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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자는 웃고, 피해자는 울고? 먼저 웃고 엎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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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자는 웃고, 피해자는 울고? 먼저 웃고 엎자! [김용언의 '잠 도둑'] 아지즈 네신의 <일단, 웃고 나서 혁명>
한국의 대중문화가 역사를 되새김질하는 시선에는 아직까지 과도하리만치 비극적인 파토스나 모든 표면을 매끈하게 만들어버리는 달콤한 망각만 허용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임상수의 <그때 그 사람들>(2005년)의 시니컬한 유머는 박지만의 기나긴 소송을 통해, 마치 카프카의 그것처럼 모든 의미가 결국 닳아 없어질 때까지 흩어져버렸다.

반면 김지훈의 '5·18 신파 드라마' <화려한 휴가>(2007년)는 상당한 흥행 기록을 세웠다. 혹은 최근 극장가에서 큰 인기를 모으고 있는 강형철의 <써니>(2011년) 같은 경우 1986년이라는 문제적 시기를 배경으로 시위대와 전경의 격렬한 충동을 소녀들의 패싸움과 병치시키며 불편한 폭소를 이끌어낸다.

<그때 그 사람들>의 냉소와 <써니>의 폭소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웃으면서 질주하여 정면 돌파하기, 혹은 웃으면서 삥 에둘러 돌아가기의 차이일까. 우리에게 허용 가능한 범위는 어디까지이며, 그 테두리는 누가 결정하는가. 터키의 위대한 작가 아지즈 네신의 단편 소설집 <일단, 웃고 나서 혁명>(이난아 옮김, 푸른숲 펴냄)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이다.

▲ <일단, 웃고 나서 혁명>(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푸른숲 펴냄). ⓒ푸른숲
시종일관 낄낄거리며 <일단, 웃고 나서 혁명>을 읽고 난 다음 포털 사이트에서 '터키의 역사'를 검색했다. 그리고 1915년에 태어나 1995년에 사망한 이 작가가 살았던 터키 현대사가 한국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군부 정권, 언론 탄압, 쿠데타, 단독 내각, 종교 갈등, 계엄령의 연속.

이 혼돈의 와중에서 아지즈 네신은 작가이자 활발한 인권 운동가로서 놀랍도록 일관된 행보를 보였다. 옮긴이 이난아의 해설에 따르면, "작품들이 출간되자마자 내란 선동이나 좌익 활동이란 죄목으로 수갑을 찬 그는 대략 250번의 재판을 받았으며", 부르사에서의 유배 생활을 제외하고 5년 6개월간 수감 생활을 했다. 저널리스트이자 작가, 인권 운동가로서 네신은 자신의 삶과 그 삶을 멋대로 재단했던 터키 정권의 역사를 작품 곳곳에 노골적이리만치 투영시켰다. 하지만 촌스러운 직유법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은 구제 불능의 인간 외메르 이장을 다음 선거 때 뽑지 않겠노라 맹세한다. 그 대신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자고 침 튀기며 역설하는 인간다운 인간 누리를 뽑겠다고 결의한다. 하지만 외메르 영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선거 이틀 전 모든 마을 사람들의 약점을 파고든다. 아무개와 소송을 앞두고 있고, 돈이 없어 병원에도 가질 못했고…. 여당 계열의 변호사와 야당 계열의 병원을 능숙하게 줄타기하며 마을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준 외메르 영감은 다시금 이장으로 선출된다.

