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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강의실, '민주화'가 싫은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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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강의실, '민주화'가 싫은 대학 [벼랑 끝 31년, 희망 없는 강의실·26]
나는 나이는 어지간히 들었지만 4년차 시간강사다. 사회운동을 하다가 이것을 정리 반추하고 싶어 책을 썼고 그 연장선에서 강단에 섰다. 그러나 강의를 하면서 "세상에 이런 엉터리 구석이 있었나"하고 놀랐다.

<프레시안>에 연재가 계속되는 동안 '희망 없는 강의실'이라는 제목이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나는 오늘도 묻는다. 대학사회에서 창의적 집단지성을 키울 수 있나? 우리 사회는 지속가능한 지식사회에서 삶의 질을 유지 향상시킬 희망이 있는가?

강의실에서 만나는 학생들은 이렇다. 학생 10명 가운데 9명이 대학을 졸업한 뒤 기업의 CEO를 하겠다고 한다. 사실은 99명이 노동자가 되고 자본가나 경영자는 1%밖에 안 된다. 1%도 이미 부와 교육이 세습하는 사회구조 속에서 정해졌다. 그런데 학생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거나 아니면 각급 학교에서 배운대로 자신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지난해 봄 광우병 쇠고기 사태가 났을 때 여중생, 고3생도 촛불을 들었는데 대학생은 별로 나서지 않았다. 이번 겨울 MB악법 반대 촛불도 마찬가지다. 오늘의 대학생은 과거 중학생일 때 또래 효순·미선이를 추모하는 촛불을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취직에 필요한 학점 경쟁 때문에 겨를이 없다. 학점 토익 스펙 경쟁에서 이겨야 정규직으로 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제한된 일자리를 놓고 경쟁한다고 해서 일자리가 늘지 않는다. 갈수록 노동자 일인당 생산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일자리는 절대적으로 줄어드는 추세다. 오히려 청년들은 노동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늘리고 공공부문의 일자리를 늘리라고 요구해야 한다. 좁은 병목에 머리를 박을 것이 아니라 병목을 넓히라고 해야 한다. 학점에서 해방돼 현실을 헤쳐 나가는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 고등교육을 개혁하라는 프랑스의 대학생, 대학등록금을 신설하지 말라는 그리스의 대학생에게 배워야 한다.

학생들은 자신이 비정규직 취업이나 청년 실업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일자리 나누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사회에서 쌀 99가마를 가진 부자는 쌀 1가마를 가진 가난한 이의 것을 빼앗으려 한다. 학생들에게 몇 가마를 가졌으면 좋겠냐고 물어보았다. 놀랍게도 120가마를 갖고 싶다고 했다. 이들은 내가 빼앗긴 것 이상으로 다른 사람에게 빼앗으면 되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이들에게 성선설은 다수가 지지하는 이론이 아니다.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학점을 걸지 않는 한 질문에 대답을 꺼리며, 질문하지 않는다. 지난 학기 필자의 강의 시간에 한 명의 학생도 질문을 하지 않았다면 독자들은 믿겠는가? 더욱이 학생 사이에 스스로 질의 응답하는 토론은 기대할 수 없다. 간혹 수업이 끝난 뒤 개별적으로 질문하는 학생이 있다. 그것도 연구실이 없기 때문에 잠시 서서 이야기할 뿐이다. 다른 대학의 학생과 교수에게 거기도 그러하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외국에서 공부하다 들어온 학생이나 교수들도 귀국하면 곧 동화한다.

왜 그러냐고 학생들에게 물어보았다. 초등학교 고학년 이래 주입식 교육을 받아온 환경도 작용하지만 "깝치다"(깝죽거리다)가 왕따 당하면 오히려 손해라는 것이다. 이것은 쓸 데 못쓰고 빚 얻어 연 1000만 원을 자녀에게 쥐어 대학에 보냈더니 집에 와서까지 밤새워 리포트를 쓰는 모습을 보고 뿌듯하게 생각하는 학부모의 생각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또 학생들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지 않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실천하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사고와 표현 그리고 실천은 순환하지 않는다.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사고의 정체로 되돌아온다.

이런 대학생을 보면 마치 70년대에 공장에서 품질관리(QC)한 제품을 보는 것 같다. 마치수호지에 나오는 장면처럼 키가 큰 사람을 독재의 잣대에 맞추어 길이를 잘라 줄인 것을 연상시킨다.

