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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前 문화재청장이 '아이스 쇼'에 도전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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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유홍준 前 문화재청장이 '아이스 쇼'에 도전한다고? [프레시안 books 콘서트] '답사기' 유홍준과 '시골 의사' 박경철
따뜻한 '시골 의사' 하지만 냉철한 분석가의 면모를 동시에 갖춘 박경철. 전 국민적 '답사기' 열풍을 불러일으키더니 문화재청장으로 변신해, 조용하던 공무원 사회에 파란을 일으킨 유홍준. 독특한 인생을 걸어 온 두 사람이 만난다면?

기록적인 폭우로 서울 시내 곳곳에 정체가 생긴 지난 25일 저녁, 서울 종로구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에는 두 사람을 만나기 위해 300여 명의 관객이 모였다. <프레시안> 주말 서평 웹진 '프레시안 books'가 마련한 책과 저자가 있는 행사, '프레시안 books 콘서트' 첫 번째 대화 주인공 유홍준과 진행자 박경철을 만나기 위해서다.


날씨는 궂었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시종 따뜻했다. 한 시간 반가량의 '콘서트'는 마치 박경철이 출연한 바 있고 유홍준이 출연을 앞둔 '무릎 팍 도사'(문화방송(MBC) <황금어장>)를 보는 듯했다. 유홍준 식 입담과 그의 말을 받아치는 박경철의 재치가 긴장과 조화를 동시에 이끌어냈다.

이날 자리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전6권, 창비 펴냄)라는 불세출의 명작을 쓴 작가와 독자와의 대화이자, 같은 대학(영남대학교)에서 교수와 제자로 스치기도 한 두 남자의 '세대 간' 대화이기도 했다. 박경철은 존경을, 유홍준은 격려를 상대에게 표현했다. 다음은 콘서트의 주요 내용.

▲ '시골 의사' 박경철과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프레시안(최형락)

박경철 : 문화재청장 퇴임 이후 한동안 근황을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을 통해 다시 돌아온 감회가 어떤가. 내겐 지금도 '답사기' 유홍준이 문화재청장 유홍준보다 가까운 느낌이다.

유홍준 : 빨리 돌아오고 싶었지만 문화재청장 시절에 숭례문 화재라는 어마어마한 사고가 나고, 죄인으로 떠난 입장이라 섣불리 돌아오기 힘들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노출하는 걸 자제했을 뿐이고 실제론 꾸준히 글을 썼다. 나의 본업인 미술사(史)에 집중했다. 한국 미술사의 통사를 한 번 써보겠다는 욕심이 있어서 일단 그걸 먼저 펴냈다. (<유홍준의 한국 미술사 강의 1>(눌와 펴냄)).

박경철 : 쓰셨다고는 해도 다들 모르실 것 같다. 저도 안 읽어봤다. (일동 웃음) 솔직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백승길·이종숭 옮김, 예경 펴냄) 같은 건 재밌게 읽으면서도 우리 미술사에 대해서는 읽을 이유나 매력을 발견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왠지 재미가 없을 듯한 느낌이 든다.

유홍준 : 피겨 스케이팅 종목으로 치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내게 정규 경기가 아니라 번외로 여는 '아이스 쇼' 같은 거다. 반면 <한국 미술사 강의>는 국제 선수권 대회의 지정 종목인 쇼트 프로그램 같은 거다. 정규 종목이니까 자유롭게 하진 못한다. 통일신라 다음엔 반드시 고려가 나와야 한다. 아이스 쇼처럼 자유롭고 환상적으로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김연아가 국제 대회에서 선전하면서 그의 아이스 쇼도 덩달아 인기를 얻는 것처럼, 내게도 <한국 미술사 강의>를 잘 쓰는 것이 먼저다.

