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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를 죽인 건 십자가와 말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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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를 죽인 건 십자가와 말뚝이 아니다! [김용언의 '잠 도둑'] 브람 스토커·레슬리 s. 클링거의 <주석 달린 드라큘라>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의 시작은 이러하다. 변호사 조너선 하커는 의문의 고객 드라큘라 백작을 만나기 위해 트란실바니아로 건너간다. 그는 어느 순간 드라큘라 백작이 '인간'이 아님을 깨닫고, 백작의 성 어딘가에서 홀연히 등장하는 세 명의 미녀 흡혈귀에게 공포와 매혹을 동시에 느끼고, 결국 임박한 죽음의 위협 앞에서 필사의 탈출을 시도한다.

한편 영국에 남아있던 하커의 약혼녀 미나는 절친한 친구 루시와 함께 항구도시 휘트비로 요양 여행을 떠난다. 원래부터 몽유병 증세가 있던 루시는 휘트비에서 점점 더 쇠약해진다. 미나는 루시가 사랑하는 연인과의 결혼을 앞둔 채 의문의 '붉은 눈' 사내와 밀회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루시는 결국 끔찍한 죽음을 맞는다.

루시의 죽음을 파헤치기 위해 그녀의 약혼자 아서, 정신과 의사 수어드, 쾌활한 미국인 퀸시,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건너온 반 헬싱 박사가 힘을 합친다. 가까스로 영국에 돌아온 조너선 하커의 증언을 토대로 이들은 루시가 흡혈귀에게 희생됐으며, 그 원흉이 바로 드라큘라 백작임을 깨닫고 백작과의 대결에 나선다. 그러나 백작은 이를 눈치채고 순수한 미나에게 접근을 시도하는데….

무섭고 환상적이며 한없이 선정적인 이야기. 19세기 말인 1897년 처음 등장한 이래 거듭 부활하며 21세기의 '트와일라잇' 시리즈와 <렛 미 인>에 이르기까지 뱀파이어 대중문화의 거대한 아이콘으로 등극한, 반드시 거쳐 갈 수밖에 없는 원형으로 자리 잡은 작품이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다.

▲ <주석 달린 드라큘라>(브람 스토커 지음, 레슬리 S. 클링거 엮음, 김일영 옮김, 황금가지 펴냄). ⓒ황금가지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만으로는 왠지 아쉬워서 훨씬 더 두꺼운 <주석 달린 드라큘라>(브람 스토커 지음, 레슬리 S. 클링거 엮음, 김일영 옮김, 황금가지 펴냄)를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 들었다면, 먼저 알아두어야 할 주의사항이 있다. 우선 '주석 달린'이라는 부제처럼, 본문에 맞먹는 분량의 주석이 주렁주렁 달린 이 책의 형식이다.

특히 소설을 읽을 때 플롯 자체를 죽죽 내달릴 수 없게끔, 저자가 아무렇지 않게 의도적으로 매 문장마다 달아놓은 주석을 확인하느라 자꾸 독서의 리듬이 깨지고 곁길로 빠지고 심지어 심할 때는 앞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릴 지경에 이르는 과정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라면 이 책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주석 달린 드라큘라>는 지나치게 산만하고, 별로 필요 없는 팩트를 시시콜콜 알려주는 대단히 과시적인 작품으로만 기억될 확률이 크다.

그러나 <주석 달린 드라큘라>의 주석을 담당한 레슬리 S. 클링거라면 그런 식의 불평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이다. 레슬리 S. 클링거가 누군가. 셜록 홈즈의 팬들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그는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셜로키언 중 한 명이자 <주석 달린 셜록 홈즈>를 엮은 이다. 겉으로 보기엔 명쾌하기만 보이는 아서 코난 도일의 텍스트에 숨겨져 있는 수많은 수수께끼와 불일치와 누락되고 틀린 부분들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아서 코난 도일이 심지어 의도하지 않았을 부분까지도 잡아채며 작가의 영혼 깊숙이 파고들고자 했던 인물이다.

한 마디로 매우 학구적인 '오타쿠'라고 할 수 있겠다. 레슬리 S. 클링거는 <주석 달린 드라큘라>를 작업하게 된 계기로, <주석 달린 셜록 홈즈>를 완성하고 난 뒤 "이미 빅토리아조의 세계에 흠뻑 빠져있던 나는 이 연구를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다음에는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끝에 빅토리아 시대에 나온 다른 매력적인 작품들을 찾아보았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그는 셜록 홈즈와 드라큘라라는 다소 상반된 19세기 아이콘을 경유하며 19세기 전반의 디테일을 20세기(그리고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공유하고 싶어 안달이 난 그런 오타쿠다. 혹은 셜록 홈즈에 가장 가깝게 다가서고자 하는, 홈즈를 넘어서고자 하는 19세기 지식의 지배자가 되고 싶은 그런 탐정이다.

<주석 달린 드라큘라>의 필연성, 즉 '(고작)소설을 읽는 데 이만한 지식이 정말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선 이 점을 꼭 지적해야 한다.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자체가 '지식의 축적'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 말이다.