이런 사고와 행동은 산업사회에서 미국이나 일본에서 OEM(주문자 상표)으로 주문한 상품을 장시간 저임으로 생산하던 20세기에는 통했다. 그러나 21세기 지식사회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한국형 지식인을 자체에서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앞으로 인구가 줄고, 유학생 수가 줄고 귀국을 기피하며, 선진국이 타국의 전문직을 흡인하는 정책도 고려해야 한다. 이런 환경에서 5〜8년 동안 세월을 보낸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한국사회라는 공동체를 살리고 지속가능한 지구 사회를 이끌 수 있을까 의문이다. 한국이 장차 필리핀이나 아르헨티나나 인도처럼 생각과 사람이 순환하지 않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무너진 강의실

왜 대학생은 현실과 괴리된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왜 대학생이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학생들이 현실을 배우거나 고민할 기회가 적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대학강사들이 현실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가르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학강사들은 신분 지위 계약이 없는 상태에서 현실을 말하는 순간 강의를 잘리고 전임 임용 가능성은 무산된다. 40세 전후에 교수노동시장에 나온 박사들에게 강의 박탈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40세는 다른 노동시장에서는 제2의 노동생애를 시작해야 할 나이이다.

이들에게는 학문의 자유가 없다. 이들은 끊임없이 자기검열하며 이것은 바로 학생에게 반영된다. 학교에 책상 하나 없이 전공 책 사보지 못하며 강의 배낭을 메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시간강사와 기껏해야 프로젝트 논문을 주문 생산하는 비정년트랙에게 생애를 걸고 다양성 있는 연구들을 기대할 수 없다. 또 전임교수 역시 강의와 연구에서 비정규직 교수라는 천적이 없어진 대학생태계에서 현실을 가르칠 필요를 크게 느끼지 않는다. 전임교수들은 대체로 임용된 지 5년 정도가 지나면 현실에 안주하게 돼 학문적인 자극을 상실한다고 한다.

그뿐 아니다. 전문직을 원하는 학생들은 학문의 길보다 치·의학전문대학원이나 법학전문대학원에 간다. 사실은 미안한 말이지만 그 직업의 속성이 질병과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는 기능적인 전문직이며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전문직이 아닌데도 말이다. 학생들은 취직이 안돼서 또는 학력 세탁을 목적으로 대학원에 가는 경우가 많지만 학문을 목적으로 대학원에 가지 않으려 한다.

필자가 2007년 10월 중순부터 10주 동안 주말에 권철현 국회 교육위원장의 부산 사상 지구당사 앞에서 노숙 일인시위하면서 본 일이다. 덕포시장에서 만난 상인들은 아무개네 아들이 서울대 대학원 전자공학과 석사를 마쳐 아버지는 박사 과정 진학을 원했는데, 아들은 모 전자회사에 들어갔다면서 부산의 인재를 잃었다고 아쉬워했다. 아들 입장에서 보면 신분도 생계도 장래도 없는 박사과정을 굳이 갈 이유가 없었다.


▲ 장래가 없는 박사 과정…대한민국의 미래라면? ⓒ김영곤
이런 이유도 작용했는지 권철현 의원은 낙천되었다. 서울대생이 비정규교수, 학부모와 함께 일인시위한 서울 관악갑의 유기홍 의원(교육위 법안심사소위 위원장)은 2000표 차이로 낙선했다.

그러면 왜 대학은 대학강사의 교원지위 회복을 한사코 반대하는가? 이들은 돈이 없다고 한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대학은 등록금도 있고 기부금도 있고 적립금도 많고 국고지원도 있고 땅도 넓고 아파트도 많고 건물도 많이 짓는다.

18대 국회 교과위 김춘진 의원은 지난해 12월 12일 대학강사의 처우 개선을 말하는 국회 교과위 공청회에서 "어느 대학 이사장이 돈이 많이 남는다고 자랑했다"면서, 박승철 전국교무처장협의회 회장(성균관대 교수)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었다. 어느 전직 총장에 따르면 대학등록금만 가지고도 대학강사 처우를 개선할 수 있다고 한다. 다른 전직 총장은 대학총장회의에서 방학 중에 시간강사에게 강사료를 주자고 했더니 다른 대학총장들이 벌떼 같이 일어나 반대해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고 한다. 또 다른 총장은 비정규 교수 문제는 고쳐야 하지만 대학총장 한 사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했다. 대학들은 대학교육의 정상화를 거부하여 불공정 거래행위를 하는 카르텔을 운영한다.

17대 국회에서 한나라당 이주호 의원은 대학강사에게 교원 지위를 부여하고 거기에 들어가는 예산을 국고에서 상당 부분 부담하도록 하는 고등교육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그러나 한국대학교육협의회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압력을 넣고 낙선 운동하겠다고 협박하여 이를 저지하고, 교육위원들은 짐짓 교육부에 떠미는 방식으로 이를 폐기했다. 교육부는 대학과 교육부 사이에 회전문 인사가 이루어지는데 굳이 대학의 비위를 건드릴 필요가 없다는 태도로 모르쇠했다. 국가인권위원회 개선 권고안도 무시했다.

