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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와 '강사', 그 차별의 시작과 숨겨진 음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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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교수'와 '강사', 그 차별의 시작과 숨겨진 음모 [벼랑 끝 31년, 희망 없는 강의실·28]
<사례1>
"교수님이 어제 강의시간에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야, 그 사람 교수 아니고 강사야."
"엥? 그래?"

<사례2>
"이런데 힘 빼고 다니니 교수가 못되고 강사밖에 안 되는 것 아니요?"

위의 사례들은 필자가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던 시절, 대학 내에서 학생들 사이의 대화 및 강의평가 란에 기재된 평가들이었다. 특히 '사례2'의 의견은 필자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이후 이에 대한 내용을 수업했다고 해서 한 학생이 적어 놓은 것이었다. 필자는 이 사례들에서 많은 문제들을 제기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지적하고 싶은 것은 '불러주는 이름'의 다름에 의해 한 사람의 인격 및 지식 정도가 깡그리 무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교수"와 "강사",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귀족"과 "천민"의 또 다른 이름이다. 많은 영화나 소설에서 별 볼일 없고 힘없는 캐릭터의 전형이 "강사", 즉 비정규직 교수였다면, 내용과 실재적 측면을 따지지 않고 모든 여론 형성 공간 및 학계에서 "교수"는 범인(凡人)들이 함부로 넘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와 같이 우리 사회에서 "교수"와 "강사"의 의미는 첨예하게 부딪힌 종속의 관계이다.

▲ "교수"와 "강사"의 의미는 첨예하게 부딪힌 종속의 관계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학문의 미래가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종속의 관계는 과연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여기에 대해 비정규직 교수를 비롯한 사회 각계각층에서 많은 의견들을 내놓고 있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원인은 '교권의 존재여부'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 사회에서 "강사"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지식을 전달해 주는 사람이긴 하지만, '교권'을 가진 '교원'의 신분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지식만을 전달하는 컴퓨터 기계와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강사"는 교원의 자격이 부여되지 않는가? 이를 파악해보기 위해 잠시나마 '가까운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나보기로 하겠다.

대한민국은 '교육법'에서 교원의 자격을 규정하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의 '고등교육법'은 제2장 제2절에서 교직원의 구분을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① 대학·산업대학·교육대학 및 원격대학에는 학교의 장으로서 총장 또는 학장을 두며, 전문대학 및 기술대학에는 학장을 둔다.<개정 2007.10.17>
②학교에 두는 교원은 제1항의 규정에 의한 총장 및 학장 외에 교수·부교수·조교수 및 전임강사로 구분한다.
③학교에는 학교운영에 필요한 행정직원등 직원과 조교를 둔다.
④각종학교에는 제1항 내지 제3항의 규정에 준하여 필요한 교원, 직원 및 조교(이하 "교직원"이라 한다)를 둔다.

위의 법률만을 볼 때, 대학에서의 교원은 교수, 부교수, 조교수, 전임강사이며, 이들은 학생을 지도, 교육하고 학문을 연구한다(고등교육법 제2장 제2절 제15조 2항. * 고등교육법은 기존의 교육법을 교육기본법, 고등교육법 등으로 분화하면서, 1997년 12월 13일 제정되었다 - 법률 제5439호). 그러나 이 법률에서 대학교육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고 있는 "강사"에 대해서는 어떠한 조문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교육법의 조문에 "강사"가 이전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1976년 12월 일부 개정된 교육법(법률 제2980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제75조 각 학교의 교원 또는 사무직원과 그 임무는 다음과 같다.
1. 생략
2. 대학, 교육대학, 사범대학, 실업고등전문학교와 전문학교에는 학장(대학교에는 총장, 실업고등전문학교와 전문학교에는 교장), 교수, 부교수, 조교수, 강사와 조교를 둔다. --------- 교수, 부교수, 조교수와 강사는 학생을 교수, 연구, 지도하되, 연구 및 지도에만 종사할 수 있다.

위의 1976년 12월 교육법 조문을 볼 때 "강사"는 엄연히 교원의 범주에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23년이 지난 지금, 법조문에서는 "강사"라는 말을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강사"는 법조문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일까? 이 문제의 발단은 1977년 10월 제9대 국회에서 "교육법중개정법률안"이 상정되면서부터이다.

박정희 정권은 1977년 10월 24일 '초급대학교, 전문학교 및 실업고등전문학교를 전문대학으로 개편하고, 대학입학예비고사 면제자의 범위를 조정하며, 방송통신대학을 이수한 자에 대하여 대학졸업학력을 인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교육법을 개정하고자 정부안으로 '교육법중개정법률안'을 국회에 상정하게 된다.

여기에서 법 개정의 주요 골자는 전문대학의 개편과 방송통신대학의 4년제 학력 인정, 그리고 예비고사 면제자의 범위 등을 조정하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 법률의 개정안에는 이와 더불어 '대학, 교육대학, 사범대학, 전문대학의 교원'의 범주에서 강사를 제외하고 전임강사를 추가시키는 안이 명시화 되어 있다. 즉 교원의 지위에서 "강사"를 제외하는 대신 "전임강사"를 추가한 것이다.