곰브리치 책의 원제는 'The Story of Art'다. 내가 학교 다닐 때 "역사책을 읽으려거든 '히스토리' 말고 '스토리' 들어간 걸 읽어라" 하는 얘길 들었다. '히스토리'는 정통적으로(orthodox) 썼다는 얘기고, '스토리'는 대중적으로 썼단 얘기다. 나는 후자를 지향하기에, <한국 미술사 강의> 책에도 '스토리 오브 코리안 아트(Story of Korean Art)'라고 살짝 썼다. 이 책이 책상에 앉아 읽는 게 아니라 소파에 기대서 읽는 책이 되길 바란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어렵다고 하긴 한다. 궁극적인 목표는 한국 미술사를 아이스 쇼나 갈라 쇼 수준으로 재미있게 소개하는 것이다. 국민들로 하여금 한국 미술사를 통해서 한국 문화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 내 인생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박경철 : 대중 입장으로서 그렇게 써 주시니 감사하단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히트를 치고 나서 생긴 부작용도 있다고 본다. 가끔 부석사에 가면 아이들이 죄다 옆구리에 이 책을 끼고 와서 가이드가 해 주는 말을 볼펜으로 받아 적고 있다. 책의 영향이 워낙 강하다 보니 전 국민이 문화유산을 볼 때 전부 유홍준의 틀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유홍준 : 그런 부작용은 안다.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학고재 펴냄) 때문에) 부석사에 가면 사람들이 죄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선다고…. (일동 웃음) 하지만 교육이란 모방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좋은 것을 모방하고 그것이 축적 되면 그 다음에 자기 것이 생긴다. 내가 제시한 것만을 본다면 문제겠지만, 일단 그것을 따라하는 것이 충실한 생도라고 생각한다. 생전에 나를 귀여워해주셨던 고(故) 박완서 선생님이 과거에 북한 답사기를 냈을 때 추천 평을 써주셨는데, 이에 대한 답을 그 평으로 갈음할 수 있을 것 같다.

"한때 유홍준의 신도였던 적이 있다. 그가 좋다고 말한 곳을 열심히 찾아다니면서 그가 느낀 것과 똑같이 느끼고자 했고, 그가 언급하지 않은 문화재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려했으니까. 이제는 좀 다르다. 그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좋은 것은 좋다고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만큼이라도 독자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우리 것이 우리 마음에 직접적으로 와닿는 것을 방해하던 온갖 잡스런 것을 걷어내준 그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박경철 : 그런데 그걸 뛰어넘는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려면, 끊임없는 관심을 쏟아 부어야만 한다. 그러나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은) 보통 그저 한 번 소비하고 버리는 경향이 짙지 않은가? 왜 우리가 우리 문화유산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까?

사실 '우리 거니까'라는 말로는 잘 설득이 안 된다. 부석사가 멋진 건 사실이지만 이탈리아에 가면 어디든 두 시간 만에 '헉' 소리가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것이기에 더 아름답다고 생각해야 하는 건가?

▲ 유홍준. ⓒ프레시안(최형락)
유홍준 :
나는 우리 것에 대한 아름다움을 강요한 적이 없다. 얼마 전 어떤 분이 "우리 애는 한국의 미엔 관심이 없고 서양 것만 좋아한다"고 털어 놓기에, 그게 정상이라고 말했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걸 좋아하게 놔두어야 한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그것에 대한 기호와 관계없이 나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고 생각한다. 그 때 들여다봐도 늦지 않는다. 강요할 이유는 전혀 없다.

사실 한국 미술사 공부하는 동안 한국 것은 무조건 멋지다는 입장에 반발심이 컸다. 내가 보기엔 별 거 아닌데, "이건 졸작이다"라는 평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더라. 솔직히 은진미륵(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충남 논산시 관촉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불) 얼마나 못생겼나. 그런데 교과서에 실어놓고 아름답다고 극찬을 한다.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누구든 언제나 (우리 것에 대한) 콤플렉스를 겪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갖고 있는 것에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는데, 내겐 그 가치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찾으려고 무척 노력했고 별 볼일 없는 곳에도 찾아갔다. 그러다 보니 내가 지금 21세기 한국에서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느낄 수밖에 없는, 가슴속에 저미는 부분이 있더라.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우리가 21세기 대한민국, 한반도 이남에 살고 있다고 하는 장소성과 시간성은 버릴 수가 없는 거다. 그 아름다움은 또한 서양 미학의 잣대로는 잴 수 없는 것이다. 미의 범주는 엄청나게 넓은데, 우리가 가진 소담스럽고 조용한 것들에 대한 평가는 그 잣대로 불가능했다. 그런 것들을 간직하겠다는 것이 내 마음이었다.

이 책이 처음 나온 건 1993년이었는데 당시 열풍에 대한 원인으로 신문에서는 '마이카(my car) 시대'의 도래를 꼽았다. 자동차의 보급률이 높아져 한 집 당 한 대의 차가 생기게 됐는데 주말에 어디를 갈까 고민하던 사람들에게 내 책이 하나의 지침서가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차를 가진 사람들은 외국에 한 번쯤 구경가본 사람들일 텐데 파리든 뉴욕이든 중심엔 박물관과 문화유산이 있었다. 거길 다니면서 한국에 대해선 너무 모른다는 점을 절감했을 거다. 그래서 '나'를 알아야 한다는 욕구가 함께 일어난 게 아닐까. 누구든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는 법이다.

