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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마조히즘은 '인간'만이 누리는 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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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마조히즘은 '인간'만이 누리는 특권! [김용언의 '잠 도둑']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비터문>
20대 초반,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비터문>(1992)을 비디오대여점에서 빌려 보았다. 아무런 사랑의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비터문>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열렬한 사랑이 곧 치욕과 증오로 변해가고, 종국엔 지배할 수 있는 노예를 원한다는 오직 그 이유만으로 서로를 놓아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 비극. SM 관계라는 걸 영상에서 처음 접했고, 영화를 다 본 다음 스톱 버튼을 누를 때까지도 나는 약간,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던 것 같다.

오랜 시간이 지나 <비터문>(함유선 옮김, 그책 펴냄)을 소설로 다시 읽게 됐다. 저자가 파스칼 브뤼크네르라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에세이집 <순진함의 유혹>(김웅권 옮김, 동문선 펴냄)으로만 알고 있던 이 작가는 훨씬 더 풍성하고 윤기 나게, 미친 사랑(amour fou)에 냉혹한 질서를 부여하는 능수능란한 창조주로서 자신의 세계를 관장한다. 일단 <비터문>을 집어 들고 몇 장 넘기다보면, 5일에 걸쳐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는 '세헤라자데' 프란츠의 악마 같은 음성에, 그리고 프란츠를 뒤에서 조종하는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냉소에 사로잡히지 않을 도리가 없다.

문학교사 디디에와 이탈리아어 교수 베아트리스는 5년 동안 동거하며 서로에게 충실했다. 인도 여행을 오랫동안 계획하고 마침내 실행에 옮기게 된 날, 두 사람은 무척 들떴다. 배 위에서 두 사람은 기이한 부부 프란츠와 레베카와 마주친다. 배 안의 남자들 모두를 욕망으로 타오르게 할 법한 관능적인 아가씨 레베카와, 나이 많고 추하고 휠체어에 의존하는 반신불수 프란츠는 너무 이질적인 존재다. 레베카는 디디에를 유혹하는 듯하다 다음 순간 비웃으며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즐기듯 이를 관찰하던 프란츠는 디디에에게 레베카의 모든 것을 알려주겠다며 기나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 <비터문>(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함유선 옮김, 그책 펴냄). ⓒ그책
프란츠와 레베카는 버스 안에서 처음 만났다. 막 의사 시험에 합격한 중산층 출신 프란츠는 북아프리카 출신의 아랍계 유대인인 미용사 레베카의 아름다움에 심장을 송두리째 뺏긴다. 둘은 세상과 단절된 채 오로지 서로의 육체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냈다. 성적 환희를 얻기 위해서라면 SM 관계를 거리낄 이유가 없었고 상대방의 배설물마저 먹음직스러운 성찬이었다.

그러다 피할 수 없이 권태가 찾아왔고, 사랑은 증오와 악의로 바뀌었다. 파멸의 몇 단계를 거친 끝에 프란츠는 반신불수가 되어 레베카의 손끝에 좌우되는 존재가 되었다. 5일 밤에 걸친 프란츠의 기나긴 고백이 끝나갈 무렵, 네 명의 남녀 사이에 고조되던 긴장과 적대감은 끔찍한 사건으로 귀결된다.

사랑의 순결함과 진심의 영속을 믿는 사람이라면 <비터문>은 압도적인 공포와 경멸로 다가올 것이다. 사랑의 시작과 전개와 끝장나버린 이별의 과정을 낭만적으로 들려주는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정영목 옮김, 청미래 펴냄)라든가 영화 <500일의 썸머>(2009)을 보면서 '나도 연애의 비극을 잘 알지'라며 어깨를 으쓱한다면 오산이다. <비터문>은 "사랑을 너무도 성스럽게 생각해서 성교나 남색이나 오럴섹스 같은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짝짓기는 동물을 위한 것이며 "일탈행위만이 인간적인 것"이라고 믿었던, "성교를 할 때마다 매번 인생을 내기에 건 것" 같이 느끼는 남녀가 겪은 어떤 열정/수난(passion)의 '신곡'이다.

논픽션 작가 대니얼 버그너가 각종 성적 일탈 행위를 추적한 르포집 <욕망의 유령들>(최호영 옮김, 미래인 펴냄)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에스엠(SM) 공동체에도 나름의 기준과 원칙이 있다. '안전하게, 제정신으로, 합의에 의해.'" 그리고 바로 뒤이어, 뉴욕 SM 공동체의 주도적인 인물인 R 영주가 경멸을 숨기지 않은 채 내뱉는다.