"투표 결과가 어찌 되었겠는가? 외메르 영감이 이장으로 선출되었다. 누리 씨가 얻은 표는 단 한 표뿐이었다. 우리는 누리 씨 자신의 표일 거라고 생각했다. 누리 씨가 맹세하듯 말했다. '정말로 나는 외메르 영감을 찍었소.' 나중에 외메르 영감이 말했다. '아이고, 누리 씨를 찍은 사람은 나요! 온 마을 사람들이 그 사람을 찍을 거라고 했잖소! 나도 이 마을 사람인데 따로 놀면 안 될 것 같아서, 내 표를 그 사람을 위해 행사했지.' 우리는 '그를 뽑지 않겠다, 뽑지 않겠다!'라고 외쳐놓고도 외메르 영감을 다시 이장으로 뽑아주었다. 우리 중에서 약속을 지킨 이는 외메르 영감, 한 사람뿐이었다." (<우리는 외메르 영감을 뽑지 않겠다>)

지붕 위에 올라간 미친놈은 어서 내려오라는 사람들의 애걸에 "이장 안 시켜주면 뛰어내릴 거예요!"라고 협박한다. 사람들이 엉겁결에 "이장 시켜줄게"라고 약속하자 그 다음부터는 시의원, 시장, 장관, 수상, 왕, 황제를 시켜달라고 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처음부터 "저런 놈들은 내가 아주 잘 알지. 한번 올라갔다 하면 절대 내려오지 않아"라고 구시렁거리던 노인은 "숭고하신 황제 폐하, 1층으로 내려오시지요"라며 미친놈을 결국 지상으로 끌어내린다. 미친놈은 노인에게 "당신도 참으로 미친놈이요. 미친놈만 미친놈을 알아보지"라는 말을 남기고, 노인은 혼잣말을 한다. "아, 지금 내 다리만 온전했어도, 지붕으로 올라갔을 텐데. 그렇게만 되면 아무도 날 아래로 끌어내리지 못할 텐데…."(<지붕 위에 미친놈이 있다>)

이외에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혁명을 일으켰고 잠시나마 정권을 찬탈했던 혁명가, 매일매일 선정적인 거짓 기사를 써대며 인기를 모으다가 처음으로 바른 기사를 쓰던 날 체포되어 투옥된 '민주주의의 영웅' 지역 기자, 두 달 만에 신문사 다섯 곳을 폐쇄한 계엄 정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사복 경찰들 때문에 조용한 마을의 경제를 활성화시킨 민주 투사가 줄줄이 등장했다 사라진다. 이 와중에 아지즈 네신은 넌지시 한 마디 덧붙인다.

"배를 채우면 이렇게 졸음이 쏟아진다. 사람은 잠을 자면서도 살아 있는 상태다. 하지만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산다는 것은 살아 있음을 아는 것, 즉 삶을 의식하는 것이다. 교도소에서 살다시피 한 친구가 있었다. 그는 잠이 들면 바로 꿈을 꾸게끔 자신을 훈련시켰다. 그는 말하곤 했다. '난 꿈을 꾸면서 삶을 연장하는 거야.'" (<악몽>)

정부와 상사와 미국인과 이웃의 평판과 눈치를 살피느라 전전긍긍하는 현실을 살아가면서, '나는 삶을 의식한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꿈속에서 조국의 현실을 미화하고 허풍을 떨다가 결국 모든 것을 망치고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삶의 연장'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이렇게 살지도, 저렇게 죽지도 못하는 삶 속에서 아지즈 네신은 단호하게 올바른 삶의 의지를 보일 것을 재촉한다. 그의 또 다른 책 제목처럼,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

아지즈 네신의 풍자극은 낄낄거림, 픽픽거리는 쓴웃음, 박장대소를 자유롭게 오간다. 고통과 눈물을 직시했던 사람만이 그 전전긍긍의 심정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어떤 형용사나 극적인 장치 없이도 단순명료하게, 결국엔 웃음의 힘을 통해 전달할 수 있다. 아지즈 네신은 이렇게 단언한 바 있다.

"풍자는 세계를 웃음거리가 되는 것으로부터 구제해준다."

라 로슈푸코는 "훌륭한 모사품만이 원품의 졸렬함을 드러내 준다"고도 했다. 참을 수 없이 졸렬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되비치는, 더할 나위 없는 모사품으로서의 소설 <일단, 웃고 나서 혁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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