박경철 : 내가 1964년생인데 유홍준 선생님이 67학번이시다. 분명 우리 세대 땐 말씀하신 부분이 원인이 되었을 것 같은데, 선생님 세대 땐 모든 면에서 서구를 따라가지 않았나. 학문적, 문화적으로 척박한 환경에서도 '모던'에 대한 욕구가 만연한 시대였다. 그런데 그런 주류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학자로서 '소수자'의 길을 걷게 되었나.

유홍준 : 정수일(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 씨가 내게 똑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다. 1960년대 한국의 대학은 모더니즘 일색이었는데 어떻게 민족주의적인 길을 갈 수 있었느냐며 궁금해 하더라. 생각해 보니 그땐 서구를 따라가는 분위기 속에서도 정말 한 줄기 민족주의적인 흐름이 존재했다. '6.3 한일회담 반대 시위'(1964년) 이후 만들어진 '민족주의비교연구회'가 있었다. 그 주변에 김지하가 있었고 조동일이 있었다. 그런 몇 명의 사람들이 일군 영역이 보존되어간 것이다.

▲ 박경철. ⓒ프레시안(최형락)
박경철 :
선생님의 '신상'을 좀 더 털어보겠다. 먼저, 학부 때 미학을 전공하셨는데, 대체 미학이 뭔가. 터무니없는 학문 아닌가. (웃음)

유홍준 : 얼마 전 MBC '무릎팍 도사' 녹화를 했는데, 녹화 시작하자마자 강호동 씨가 하는 질문이 그거였다. 수없이 들은 질문이긴 한데, 꼭 몰라도 될 사람들이 묻더라. (웃음) 게다가 나는 전공도 미술사로 바꿨는데….

미학은 한마디로 미와 예술에 관한 학문이다. 인간의 이성적 사유를 체계화 시킨 학문이 논리학이다. 그런데 18세기 독일의 철학자 바움가르텐이 "인간의 사유 가운데 '감성적 사유'가 있는데, 여기에 대한 학문이 없었다"면서 그 연구를 시작하겠다고 했다. 그게 에스테티카(aesthetica)다. 사실은 감성학 내지는 감성적 인식론이라는 뜻인데, 그게 미학으로 번역되어 들어온 거다. 감성학을 골치 아프게 '미학'이라고 해놓으니까 우리가 그 뜻을 제대로 몰랐던 거다. 이성적 논리학이 최고 형태로 현현하는 것이 진리라면, 감성적 인식론의 최고 형태는 바로 아름다움이다. 따라서 감성적 인식론은 아름다움에 관한 학문으로 바뀌게 된다.

그 아름다움은 관념적으로 존재하기도 하고, 인위적으로 표현되는 것이기도 하다. 후자가 바로 예술이다. 나는 애당초 관념적인 미나 철학과는 관계가 없고, 예술 가운데서도 철저하게 실재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어서 미술사로 전공을 바꾸게 됐다. 처음엔 서양 미술사를 따라가면서 관련 책을 번역하기도 했지만, 하면 할수록 왜 우리 미술사엔 재미있는 책이 없는가 고민하게 됐다. 그게 궁금해서 알아보려고 발을 들였다가 아직 못 나오고 계속 공부하는 상황이다.

박경철 : 말씀을 들으니 나도 선생님 밑으로 들어가서 미술사를 배웠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제 전공 외의, 대학 시절 얘기를 해 보자. 무기정학도 당했고 수감된 적도 있었다. 순탄한 대학 생활은 아니었는데.

유홍준 : 내가 그때 너무 천진해서 당했다. (웃음) 60년대엔 (대학에서) 해마다 '4·19 선언'을 했다. 학생회 애들이 시국 선언 비슷하게 하는 거다. 그런데 1969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해 나가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4·19 선언' 준비하는 놈들은 중앙정보부의 관심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어떤 선배가 이번엔 당일 선언만 하지 말고 하루 전에 초혼제를 지내자고 해서, 내가 그걸 주도했다. 바로 찍혔지. (웃음) 이후에도 나는 미술사 공부하려고 마음먹었는데 자꾸 정치적 사건에 얽혀서 결국 감옥도 갔다. 교과서 말이 맞다. 친구 잘못 만나면 안 되는 거다. (일동 웃음)

박경철 : 이후 전공을 미술사로 바꾸고, 미술 전문 기자와 미술 비평가로 활동하다가 비평가상도 받았다. 그런데 비평가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전통문화에 대해 '진화'의 관점을 내세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 얘기를 실제로도 주창해 온 걸로 알고 있는데, 사실 우리 입장으로선 전통문화가 '전통'문화인 만큼 (고정된 어떤 것을) 계승한다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다시 말해 전통문화를 어떻게 개혁할까, 아리송하다.

