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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한국에 병원을 지은 진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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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한국에 병원을 지은 진짜 이유는…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19] 일제가 지은 병원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통치하면서 크게 내세웠던 점이 관립/도립의원을 곳곳에 설치하여 조선인들에게 의료 혜택을 널리, 많이 베풀었다는 것이다.

관립의원은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격인 경성(京城)에 있었던 조선총독부의원(1928년부터는 경성제대 의학부 부속의원), 경성의전 부속의원, 철도국 의원들이다. 이 가운데 총독부의원의 전신은 대한제국 시절인 1907년에 세워진 대한의원("근대 의료의 풍경" 53~56회)이다. 대한의원은 대한제국의 돈으로, 그것도 일본으로부터 억지춘향 격으로 거액의 차관을 얻어 설립한 것이었지만 처음부터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일본인의 병원이었다.

일제 강점기 도립의원의 연원은 대한제국기의 자혜의원(慈惠醫院)이다. 1909년 8월 21일 대한제국 정부는 <자혜의원 관제>를 칙령 제75호로 반포했다. 자혜의원의 역할과 성격은 관제에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제1조 자혜의원은 내부대신의 관리에 속하야 빈궁자 질병의 진료에 관한 사무를 장(掌)홈 자혜의원은 필요가 유할 시에는 빈궁자가 안인 병자의 진료함을 득(得)홈
제2조 자혜의원의 진료는 무료로 홈 단 전조 제2항의 경우에는 차한에 재(在)치 아니홈


▲ ⓒ프레시안
요컨대 자혜의원의 기본적인 역할은 빈민 환자를 무료로 진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관제에 명기된 대로 1909년 12월 전주와 청주, 1910년 1월에 함흥에 자혜의원이 세워졌다. 자혜의원은 형식적으로는 내부대신이 관리하는 대한제국의 병원이었지만, 실제로는 대한의원과 마찬가지로 일제와 일본인 의사들이 완전히 장악한 병원이었다.

자혜의원이 가장 처음 세워진 전주, 청주, 함흥은 전통적인 고을로 외부인에 대해 매우 배타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가 그런 곳들에 자혜의원을 세운 데에는 그곳에 거주하는 소수의 (기특한) 일본인들을 진료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겠지만, 자신들이 자부하는 근대의료를 도구로 조선인들의 심장과 뇌수 한가운데로 파고들겠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병탄 직후인 1910년 9월 수원, 평양, 대구 등 10곳에 자혜의원이 설립되는 등, 1943년까지 모두 49개(출장소와 분원 포함)가 설립되었다. 이로써 부산을 제외한 전국의 모든 도시(府), 주요 읍 및 요충지에 도립의원이 자리를 잡았다. 부산에는 이미 일본인이 세운 사립 의료기관이 많았기 때문에 굳이 도립의원을 설립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자혜의원은 1924년까지 총독부가 관장했고 명칭은 대체로 도(道)자혜의원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1925년부터는 소속이 도(道)로 바뀌면서 공식 명칭도 도립의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글에서도 지금부터는 도립의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 전라북도립전주의원(<조선도립의원 요람>, 1937년). 1909년 12월 9일 청주의원과 함께 가장 먼저 세워진 자혜의원이다. 사진 속의 건물은 나중에 신축된 것이다. 1937년 당시 전주도립의원은 내과, 외과(피부비뇨기과 겸무), 산부인과, 소아과, 이비인후과(안과 겸무), 치과 등 진료과를 두었으며 일반 병상 41개, 전염병 병상 26개, 시료(施療) 병상 10개 등 병상 77개를 운영했다. 전주의원의 규모는 전체 도립의원 중 중상급에 속했다. ⓒ프레시안

▲ 강릉도립의원에서 시료 환자를 진료하는 모습(<조선도립의원 개황>, 1930년). 시료 환자는 대부분이 조선인이었다. ⓒ프레시안

▲ 출처 :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 ⓒ프레시안

그림에서 보듯이, 도립의원이 곳곳에 설립되면서 병원을 이용하는 환자 수도 증가했다. (그림에서는 경성의 총독부의원(뒤에 경성제대 부속의원)과 각 지역의 도립의원 이용자를 함께 나타내었다.) 세월이 갈수록 입원 환자와 외래 환자 모두 늘어났고 이 점에서는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차이가 없었다. 다만 예외적으로 조선인 외래 환자가 1920년대에 급격히 줄어든 것은 총독부의 경비 지원이 감액됨에 따라 무료 진료(施療) 혜택이 감소했기 때문이었다.

이 그림을 보면 관립/도립의원을 이용한 조선인 수와 일본인 수는 거의 비슷했다. 1930년대 후반에는 조선인 이용자가 조금 더 많았다. 일제 당국의 선전대로 조선인들이 식민지 통치 덕택에 의료 혜택을 점차적으로 많이 누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누락된 요소가 있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인구 비(比)이다.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수는 일제 강점기 동안 꾸준히 증가했지만 일제 말기에도 조선 전체 인구의 3퍼센트에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병원 이용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인구당 이용자 수를 계산해야 할 것이다.

▲ 출처 :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 ⓒ프레시안

위의 그림은 관립/도립의원 이용자 수를 인구 수로 나누어 얻은 결과를 나타낸 것이다. 인구당 입원 환자, 외래 환자를 비교해 보면 일본인에 비해 조선인 이용자는 사실상 거의 전무했다. 1910년대 무료 치료가 많았던 시절에도 조선인 환자는 일본인 환자의 1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것이 일제가 그토록 내세웠던 조선인들에 대한 의료 혜택의 실상이다. 일제의 관립/도립의원은 그들만의 것이었고 조선인들을 위한다는 것은 생색내기 용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살펴볼 것인바, 주로 조선인들에게 행해졌던 시료(施療)에는 생체 실험의 함정이 내포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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