 수 있다. 그러나 사고력이나 지식 습득 능력 등의 향상은 오히려 방해받을 수 있고 결과적으로 학업 성취 면에서 실패를 초래할 수도 있다.
많은 부모들이 어린 아이들을 언어 연수를 보내는 이유 중에 하나는 나이가 어릴수록 언어를 빨리 습득하기 때문이다. 어떤 학부모는 영어를 빨리 배우게 할 목적으로 한국 사람이 별로 없는 도시나 학교에 입학시키려 한다. 그래서 다른 한국 유학생들과의 접촉이 단절된 상태에서 원어민 학생들의 학급에서 영어를 빨리 습득하게 한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는 언어 습득에 중요할 뿐더러 사고력과 같은 다른 중요한 능력의 성장에도 중요한 시기라는 점이다. 그리고 아이들의 지식 습득이나 사고력 훈련은 한국어라는 언어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래서 조기 유학을 간 학생이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수업이 영어로 진행되는 순간부터 최소한 1년 정도는 수업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정상적인 지적 능력 발달에 필요한 대화가 정지된다고 봐야한다. 영어라는 언어 습득만을 위해서 다른 능력의 개발이 정지된다면 전반적 지적 능력 발달이나 학습 성취의 하락을 초래하고 결국 장기적으로는 언어 능력 역시 부정적으로 영향을 받게 된다.
경쟁에 지지 않기 위해서 아이를 친구도 없고 문화가 다른 외국 학교에 보낼 수밖에 없는 한국의 현실에서, 정작 한국의 부모들과 아이들은 조기 유학으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이제는 영어 회화 향상과 같은 조기 유학으로 얻는 것들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잃는 것들도 생각해야 한다. 즉 아이의 일생에 영향을 미치는 정서적 불안을 조장하며 지적 능력 발달이나 학습 성취의 공백을 초래할뿐더러 결국 장기적 언어(영어 포함) 습득 능력 저하로 연결될 수 있다. 이제 경쟁에 이기기 위해서 많은 돈과 시간, 정신적 고통을 지불한 사람들이 비록 경쟁에 이긴다 하더라도 그들 역시 종국에는 피해자가 될 것이다.
꼬리 3 : 입시 경쟁에 투자는 실패한 투자
한국의 부모들이 자신들의 자식들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다음 세대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현재 부모들이 시간과 돈, 그리고 정성을 쏟아 부어서 시킨 교육이 한국의 다음 세대에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그들이 성장하여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인가? 부모들이 지불한 시간과 돈 그리고 정신적 비용, 또 아이들이 지불한 모든 비용들이 한국 안의 경쟁뿐만 아니라 외국과의 경쟁에서도 도움이 되는 것인가?
보통 교육은 투자라고 늘 이야기를 한다. 흔히 경제의 논리로 교육을 미래의 더 높은 소득을 위한 투자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교육을 투자로 보는, 그래서 돈으로 모든 것이 환산되는 그런 계산법은 많은 문제가 있다. 그런 계산법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교육을 경제적 관점인 투자의 논리로만 보았을 때 현재 한국의 교육은 건실한 투자인가? 즉 여기서 투자는 어린아이들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자라서 자신의 희망을 펼칠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그런 의미의 투자가 아닌, 미래의 이윤을 위해 현재에 소비를 포기하는 경제적 의미의 투자라고 가정하기로 하자.
그래서 교육은 현재에 시간과 돈과 그리고 동심을 포기한 대가로, 미래의 좋은 학교를 입학하고, 그래서 좋은 직장을 잡아 돈도 많이 벌고 또 사회적으로 대우를 받는 엘리트 계층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돈을 투자하고, 더 많은 노력을 한다고 해서 더 많은 사람이 엘리트 계층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한 사회에서 그 엘리트 계층은 전체의 10에서 20퍼센트로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공작들의 경쟁에서 아무리 수컷 공작이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그 꼬리에 할애한다고 해도, 모든 수컷이 더 많은 배우자를 갖지 않는 원리와 같다. 전체에서 암컷 공작의 숫자는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교육이 한국 내에서 한국인끼리의 경쟁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각자의 소질이나 흥미와는 상관없이 10에서 20퍼센트만 빠져나갈 수 있는 그 관문 통과가 제일의 목적이 된다. 그것이 아이의 능력 개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암기 위주의 교육이 되어도 상관없다. 정답을 가려내기 위한 암기 위주의 공부는 지루하고 지겨운 것이며, 학생들의 능력 개발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공부에 흥미를 가질만한 학생도 공부를 싫어하게 만드는 것이 요즘의 교육이다. 적성에 맞던 맞지 않던 모두가 해야 하니, 공부에 대한 동기 부여도 없이, 단지 낙오하면 안 된다는 공포감으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흥미를 잃게 하는 교육, 공포 분위기 속에서 초인적 인내력을 요구하는 교육, 각 개인 개성이나 특성을 무시하는 일률적 복종심을 강요하는 교육 말이다. 그러한 강압적 교육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은 성장하여 권위에 순종하고, 직장의 상사가 시키는 대로 힘이 들어도 불평 없이 일만 하는, 조직에서 부려먹기 좋은 일하는 기계로 성장할 것이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열심히 하더라도 창의력이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특히 한국 안에서만 통하는 입시 위주의 경쟁에서 성공한 강자라고 하더라도, 창의력과 동기 부여로 인한 열정이 결여되었다면 어떻게 자신의 나라 밖에서도 강자가 될 것인가? 특히 교육에 바친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공작의 꼬리 경쟁에서와 같이 한국에서의 승자가 오히려 그 긴 꼬리 때문에 외국과 비교해서는 약자가 되는 것은 아닌가? 단지 한국의 일류 대학을 나왔다는 사실이 외국에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독창적인 창의력과 일에 대한 열정을 지닌 사람이 많을수록 그 사회는 문제 해결과 발전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아이디어나 제품 개발이 더욱 수월하고 활발해 질 것이며, 그 때문에 그 사회에 밝은 미래를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입시 위주 교육은 경쟁을 위한 경쟁으로 오히려 창의력이나 독립적 사고의 발달을 저해하는 교육이다. 아이들 교육을 장사로 비유한 것이 못마땅하기는 하지만, 사회 전체를 보았을 때,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큰 손해를 보는 장사를 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경쟁을 위한 경쟁에만 유용하고 실질적 도움이 별로 없는 실패한 투자가 될 것이다.
한국의 입시 경쟁은 부모들과 그 자녀들이 가진 모든 것을 바치도록 강요한다.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견디기 힘든 정신적 압박으로 고생하고 있으며 자살이라는 극단의 선택을 하기도 한다. 각 구성원들이 막대한 물질적 정신적 비용을 지불해가며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하는 한국의 교육 경쟁은 승자도 패자가 되어, 사회 전체가 패자가 되는 바로 공작의 꼬리 경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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