유홍준 : 우리는 보통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엇으로 전통의 본질을 이해한다. 그러나 전통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변한다는 데 있다. 변하지 않는 전통은 전통이 아니다. 시대 상황에 맞게 새롭게 변해가기 때문에 비로소 이어지는 것이 전통의 본질이다. 이렇게 전통을 본뜻에 맞게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그 본질을 잘 알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저 수동적으로 전통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것을 이어가지 못한다.

우리가 쓰는 한문의 발음은 옛날 중국으로부터 받은 거다. 당·송대 때 발음을 우리가 그대로 쓰고 있다. 산이니 강이니 하는 것들이 바로 중국의 고어다. 하지만 정작 중국인들은 다른 발음을 쓰고 있지 않은가. 전래받은 것은 못 바꾸지만 그 나라의 '전통'이야말로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프레시안(최형락)
안동에 사니 아는 얘기겠지만 안동에선 제사를 엄청나게 중요하게 여겼다. 과거에 퇴계 이황 등 절대로 위패를 옮길 수 없는 분들의 불천위 제사를 지낼 적에는 그 지방의 문중들이 다 모였다. 한 300명 쯤 왔다. 그런데 다 서울로 가 버리면서 30~50명 밖에 안 오게 됐다. 제삿날이 음력으로 돌아오잖나. 그게 화요일일지 목요일일지 모르니 올 수 있는 사람이 적었던 거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고집쟁이 양반 집안에서 불천위 제사를 당일이 아닌, 그 주 토요일 저녁에 지내도록 했다. 그랬더니 다시 100명, 200명으로 참석자가 느는 추세다. 본뜻을 살리기 위해서 변화를 주었더니 오히려 전통을 살릴 수 있었던 거다.

이런 예도 있다. 워낙 종갓집 보존에 관심이 많아서 문화재청장 되기 전부터 '전국 맏며느리 사무총장 협의회'를 만들 생각까지 있었는데, 문화재청장 된 뒤에도 기억에 남아 '맏며느리 간담회'를 열었다. 60명이나 되는 맏며느리들을 만나 애로사항을 들었다. 거기서 "제사상에 전을 빼면 일이 반으로 줄어들지 않겠냐"는 의견이 나왔다. 그랬더니 어느 집 맏며느리께서 "우리집은 할배 때부터 없애부렀어예" 하는 거다. 그랬더니 다른 한 분도 "우리집도 안 부처예. 대신 피자를 올려예. 그랬더니 손주들이 좋아해예" 라고 거들었다.

얼마나 좋은가. 제사가 갖고 있는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형식을 바꿔가는 거다. 개선할 건 개선하고 폐지할 건 폐지하면서 굴러가는 게 전통을 계승한다는 것의 진짜 의미다. 그런 전통에 대한 오해 내지는 이해 부족이, 문화재를 지키는 데 어려움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박경철 : 청와대에서 문화재청장직을 맡기게 된 것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때문일 텐데, 이 책은 처음에 어떻게 해서 쓰기 시작했나?

유홍준 : 그 책은 인생이 스케줄대로 안 된다는 사실을 정확히 보여준다. 전혀 예정에 없던 것이다. 학업을 마치고 <계간 미술> 기자를 하던 중, 어떤 대학교의 교수 채용에 응모했다가 잘 안 됐다. 면접을 보러 갔는데 신원을 조회해보니 '징역 10년을 언도받고 사면되었으나, 복권이 되지 않은 자'여서. (웃음) 그래서 다시 회사로 들어갈까 하다가 엎어진 참에 쉬어 가자고, 평론가로 살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름만 평론가지, 사실상 백수였다. (웃음)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 : 인생도처유상수>(유홍준 지음, 창비 펴냄). ⓒ창비
그때 마침 주변에서 민중미술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고, 어쩌다 나도 신촌에 있는 '우리마당'에 '젊은이를 위한 한국 미술사'라는 포스터를 붙여 놓고 강의를 시작했다. 꽤 많은 학생들이 왔는데, 8주 단위로 두 번째 하다가 사설 강습법 위반으로 또 걸렸다 (웃음) 아무튼 그때 학생들을 데리고 현장에 일일 답사를 가곤 했는데, 그 중엔 이철수(판화가)와 박재동(만화가)도 있었다. 그 버스 안에서 나온 얘기들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된 것이다.