이주호 의원의 입법 취지는 한국사회가 이미 지식사회로 진입했는데 생산력을 높이려면 대학 교육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본 일반의 의사를 반영하는 이런 주장도 천민적인 대학자본 앞에서는 별 수가 없었다. 몇 개의 거대한 재벌이 저마다 대학을 소유하고 있어 이를 능가할 자본일반의 의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부분의 원죄는 32년 전 대학강사의 교원지위를 박탈하고 '현실을 말하는 양화'를 구축하고 '악화'를 확대 재생산하는 근거를 마련한 박정희 유신독재에게 있다. 그러나 변화시킬 책임이 있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과연 비정규교수의 교원지위 회복을 비정규교수나 학생 학부모의 입장에서 가슴으로 이해했는가, 또 이런 비천한 인식이 재집권을 실패하게 하지 않았나 되씹어볼 필요가 있다. 18대 국회에서 변화의 심도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다.

대학은 민주화가 싫다

대학이 대학강사의 교원지위 회복을 반대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대학은 역사적으로 보아 대학은 일제 강점기에 친일 지주가 운영하고, 8·15 해방공간에서는 친일파 청산을 저지하고 농지개혁 대상 농지의 절반을 면탈해 대학의 소유구조를 유지하고, 50년대의 우골탑을 거쳐, 군사독재와 결합해 산업노동자를 공급하고 대학강사의 교원지위 박탈을 누리고, 신자유주의 유연노동을 거쳤다. 용케도 변화와 책임을 피하면서 '강사탑'을 쌓았다.

지금 이들의 머리에는 "대학은 노다지요 대학강사는 공짜!"라는 인식이 박혔다. 고등교육의 질 향상이나 '같은 노동 같은 임금' 같은 비정규교수의 노동인권은 안중에 없다. 적절한 가격을 보장해 재생산이 가능하도록 하는 시장의 질서도 작용하지 않는다. 아프리카 정글에서 사자가 먹잇감으로 늙고 병들거나 새끼 영양을 솎아내는 생태유지의 지혜도 없다. 다만 대학교육이 무너져도 대학강사를 공짜로 부려 얻는 부와 권력을 허물고 싶지 않을 뿐이다.

비정규교수가 교원지위를 회복하면 대학에서 가르치는 자 사이의 의사결정 구조는 전임교수 6만 : 비정규교수 0에서 전임교수 6만 : 비정규교수 13만5000명(중복된 수를 빼면 약간 줄어들 것)으로 역전된다. 비정규교수의 비율이 2/3가 된다. 또 여기에 초중등학교 운영위원회처럼 학부모와 주민이 대학운영에 참여할 경우 대학은 민주화하고 학문의 자유는 신장할 것이다.

전임교원의 임용도 인맥-학맥-돈이 상당히 작용하는 관행에서 벗어나 대학강사의 연구-강의-학생지도-공동체와 연결을 바탕으로 비정규교수가 승진하는 쪽으로 바뀔 것이다. 대학강사의 자살이 1998년 이래 밝혀진 것 만해도 한경선 박사를 비롯해 7명인데, 이런 대학강사의 희생도 막을 수 있다.

▲ 대학강사가 자살하는 사회…. ⓒ이광수

또 대학을 민주화하여 재정을 공개하고 또 대학운영을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전환할 경우 등록금 인하 요인이 나타날 것이다. 등록금은 원래 대학졸업생을 고용하는 기업과 정부 그리고 사회가 내야 한다. 상품을 살 때 소비자가 제조 유통 원가를 지불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핀란드 스웨덴은 대학 교육이 무상이다. 프랑스와 독일 등의 등록금은 연간 150만 원을 넘지 않고, 영국 등은 등록금 상한제가 있고 그 금액마저도 나중에 돈 벌어서 내는 후불제이다.

대학은 대학의 주인인 대학생을 대학에서 변화시키고 싶지 않다. 대학은 길게는 외국이 이 땅에 군대를 주둔시켜 결과적으로 한국의 학문에 간섭한 지 121년, 짧게는 지식인 탄압정책으로 대학강사가 교원지위를 상실해 대학강사를 '공짜'로 부리는 32년 된 기득권을 놓치고 싶지 않다. 수능 점수가 높은 강남 학생을 뽑아 치·의학 법학 전문대학원을 중심으로 운영하면서 사회에서 이룩한 학벌의 기득권을 흩트리고 싶지 않다. 대학의 의사결정 구조를 바꾸는 비정규교수의 교원지위 회복이 싫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비정규교수의 교원지위를 회복하여 대학을 민주화하고 무너진 강의실에 희망의 불빛을 켜야 한다.

* 이 연재는 한국비정규교수노조 교원법적지위쟁취특별위원회의 기획으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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