"안전은 한계를 의미하죠. (…) 제정신은 또 뭐랍니까?"

이 공간에 둘만 있기 때문에,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안전한 선' 너머의 세계를 엿보았기 때문에, '잠자는 미녀'가 왕자의 키스로 깨어났기 때문에, 프란츠와 레베카는 R 영주의 충실한 추종자인 것처럼 외설을 인정함으로써 외설을 뛰어넘고자 하는 시도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완벽하게 서로에게 사로잡히고 얽매인 관계, 그건 결국 나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뜻이다. 타인의 육체에서 얻는 즐거움은 세상과 나를 단절시키기 위해 택하는 탈출구이며, 어린애나 동물이 할 법한 뜻 없는 옹알이로 사랑을 표현하는 행위는 "우리가 쓰는 언어로는 (감히 이 감정을) 표현하지 못 한다"는 나의 허영심이며, 사디즘적인 방식으로 내 침대를 지배하는 연인은 기실 "갑작스런 변화로, 놀랄 만한 창의력으로 나를 사로잡고" 나를 끊임없이 놀라게 해야 한다는 '나의' 요구의 희생물이다. 연인과의 사랑이 권태로 바뀌는 순간 심리적‧육체적 가학 행위는 나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두 번째 착각. 애당초 디디에가 레베카에게 낭만적인 육욕을 품고 접근하는 것은, 프란츠와는 아주 다른 방식이다. 디디에는 그때까지 아무런 의심 없이 사랑하던 연인 베아트리스를 배 안의 남자들을 애타게 만드는 레베카와 비교하면서 불현듯 경멸을 느낀다. "어쩌다 나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여자를 애인으로 두었을까?"

타인의 시선에 의거하여 연인의 규정을 내리기 시작한다면, 그는 그때부터 타인의 시선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 자신의 내면과 시선은 텅 빈 채, 디디에는 프란츠의 악마 같은 입술에, 레베카를 탐하는 프란츠의 눈에, 놀랍도록 힘이 센 프란츠의 손아귀에 붙들린다. 프란츠와 레베카의 사랑이 결국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힌 순진함이었다면, 디디에의 어리석음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그것이 마치 자신의 욕망인 양 착각했다는 것이다.

▲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비터문> 중 한 장면.

다시 말해 <욕망의 유령들>에 나오는 표현처럼 "개인을 순수하게 몰아대는 욕구, 예리하게 고양된 성적 굶주림, 평범한 욕망과 성행위로는 뇌가 흐릿해지고 불수의적인 외침이 터져 나오는 오르가슴의 순간에도 결코 완전히 도달할 수 없는 의식의 소멸, 통제의 진정한 부정, 자아의 말소(…)에 대한 월등한 재능"이자 "황홀경에 빠지는 능력"을 감히 갖고 있지도 못하면서 그 경계선 너머를 훔쳐본 것에서 어리석음의 비극은 시작된다. 그는 감당하지 못할 것을 욕망했고, 자신이 마땅히 받는 처벌에 대해 납득하지 못했다. 신비로운 동양에 동경을 품었듯, 그는 레베카라는 놀라운 존재를 차지했던 프란츠의 욕망을 흉내 낸다.

결말은…환상 속의 인도는 '동양'이라는 이름의 감옥으로, 허니문은 '비터문'으로, 침대 위에서 연인의 배설물을 게걸스럽게 받아먹던 순교자는 "극도의 악행을 추구하다가 실패를 확인하고는" 망연자실해진 범인(凡人)으로, 소르본느 대학교 도서관에서 책더미에 둘러싸인 채 사랑을 속삭이던 연인들은 독창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회색 양복의 검은 넥타이처럼 아주 잘 어울리는" 커플로 조롱당한다. 종국에는 토드 브라우닝의 무시무시한 걸작 <프릭스>(1932)에 나올 법한 결말까지, <비터문>은 모든 종류의 전락을 완벽하게 전시한다. 그렇게 꿈의 이국으로 향하던 배 안에 들끓던 엔트로피는 결국 모두를 '열사' 상태로 이끈다. 사랑으로 인해 삶이 송두리째 바뀐 네 남녀는 평생 절뚝거리며, 그 사랑을 저주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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