한길사에서 나오던 <사회와 사상>이란 월간지가 있었다. 그 월간지가 폐간되자 진보적 학자들이 쓸 지면이 없어졌다. 이들이 모여서 <사회 평론>을 창간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그래서 나는 "교수만 해 본 놈들이 회사를 물로 아는구나" 하고 말리러 다니다가 덜컥 문화 담당 편집위원이 되었다. (웃음) 그래서 거기에 뭔가를 써야 하는데, 아무래도 재밌는 얘기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싶었다. 주변에서도 학생들 데리고 답사할 때 버스에서 했던 얘기를 쓰면 어떻겠냐고 하더라. 원고료는 안 받는 대신 반드시 80매를 내 주고 고치지 않겠다는 전제 하에 쓰기 시작한 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다.

ⓒ프레시안(최형락)

박경철 : 이제 문화재청장 시절 얘기로 넘어가자. 공무원이 된 건 솔직히 참 뜻밖이었다. 학자와 관료는 하는 일이 참 다르지 않나. 또 청장 하면서 언론으로부터 불편한 얘기도 많이 들은 걸로 안다. 그 절정이 숭례문 화재 사건이었는데, 그간의 소회를 여쭙고 싶다. 학자로서도 도움이 되는 좋은 경험이었나, 그 반대였나.

유홍준 : 개인적으로 이미지를 관리하는 차원에서라면, 안 했어야 하는 일이다. (학자가) 공직에 나가면 손해고 시끄러우면 더 손해니까. 그래도 결국엔 맡아서 고생을 했다. (웃음)

노무현 대통령 취임하고 청와대 인수위원회에서 나를 찾아와 문화재청장을 맡기고 싶다고 말했다. 당시 문화재청장은 1급 공무원이 맡고 있는데, 이걸 차관급으로 바꿔서 전문가에게 자리를 내 주려고 한다며. 나는 고사했다. 한다면 차라리 국립중앙박물관장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유는 박물관은 동산, 문화재는 부동산이기 때문이다. 동산은 여러 큐레이팅을 통해 미술사적인 실천이 가능하지만, 부동산은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관리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랬더니 그쪽에서 "그렇기 때문에 당신에게 부탁하는 것"이라고 하더라.

실제로 내가 청장이 되고 나서 했던 게 문화재 관리에 큐레이터십을 적용하는 것이었다. 경회루 등 갇혀 있던 문화재를 일반인들에게 개방하고, 국제 행사 만찬장으로 활용했다. 또 전국의 가치 있는 문화재들을 찾아 내 국보, 보물,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아무리 뛰어난 문화재라도 과거에 신청한 것들만 국보 혹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더 가치 있는 문화재들이 숨어있던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정말 원 없이 일하고 원 없이 터졌다. (웃음) 그런데 내가 잘못해서 터진 건 몇 개 안 되고, 노무현 정부에 흠집을 내기 위한 공격이 많았다. 그 바람에 문화재청의 인지도는 엄청나게 올라갔다. 요즘은 조용하잖나. 책 관련해서는 독자들을 만나는 기회라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이지만, 청장 그만둔 뒤로 청장 경험과 관련해 쇄도하는 인터뷰 요청은 다 거절했다. 나는 권력 있는 사람, 혹은 거룩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애당초 없었다. 상처는 적잖이 받았지만 끝내는 사람들이 내가 옳았음을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기에 따로 '이미지 관리'는 하지 않았다.

ⓒ프레시안(최형락)

박경철 : 요즘 아침에 서울 시내 호텔에 가보면 CEO(최고경영자)들이 인문학 강좌 듣겠답시고 줄을 서 있다. 막상 강의 들어가서는 다 졸더라. 여기 와 있는 분들도 사실 좀 이상하다. 일생에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나. (웃음) 요즘 부는 인문학 열풍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유홍준 : 삼성전자에서 강의를 해 달라며 나를 찾아온 적이 있다. 왜 찾아왔냐고 했더니 전자 제품이나 반도체 생산 과정에서도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거다. 직원들도 기계공학과 출신만 뽑는 게 아니라 심리학, 역사학, 인류학 전공자들도 뽑아 같이 일한다고 하더라. 소비자가 무엇을 좋아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인문학적 통찰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그래야 결국 제품의 질도 더 높아진다고 하더라.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세계 주요 20개국(G20)에 들었지만, 그 안에서 이탈리아 같은 나라들을 꺾을 수 있겠나. 우리에게 그런(인문학적) 뿌리가 없다는 사실을 이제 와서 알게 된 거다.

