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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나경원에게 이 책을 권한다!

[프레시안 books] 박기호의 <산 위의 신부님>

천주교 신부 박기호가 책을 냈다. <산 위의 신부님>(휴 펴냄).

많은 종교인은 자신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떠들지만, 늘 자기들끼리만 모여 있다. 그들끼리 말하고 듣는다. 그들과 밖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높은 담이 있다. 가끔 담 밖의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기도 하지만, 대체로 '예수 천국, 불신 지옥' 수준이다. 종교(宗敎)의 말뜻은 '으뜸 가르침'이지만, 종교인의 꽉 닫힌 자폐적 언술은 그 담으로 들어가는 신도의 무리를 제외하곤 누구도 가르치지 못한다.

박기호의 책은 다른 방식으로 담을 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쉽게 읽힌다. 강요하거나 억지로 짜내려고도 하지 않는다. 천주교에서만 쓰는 몇몇 용어가 가끔 거슬리기도 하지만, 아무런 종교적 배경이 없는 사람도 쉽게 읽을 수 있다. 박기호는 세상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일을 했다거나, 박노해 시인의 형이라든가 하는 경력이 따라붙기는 했지만, 박기호는 그래도 평범한 신부였다. 남들처럼 주교의 인사 명령에 따라 여러 성당을 돌아다니며 일했다. 그 일이란 게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다는 목자의 일이라 만만치 않았겠지만, 박기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거의 모든 것을 두고 훌쩍 떠났다. 그가 두고 떠난 것 중에는 했던 일, 적당한 크기의 명예와 존경, 그리고 경제적 이익과 생활의 편리 같은 것도 있었다.

시작은 '예수살이 공동체'였다. 예수살이 공동체는 '지상에서 천국처럼' 살겠다는 이들의 모임이다. 도시에서는 대안 운동을, 농촌에서는 공동체 마을을 주창했다. 그 마을이 소백산 자락에 있는 '산 위의 마을'이다. 충청북도 단양군 가곡면 보발리. 박기호는 5년 반 전부터 이 마을에 정착해 살고 있다. 박기호는 산촌 생활을 하면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꼼꼼하게 기록해왔다. <산 위의 신부님>은 이 기록을 모은 것이다.

▲ <산 위의 신부님>(박기호 지음, 휴 펴냄). ⓒ휴
박기호가 신부가 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남들은 신부가 되고도 몇 년쯤 더 지났을 나이에 신학교에 입학했다. 제 때 신부가 되지도 못했다. "신학교의 전설로 묻혀 있다"(30쪽)며 슬쩍 넘어가지만, '사형 선고처럼 느껴'지는 일이었다. 공황 상태에 빠졌고 정신적 고통은 곧 몸으로 전해졌다. 허리와 눈이 엉망이었다. 몸이 부서져 버린 느낌이었다.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었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에이, 그냥 죽자!"고 맘 먹었다. 아픈 것 무시하고 땅 파기, 염소사 치우기, 나무 심기 등 몸을 학대하다시피 노동에 전념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몸은 가벼워졌고 시력은 돌아왔다. 딱 일주일만의 일이다. 박기호는 "다친 마음의 상처를 자기 치유하는 힘은 몸을 쓰는 노동에서 나온다"는 걸 깨달았다.

산촌에서의 공동체 생활은 이런 깨달음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농사를 기본으로 하는 노동 공동체를 꾸렸다. 정직하게 몸을 써야 한다는 생각에서 산위의 마을에 들어갈 때도 걸어갔다. 서울에서 충북 단양까지 5박 6일의 일정이었다. 일부러 고행을 자처했다. 걸으면서 다리가 경직되어 절룩거렸지만, 그럴수록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리의 경직은 스스로 풀렸다.

박기호는 그렇게 떠났다. 성당 일이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같은 이런저런 인연을 두고 떠났다. 왜 하필이면 공동체일까. 힘들었지만 정말 애쓰며 살아왔다(48쪽)면서, 이렇게까지 과감하게 자신의 모든 존재를 옮겨야 했을까.

"다른 삶이 필요한 건 분명한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한 답을 낼 자신이 없다. 딱히 할 일은 보이지 않고 뭔가는 해야겠고, 그래서 공동체 운동이라도 하는 거다!"

다만 뭔가라도 하잔다. 정직한 태도라 좋지만, 공동체 설립자의 말 치고는 너무 소박하다. 하긴 박기호는 생긴 것부터 소박한 사람이다. 책을 읽으며 소비 사회의 흐름을 거스르는 노동 공동체도 좋은데, 왜 하필이면 천주교 신자들만의 공동체인지 궁금했다. 혹시 그들만의 공동체, 또 다른 담을 쌓는 일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왜 공동체 중심에 신앙이 자리 잡고 있는지, 박기호의 육성이 궁금했다. 그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며, 그가 꺼낸 화두는 역시 '중심'이었다.

"공동체로 살아가려면 중심성이 있어야 하는데, 신앙이 그 중심으로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념이 확고한 사람들이야 괜찮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중심이 없으면 쉽지 않아요. 살아남은 공동체들도 대부분 신앙이라는 중심을 통해 공동체적 영성을 축적한 것들이잖아요.

저희가 꼭 천주교 신자만 받아들이는 건 아니에요.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요. 종교를 강요하진 않아요. 원하는 사람은 천주교 신자가 되기도 하고, 아닐 수도 있지요. 우리 공동체는 선교를 위한 모임이 아니라, 부족한 사람들이 '함께 살기' 위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 식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방법으로 사는 거지요. 누구든 차별하거나 배제할 생각은 없어요."