<드라큘라>는 미나, 하커, 루시, 수어드 등의 목소리로 번갈아 진행되며 혼란스런 사건을 다각도로 조명하는 '다성성(多聲性)'의 형식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일기, 편지, 전보, 신문기사, 항해일지 등 철저한 기록을 통해 단서를 찾고 괴물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에 맞서는 대응 방식을 강구하며 스스로의 이성과 분별력을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형식이라는 점이 더 중요하다.

예를 들어 트란실바니아와 휘트비에서 겪은 기이한 사건을 기록한 하커와 미나의 일기를 읽은 뱀파이어 사냥꾼 반 헬싱 박사는 "이 서류는 햇빛과도 같습니다. 제게 진실의 문을 열어 주었으니까요. 그 빛은 너무도 강렬해 눈이 부실 지경입니다"고 호들갑스런 감탄을 표한다. 그리고 루시를 처음 진찰하고 난 다음에는 "지식은 기억보다 강하고, 약한 기억을 믿어서는 안 되(네). (…) 앞으로는 이 아가씨와 관련된 일은 꼼꼼히 기록하게. 아무리 작은 것도 소홀히 다루지 말고. 자네에게 충고 하나 하겠는데, 의심 가는 거나 추측할 수 있는 것, 모두를 기록하게"라고 수어드에게 충고한다.

그러니까 <드라큘라>는 과학과 의학의 발전이 눈부신 속도로 발전하며 미래가 진보로만 이뤄져있다고 생각했던,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영국의 한복판에서 미지의 괴물과 맞닥뜨린 뒤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지식을 한군데 모아 그것의 정체를 밝혀내고 행방을 추적하여 말살에 이르는 탐정의 이야기다.(참고로 아서 코난 도일은 셜록 홈즈의 첫 작품 <주홍색 연구>를 1887년에 썼다. 브람 스토커는 틀림없이 여기서도 강력한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루시를 진찰하며 그녀가 뱀파이어에게 물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순진한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는 반 헬싱 교수가 그 탐정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드라큘라>를 읽어나가다 보면, 진짜 탐정은 여주인공 미나라는 확신이 점점 굳어진다.

"이런 일엔 날짜가 아주 중요해요. 우리가 가진 모든 자료를 준비한 뒤, 일어난 일을 순서대로 정리한다면 이번 일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고달밍 경과 모리스 씨도 오신다고 했으니 그분들이 오실 때까진 보고할 자료를 준비해야겠어요."

"박사의 서재를 나오기 전, 엑서터 기차역에서 석간신문에 난 어떤 기사를 읽고 반 헬싱 교수가 당혹스러워했다고 기록한 조너선의 일기가 떠올랐다. 수어드 박사가 신문을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웨스트민스터 가제트>와 <펠멜 가제트>의 신문철을 빌려 내 방으로 가져왔다. <데일리 그래프>와 <휘트비 가제트>의 기사를 스크랩해두었던 것이 드라큘라 백작이 상륙했을 때 휘트비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사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그때 이후에 나온 석간신문을 모두 읽어볼 작정이다. 그러면 새로운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른다."

"백작은 전형적인 범죄자입니다. 노르다우와 롬브로소라면 그렇게 분류했을 거예요. 그리고 범죄자로서 그는 불완전한 정신세계를 갖고 있어요. 그래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면 습관적으로 해오던 일에서 그 대책을 찾으려 하지요. 그의 과거를 살펴보면 그가 어떤 대책을 세우고 있는지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미나는 이에 더해 바쁜 변호사 남편 하커를 위해 비밀스런 개인 속기법으로 그의 업무를 돕거나 남편을 대신해 영국을 오가는 모든 기차의 시간표를 외움으로써, 등장인물들의 빠른 이동을 결정적인 도움을 제공한다. 무엇보다 그녀가 척척 기차 시간표를 언급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깜짝깜짝 놀라는 건 셜록 홈즈와 왓슨의 대화를 연상케 할 지경이다. 평범한 가정주부의 행복을 꿈꾸던 순진한 소녀에서 뱀파이어의 비극적 희생자로, 뱀파이어의 지배력을 거꾸로 이용하여 그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보고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두는 미나의 변신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탐정의 성장담이기도 하다.
▲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1992년 영화 <드라큘라>

동시에 <드라큘라>는 테크놀로지와 미신, 이성과 감성의 대결이기도 하다. 닐 게이먼은 <주석 달린 드라큘라> 서문에 "최첨단 과학 시대에 나온 빅토리아 시대의 하이테크 스릴러물"이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실로 그러하다. 소설에서 인물들이 지칠 줄 모르고 일기를 쓰고, 타자기(레슬리 S. 클링거의 주석에 의하면 최초의 상업용 타자기가 출시된 건 1873년이며 188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보편화에 성공했다는 기록이 나온다)와 속기를 이용하며, 신문이라는 빠른 소식통을 즐겨 읽으며 스크랩해두는 행위에 더해,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발달했던 영국의 우편 제도를 과시하듯 전보를 주고받고, 그다지 필요도 없는데 매우 비싼 최첨단 축음기로 일기를 녹음한다.(역시 클링거의 주석에 의하면 토머스 에디슨이 처음 축음기를 발명한 것이 1877년, 개량된 형태의 축음기가 나온 것이 1888년에 이르러서다. 1898년 판매된 축음기의 가격을 보자면 오늘날 시가로 미화 2000달러 이상이라고 한다.)