여기서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게 있다. 그동안 우리가 인문학적 연구 성과가 없었던 게 아니다. 대중에게 전달이 안 됐던 거다. 알기 쉬운 '이야기'로, 또 독자들이 원하는 형태로 생산해내지 못했던 게 이유다.

나는 늘 전기(biography)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우리나라는 전기 전통이 너무 약하다. 서양의 베스트셀러는 전기 문학이 차지한다. 하지만 우리는 존경하는 이들의 전기조차 가져본 적이 없다. 전문가들끼리 통하는 얘기가 아니라 일반인들도 감화할 수 있는 전기가 필요하다. 전기엔 인물의 삶과 학문, 예술, 삶 속의 정치 이야기와 그가 중요한 순간에 어떤 선택을 했는가가 다 들어 있다. '인간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삶의 모델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출판에 전기의 전통이 살아나야 과거, 그리고 사람과의 교감이 가능해진다고 본다.

그래서 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목표가 생겼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화가 20명의 전기를 쓰는 일이다. 그 첫 결과물이 <화인열전>(전2권, 역사비평사 펴냄)이다. 거기서 여덟 명을 다루고 아홉 번째로 쓴 것이 <완당 평전>(전3권, 학고재 펴냄)이었다. 그런데 이제 박수근 전기도 써야 하고, 동시대 민중미술 작가인 신학철의 전기도 써야 할 의무가 있다. 계속 해나갈 것이다.

박경철 : 그러고보니 우리가 <목민심서>는 자주 들어봤어도 정약용의 전기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없다는 생각에 미친다.

유홍준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에 보면 선조가 율곡 이이에게 매월당 김시습의 전기를 써오라고 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 전기가 요즘 A4 용지로 치면 세장 정도다. 그 속에는 매월당의 일생뿐 아니라 율곡의 평가까지 들어가 있다. 이이는 김시습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세상의 쓰임을 받지 못했다며, "재주가 그릇 밖으로 흘러넘쳐 스스로 수습할 수 없었던 것 아니면 그의 기상이 맑기는 해도 무게가 모자란 것 아닌가 생각된다"고도 썼다. 어떻게 보면 논쟁적이란 얘긴데, 임금이 이런 인물에 대해 써 오라고 할 정도로 전기 문화가 강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연암 박지원 쓴 '열녀 함양 박씨전'이라는 천하의 명문이 있다. 거기에 어느 과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사람이 선조 중에 과부가 있어서 청직에 나가는 길이 막혔다는 얘기를 듣고 한 과부가 자기 아들에게 동전을 하나 꺼내더니 이렇게 말한다. 이 동전 끄트머리가 마모돼있고 글씨가 다 사라져 있는데, 왜 그런 줄 아느냐, 나도 널 키우다가 과부가 되었는데 내 몸인들 욕정에 뒤척이지 않겠는가, 그럴 때마다 그걸 달래기 위해 동전을 쥐고 몇 번이나 돌리다 마음이 가라앉으면 잤다. 이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일종의 전기다. 비록 평범한 사람이긴 하나 이 얘기 속엔 그 당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육체적, 정신적 고뇌가 담겨 있다.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박경철 지음, 리더스북 펴냄)도 마찬가지 아닌가. 여러 사람들의 전기인 셈이다. 많은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 독자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다.

박경철 : 감사하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유홍준 : 현재 <월간 중앙>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계속 연재 중이다. 다음번에 묶여 나올 7권은 제주도 문화재에 대해서만 다뤄질 것 같다. 8권에선 경기도와 충청북도의 문화재에 대해, 9권에선 중국, 일본 다니면서 한국인 입장에서 본 문화재와 교류의 흔적에 대해 이야기 할 계획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갈라 쇼'에 해당하는 '국보 순례'가 8월에 책으로 묶여 나온다. 미술사의 전도사로서 정규 종목, 아이스 쇼, 갈라 쇼 모두 체력이 닿는 데까지 하겠다.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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