박기호의 중심은 그를 공동체로 이끌었지만, 새로운 가르침을 일깨우는 예언자의 풍모나 수천, 수만 마리의 새떼를 끌고 가는 향도(嚮導)의 면모도 찾기 힘들다. 신앙이라는 중심이 공동체와 어떻게 만나는지에 대한 그의 고백이다.

"신앙인은 지금 자신의 확고한 생각을 정화의 불길에 태워볼 필요가 있다. 금도 강철도 그렇게 제련된다. 내가 추구하는 공동체 마을도 꼭 필요하다면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이루어질 일이고, 아니라면 애만 쓰고 망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 되거든 '부르심으로 믿고 헌신적으로 노력했는데 내 소명은 아닌 것 같더라' 하고 물러서면 그만인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이해하는 '기도의 정화'이다."

이런, 아님 말고 식의 허술함이라니. 금과 강철처럼 태워보라더니, 결국은 '아님 말고'로 귀결된다. 그렇다고 무책임한 도피는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더욱 강하게 벼르기 위한 내어줌이다. 신앙인이라지만, 그 안에 신이든 뭐든 꽉 차 있으면, 그가 믿고 따르겠다는 신마저도 그 안에 들어가긴 힘들겠다. 기도(祈禱)는 입이 아니라 귀로 하는 작업이다. 곧 자신이 신앙하는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분의 뜻을 좇고자 노력하며 자신을 내어 놓는 과정이다. 박기호의 기도는 이런 면에서 기도의 원래 모습에 가까이 가 있다. 최선을 다해 달려보지만, 실패하면, 그동안의 고생이 좀 아깝기는 하지만, '내 소명은 아닌 것 같더라며 물러나면 그만'이란다.

박기호는 산골 생활에서 배우고 익히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제초제나 화학 비료를 쓰지 않는 농사를 땅에서,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서 배웠다. 면 소재지 앞 이발소 홍 사장과의 만남이 그렇다. '단양군 해병전우회 기동 대장'이기도 한 홍 사장은 자신의 업소에서도 거리낌 없이 보수 우익적 색깔을 드러낸다. 한편으론 봉사 활동을 소명처럼 여기며 단양 일대에 사건 터지는 곳마다 쫓아다닌다.

"홍 씨를 볼 때마다 나는 사제로서 얼마나 믿음에 투철하게 일상 속에서 복음을 선포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한다. 또한 내가 진정으로 진보 진영에 속하는지도 묻는다. 비평하는 사유만 날카롭고 행동하는 실천에서는 무기력한 '신념의 노화'가 진행 중인 것은 아닌지 질문한다."

송아지가 태어날 때도 배우고, 사람이 들어와도 배우고 떠나도 배운다. 축대를 쌓을 때도 제각각 다른 쓸모를 지닌 크고 다른 돌을 보면서 배운다. 배움은 끝이 없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세상과 이제 막 대면한 어린아이처럼 배운다.

아무리 배우는 게 많다고 해도, 누구나 박기호처럼 살 수는 없다. 훌쩍 떠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도 아니다. 그래도 박기호는 산위의 마을로 부지런히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설령 실패해도 한번 시도라도 해보자는 거다. 노력마저 포기할 수는 없다는 거다. 산위의 마을은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공동체 생활이 주는 기쁨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주고 있다. 마을에 들어왔다 얼마쯤 살다 나간 열 가구 중에서 두 가구만 빼고는 모두 농촌에 정착했단다. 꼭 산위의 마을이 아니라도, 공동체 생활이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거다. 그래서 사람들이 조금씩이라도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들여다보고, 조금이라도 더 자신을 사랑하게 되면 그만이라는 거다.

박기호의 공동체 생활에서는 잘 사는 것과 함께 잘 죽는 것도 중요하다. 김진룡, 이태석 같은 동료 신부들의 죽음을 보면서 다시금 생사관을 확인한다. 결국은 순명(順命)에 달려있다.

"무엇보다 치유는 건강을 잃었을 때의 문제이고, 근본 해답은 건강한 몸으로 사는 것이다. '목숨은 하늘에 달렸다'는 진리를 숭상하고, 살아있는 순간을 선물로 고백하면서 건강을 잘 돌보아야 한다. 서로 섬김으로 하늘의 부르심에 순명하는 생활이 곧 건강한 삶이다."

죽음에도 격이 있단다. 박기호는 중환자실에서 절대 죽고 싶지 않고, 기품 있는 죽음을 맞고 싶어 한다. 인명재천(人命在天)이니, 소망처럼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누구나 스콧 니어링처럼 상수(上壽)를 누리다 단식으로 생을 마감할 수는 없을 거다. 그래도 준비는 필요하다. 박기호는 '선종(善終)의 은혜를 구하며'라는 유서를 통해 생의 마무리, 곧 더 잘 살기 위한 준비를 매일처럼 반복하고 있다. 박기호의 고백이다.

"그 순간이 왔을 때 아쉬움에 울지 않기 위해서, 저는 살아 있는 동안 믿음과 사랑으로 열심히 생활하겠습니다."

모처럼 배울 게 많은 책을 만났다. 자신을 고스란히 드러내되 겸손하고, 사람 사는 생동감이 넘친다. 좋은 책이다. 대안, 그리고 진정한 진보를 고민하는 모든 분들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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