또한 미나는 휘트비의 풍광을 묘사하면서 "디오라마관"처럼 보인다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영화가 처음 등장한 때는 1895년이며, 그 이전에는 빛과 그림자의 효과를 바탕으로 거대한 그림에서 일종의 움직이는 효과를 발생시켰던 디오라마가 신기한 구경거리로서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1992년 작 <드라큘라>에서는 드라큘라 백작과 미나가 처음 만나는 장소를 그림자 극이 상연되는 영화관으로 설정했으며, 드라큘라 백작 뒤쪽으로 에디슨의 발명품을 광고하는 포스터가 언뜻 보이는 장면은 브람 스토커의 원작을 재치 있게 잘 살린 디테일이라 할 수 있다. 즉 환상을 현실처럼 보이게 하는 영화의 발명과, 가장 진보적인(이 표현은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사용된 게 아니다) 시대 한복판에 불쑥 나타난 흡혈귀의 등장은 보기 좋은 짝을 이룬다.)

그 외에도 피를 빨린 루시를 살리기 위해 반 헬싱과 수어드는 몹시 어렵고 고통스러운 수혈을 능숙하게 수행하며, 등장인물들은 잠들기 위해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수면제를 처방받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그들은 롬브로소의 범죄 인류학과 노르다우의 유사과학 비평에도 꽤 정통한 대화를 주고받을 정도다. 뱀파이어라는 전설의 존재를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치고, 현재진행형의 당대성을 이만큼이나 살리려 애쓴 디테일은 자못 흥미롭다.

"자네는 너무 편견에 사로잡혀 있어. 있는 그대로를 보려 하지도 들으려 하지도 않아. 일상에서 벗어난 것들에 대해선 전혀 신경도 안 쓰고 말이네. 자네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실제론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게 바로 현대과학이 저지르고 있는 오류지. 현대 과학은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지만, 막상 설명하지 못하는 것에 봉착하게 되면 설명할 것이 없다고 치부해 버리니까 말이야."(반 헬싱 박사)

"우리 중 누가 이런 일이 가능할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소. 과학과 무신론을 숭상하고 눈에 보이는 사실만 받아들이는 이 19세기에 말이오. (…) 하지만 흡혈귀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나 흡혈귀의 한계, 그 자를 퇴치하는 방법이 같은 근거 하에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받아들여야 하오."(반 헬싱 박사)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그토록 현대성에 집착했던 이유는 테크놀로지와 미신(믿음)의 대결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셜록 홈즈가 <주홍색 연구>(아서 코난 도일 지음, 백영미 옮김, 황금가지 펴냄)에서 "관찰하고 분석하는 훈련을 쌓은 사람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런 사람이 내리는 결론은 "유클리드의 정리와 마찬가지로 확실하다"고 주장한 것과 비교해 보자. 또한 <바스커빌 가문의 개>(아서 코난 도일 지음, 백영미 옮김, 황금가지 펴냄)에선 악마의 현현으로 불리는 개에 대한 공포를 가볍게 물리치며 그 이전까지의 '미신의 공포'와의 단절을 선언했다.

"악마의 대리자는 피와 살로 된 육신을 가지고 있을 것이네."

브람 스토커는 정확히 이 같은 셜록 홈즈의 입장에 공감하는 주인공들과, 18세기부터 유럽에서 크게 유행하던 뱀파이어에 대한 전설을 대립시킴으로써 더한층 풍부한 갈등 구조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조너선 하커는 <드라큘라> 초반에서부터 이처럼 탄식한다.

"지금은 말 그대로 19세기다. 하지만 내 정신이 온전하다면, 과거는 여전히 그 힘을 유지해 왔고,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현대가 결코 말살할 수 없는 힘이다."
▲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2008년 영화 <렛미인>

그러나 반 헬싱 박사의 지식과 미나의 통찰력이 결합되며, 드라큘라라는 무시무시한 공포의 존재, 미신에서 튀어나온 환상적인 감성의 현현은 결국 말살된다. 셜록 홈즈에게 맞서는 범죄자 중 고작 모리어티 교수 정도만 강렬한 인상을 남길 뿐 나머지는 마치 '조무래기 장난'처럼 가볍게 퇴치되던 것에 반해, 브람 스토커가 창조해낸 드라큘라는 반 헬싱과 미나를 거의 압도할 만큼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하며 독자들마저 사로잡았다. 브람 스토커의 소설이 처음 등장한 이래, 셜록 홈즈와 더불어 가장 많은 후속작과 모방작을 쏟아내고 영화와 연극으로 거듭 부활했던 존재 드라큘라의 핵심은 여기 있는지도 모른다. 탐정과 정반대 위치에서 정확하게 평형을 유지할 수 있는 압도적인 악당의 탄생. 드라큘라와 셜록 홈즈가 비슷한 시기, 같은 공간에서 탄생한 건 필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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