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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막아냈으니 쌀농가는 괜찮을 거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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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쌀 막아냈으니 쌀농가는 괜찮을 거라고요?" [한미FTA 뜯어보기 483 : FTA타결 후 들녘을 가다<상>]'우문' 에 '현답' 을 듣다
들녘엔 꾸역꾸역 봄이 밀려오고 있었다.

우루과이라운드(UR)와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개막으로 이미 진작에 "죽었다"는 선고가 내려졌던 농촌이었다. "농업도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며 정부가 조금씩 조금씩 문호를 개방하면서, 중앙정부의 막대한 지원을 바탕을 둔 외국의 거대한 '농산물 대공장'들과 힘겨운 싸움을 이어 오는 동안 우리 농촌은 이미 죽음을 눈앞에 둔 시한부 인생과 같았다.

하지만 지난 2일 타결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또 한 번의 무시할 수 없는 크나큰 충격이 될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농산물과 약재 등 거의 전 품목에 있어 싼 가격과 물량공세로 이미 우리 농산물을 제치고 있는 중국과의 FTA까지 거론되고 있다.

한미 FTA만으로도 "정부가 농업을 포기했다"는 말들이 나도는 판국인데, 노 대통령은 "한중 FTA를 안 할 수 있다면 한미 FTA도 안 할 수 있다"며 한중 FTA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미 죽은 농촌에 잇단 FTA 체결은 '확인사살'이 되는 것이 아닐까?
▲ 전라북도 부안에 요즘 한창 피어나고 있는 유채꽃의 군락. 모든 작위적인 것들의 위선을 증언하는 새 생명의 도래처럼 느껴졌다.ⓒ프레시안

한미 FTA 타결 이후 농민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 지난 10일 전라북도 부안을 찾았다. 노무현 정부가 추진 중인 FTA들은 아마도 이 땅에 끝 없는 긴 '겨울'을 불러오겠지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안의 대지는 묵묵히 새 생명을 틔워내고 있었다.

FTA로 '확인사살' 당한 농촌…"내일 죽더라도 오늘은 먹고 살아야 하는데…"
▲ 지난 겨울 내 조심스레 길러낸 감자를 캐고 새로 모를 심을 논에 쟁기질을 하면서, 농민들은 꾸역꾸역 밀려오는 봄을 맞이할 준비를 미련스레 하고 있었다.ⓒ프레시안

부안에서 만난 농민들도 마찬가지였다. 노 대통령은 "서비스업이나 농업에 한미 FTA로 인한 충격이 있어야 구조조정이 된다"며 '농업구조조정론'을 강조하고 있지만, 구조조정 당할 산업에 '삶을 맞기고 있는' 이들로서는 손을 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난 겨울 내 정성스레 길러낸 감자를 캐고 새로 모를 심을 논에 쟁기질을 하면서, 농민들은 밀려오는 봄을 맞을 준비를 '미련스레' 하고 있었다.

"뭐 언제는 정부가 농업에 신경 쓴 적이 있나. 우리야 예전부터 '버려진 자식'이었지…. 당장 내일 죽더라고 오늘은 먹고 살어야 허니께. 농사까지 놀릴 수야 없잖여."

23년차 베테랑 농부. 부안에서 만난 김규태 씨(43)는 노 대통령이 말한 '소일거리 삼아 돼지 키우는 80세 농민'이 아니다. 그는 부안에서도 꽤 큰 규모의 땅을 경작하는 '농업 CEO'다. 정부가 '농업의 규모화를 통한 경쟁력 강화'를 얘기할 때 그는 빚을 내 논을 사들였다.

그는 쌀을 전문으로 경작하던 '대규모 쌀공장'의 CEO였지만 지난해 처음으로 감자 농사를 시작했다. 쌀만으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햇감자를 한창 캐내고 있는 그를 감자 비닐하우스에서 만났다.

그에게 "감자는 벌이가 좀 되느냐"고 물었다. 김 씨는 "5월 초까지는 벌이가 좀 되겠더라. 다행히 한미 FTA에서 감자는 제외됐다"며 안도감을 표현했다.

"근데 또 한중 FTA하고 그러면 감자도 못하는 거지 뭐. 그리고 나면 뭘 지어야 할지는 아직 모르겄어…."

그가 한 호흡을 쉬고 이어간 말이다. 그는 감자를 캐낸 후 비닐하우스를 가을까지 그냥 묵혀둘 셈이라고 했다. 마을에서 7~8명으로 구성된 작업반 가운데 딱 2명만 감자 캐낸 곳에 호박농사를 짓기로 했다는 거다. 멀쩡한 밭을 가을까지 반년이나 묵혀두려는 이유를 물었다.

"다같이 호박 심으면 출하 때 호박 값이 폭삭 내려앉으니 그렇지. 다같이 망할 수는 없잖어. 그래서 두 집만 허기로 허고 나머지들은 가을에 다시 감자 심을 때까지 그냥 묵혀 두기로 혔어."

막무가내로 너나없이 호박을 심었다가는 오히려 모든 가구가 종자값에 비료값에 인력비까지 호박을 키우는 데 들어가는 돈을 생으로 날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는 정부의 전체 계획 속에 쉬는 땅에 대한 지원까지 보장하는 '생산조정제'를 이 땅에서는 농민들이 알아서 하고 있는 것이었다.

"대통령님, 시장이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닙디다"

▲ 요즘 심화가 부쩍 늘어난 부안의 농꾼 김규태 씨. 그의 말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농민의 선견지명은 정부의 탁상공론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인지 담박 알 수 있게 했다. ⓒ프레시안

"이번에 한미 FTA에서 쌀은 개방 안한다지만 그것도 걱정이여. 나중에 쌀까지 마을에서 야그해서 몇 집은 아예 그해 농사를 못 짓게 되는 건 아닌지 몰러."


정부는 한미 FTA 협상 초기부터 "쌀과 쇠고기는 협상 대상이 아니다"라고 못 박았고 최종적으로 협상이 타결된 이후에도 쌀이 제외된 것에 대해 우리 정부가 '막아낸 것'으로 자랑해 왔다.

하지만 농민들을 "시장이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고 일축했다. "쌀개방을 막았다고 쌀농사 짓는 농가들이 피해를 안 입는다는 것은 무식한 소리"라는 거다. 김 씨는 오렌지가 싼 값에 들어오기 시작하던 때를 떠올렸다.

"시장이라는 게 그렇습디다. 오렌지 수입이 확 늘어나니 귤 농사가 망한 건 당연한 거고, 방울토마토 농사짓던 사람들도 쫄딱 망해버렸어요. 방울토마토를 먹던 사람들이 더 싼 오렌지를 사먹는 겁니다. 오렌지 하나에 사과, 배, 포도까지 수요가 줄어 영향을 받았습니다."

오렌지 한 가지의 수입이 '대체재'로 꼽히는 귤만이 아니라 전체 과일 시장의 판세를 바꿔놓는다는 얘기다. 그는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주변에 방울토마토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제 아무도 방울토마토를 안 한다"며 "오렌지와 귤의 싸움이 아니라 오렌지와 방울토마토, 오렌지와 과일 전체의 싸움인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앙대 윤석원 교수는 15일 <프레시안>과의 전화통화에서 "농산물의 경우 대체재의 범위가 상당히 넓다"고 설명했다. 윤 교수는 "소비자들이 시장에 장을 보러 가면서 '오늘은 꼭 오렌지를 사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냐"고 덧붙였다.

문제는 과일뿐 아니라 채소 등에서도 상황이 마찬가지라는 데 있다. 쌀도 그렇다. 당장 쌀은 한미 FTA 협상 대상에서 제외됐지만 쌀농사를 짓는 김규태 씨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다른 농산물이 이제 미국 것하고 경쟁이 안 될 테니 다들 쌀로 몰리겄죠. 그럼 기존의 쌀농사 짓던 사람들이나 새로 쌀을 시작하는 사람들까지 다 망하는 겁니다. 가뜩이나 쌀 농사만으로는 적자인 판인데…."

"사라진 119조…원래 예산을 놓고 이만큼 많이 지원했으니 네 책임?"

따라서 전문가들은 당장 어느 품목이 개방되고 안 되고의 단순한 시각을 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농민들의 반발에 정부가 생색만 잔뜩 내면서 "이렇게 많이 개방을 막았으니 이제 농민들이 스스로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책임을 전가할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윤석원 교수는 일본과 우리 정부를 비교했다. 그는 "일본은 매년 전체 논의 50% 정도를 쉬게 해 생산량을 정부가 조절하는 생산조정제를 시행하고 있다. 물론 그 대신 일정액의 생산지원 보조금을 정부에서 지급한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도 표면적으로 농업에 매년 수많은 돈을 지원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농업분야 국민과 함께하는 업무보고에서 그동안 농업에 들인 시간과 돈이 얼마냐고 농민들을 '꾸중'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이미 119조 원 지원할 때 다발적 FTA에 대비해서 했던 것"이라며 "아무리 우리 농업이 소중하다지만 이렇게 계속할 수 있냐"고 말했다.

하지만 김규태 씨는 '정부에서 지원하는 돈으로 어떤 혜택을 봤냐'는 질문에 "119조? 119억을 잘못 얘기한 거 아니냐"라고 되물었다. "그렇게 많은 돈이 어디에 쓰였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고도 했다. 대통령은 농담처럼 "염치없다"고까지 하는데 왜 농민들은 "나는 모르는 돈"이라고 하는 걸까?

윤 교수는 "정부에서 119조, 42조 얘기하는데 이 돈은 쉽게 말해 농림부의 예산"이라면서 "농림부가 간판을 달고 존재하는 한 들어갈 수밖에 없는 돈이므로 농민들 개개인에게는 당연히 '모르는 돈'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윤 교수는 "차라리 농림부를 없애고 그 돈을 농민 개개인에게 똑같이 나눠주는 것이 더 좋은 지원책일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한미 FTA에 대한 정부의 피해지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걱정했다.
▲ 정부는 그간 '규모화'를 얘기하며, 세계시장에서 농업의 경쟁력 부족이 농민 개개인의 무능력의 문제인 것처럼 몰아붙여 왔다. 하지만 우리시대의 농촌이 여전히 갈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인가?ⓒ프레시안

"'누구 하나 죽어서라도 올바른 정책이 섰으면…'하는 게 농민들 마음"

우르과이라운드 이후 10년. 정부는 그간 '규모화'를 얘기하며, 세계시장에서 농업의 경쟁력 부족이 농민 개개인의 무능력의 문제인 것처럼 몰아붙여 왔다. 하지만 우리시대 농촌은 여전히 갈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다.

한미 FTA라는 '쓰나미'를 앞두고, 뻔히 닥쳐 올 재앙 앞에서 속수무책인 것이다. 김규태 씨의 "우리는 진작에 버려진 자식"이라는 낮은 읖조림은 "나도 이 부안 땅에서 농민으로 살면서 별거 별거 다 겪어 봤지만 요즘만큼 답답한 적이 없다"는 하소연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자꾸 몰아치고 농민들도 하다하다 안 되면 옛날의 동학농민운동 같은 게 일어날지 압니까. 마을 사람들하고 얘기해보면 요즘 농민들 심정이 '나는 못 죽어도 누구라도 한 사람 죽어서 올바른 정책이 섰으면…' 합니다. 할 소리는 아니지만 다들 그래요."

그의 마지막 말을 뒤로 하고 부안 들녘을 돌아서면서 기자는 속으로 "그래도 누구든 죽는 건 안 되죠"라고 중얼거렸다. 지난 1일 분신했던 허세욱 씨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답답함만 한 가득인' 농민들과 만남을 되짚어가며 글로 정리하던 날, 허 씨의 운명 소식을 들었다.

'누구라도 죽어서 올바른 정책이 섰으면 한다'는 한 농민의 낮은 탄식과 자신의 몸을 던져서라도 FTA를 막고자 했던 한 노동자의 저항이 겹쳐지던 순간, '농업 구조조정'을 주장하면서 FTA를 밀어붙이고 있는 노 대통령의 머리 속에는 과연 무슨 생각이 들어 있을까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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