이후 이 법률안은 1977년 12월 6일 문교공보위원회에 상정되어 12월 7일에 의결되었고, 이후 법사위에서도 12월 13일 의결되었으며, 이튿날인 12월 14일에 본회의에 상정되자마자 커다란 이론 없이 의결되어 1977년 12월 31일 공포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1977년에 발생한 위 과정들을 바라보면서, 몇 가지 지점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중요한 지점으로는 1977년 10월 정부안으로 제안된 '교육법중개정법률안'의 주요 목적이 전문대학의 개편이나 방송통신대학, 혹은 예비고사 면제자의 범위를 조정하는데 있었다는데, 왜 교원의 범위까지 조정했느냐는 것이다. 또한 만약 교원의 범주를 조정하고자 하였다면 확대된 대학의 범주(전문대학의 신설 등)에 따라 교원 수를 늘려야 했지만, 조정된 교원의 범위는 확대된 대학의 범주에 걸맞지 않게 그 범주가 구체화되고 세분화되어 오히려 교원의 수를 축소시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즉 초급대학 및 전문학교, 실업고등전문학교를 전문대학으로 개편하고, 방송통신대학의 4년제 학력까지 인정하는 마당에, 오히려 교원은 강사에서 더욱 세분화된 '전임강사'로 제한시킴으로서 그 수가 줄어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볼 때, 대학 혹은 4년제 대학에 준하는 기관이 늘었다면, 늘어난 학생들에 대한 연구 지도를 담당해야 할 교원의 범위 역시 확대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서는 당시 '강사'라는 교원의 범주에 있었던 이들의 대부분이 '전임강사'로 이동했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동은 일어나지 않았고, 이로 인하여 당시 대부분의 강사들은 오히려 교원의 자격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현재 대한민국의 대부분 대학이 법적인 전임교원율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부분과 상당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비상식적인 행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당시 박정희 정권이 처해있던 시국 및 정세상황은 우리에게 상당한 설득력을 부여 한다. 1977년은 박정희 독재 정권이 최후의 발악을 하던 시기로서,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반정부 시위와 저항에 직면한 시기이다. 노동 진영을 비롯한 민주운동 진영에서는 최소한의 민주주의조차 구현하기 힘든 정세에 맞서 다양한 형태의 파업 및 동맹휴업이 조직되었고, 특히 학원가는 민청학련 사건을 비롯한 다양한 진보운동의 온상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은 '학원의 안정화'라는 구실 아래 여러 가지 형태의 저항운동에 대한 탄압을 실시했으며, 유신헌법 제정 이후 계속해서 공포된 긴급조치 역시 이러한 탄압의 몇 가지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은 학원안정화를 위해 유신정권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며 학생들을 선동하는 진보적 강사를 가장 일순위로 처벌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겼을 것이고, 그러므로 이들에 대한 정비 및 자격조건 제한을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1977년 교육법 개정의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대학교단에서 교원의 자격을 가진 사람을 '전임강사' 이상이라는 상당히 제한적인 자격으로 한정시킴으로서, 대학 내 진보적 학자세력 및 비판적 지식계층을 약화시키고, 이로 인해 대학사회 내의 반정부적 비판 기류를 잠재우기 위함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 과정에서 '강사'는 교권을 잃어버렸으며, 정부는 '전임강사' 이상의 한정된 인력에 대한 통제만을 실시하면 대학사회에 대한 일반적인 통제를 실시할 수 있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이러한 통제를 대학교원, 즉 전임강사 이상에 대한 '교수재임용'이라는 방식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였다.

위와 같은 설명은 교육법 개정과 관련한 또 다른 의구심, 즉 어떻게 법률안이 그토록 빠른 시간 내에 국회의 의결을 받을 수 있었을까에 대해 답변을 줄 수 있다. 정부안으로 제출된 교육법 개정안은 정부제안으로부터(1977년 10월 24일) 불과 2개 여월 만에 일사천리로 통과되었다. 1977년 당시 급격하게 돌아가고 있던 시국상황을 고려할 때 이러한 일사천리의 의사일정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결론적으로 대학에서 강사의 교원 지위가 상실된 이력은 순수한 대학교육의 발전과 방법론의 변화에 기인했다기보다는 독재정권의 필요와 요구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과정이 국가기구인 국회의 법적인 활동영역에 의해 공식화되었다는 점도 명확하다. 하지만 당시의 이러한 결정이 현재 대학교육의 50% 이상을 담당하는 강사들에게 교원의 지위를 부여할 수 없게 만들고 있고, 대학구조의 기형화를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크나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즉 국가기구의 잘못된 결정에 의해 대학의 강사뿐만 아니라 대학생과 이들의 학부모, 대학 당국, 그리고 넓게는 사회 전체가 크나큰 고통비용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폭력에 다름 아니다.

▲ 비정규 교수의 교원 자격 회복은 국가폭력으로부터 되돌려 놓는 작업이다

1977년 당시에는 독재정권의 이해 때문에 교육법을 과감하게 2개여 월 만에 개정하였다. 하지만 2009년 현재, 국가는 다양한 부조리와 모순이 점철된 비정규직 교수 문제를 풀기 위한 교육법 개정을 수 십 년간 유예시키고 있다. 이 순간, 필자는 우리 사회에 더욱 필요한 것이 단순히 교육법의 개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1977년 당시 유신정권이 가지고 있던 독재정권의 정신을 우리 사회에서 먼저 없애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즉 강사의 교원지위 획득은 단순히 교육법을 개정하는 것이 아니라 1970년대 독재정권의 이해에 의해 형성되었던 국가폭력의 결과를 올바른 방향으로 되돌려 놓는 작업이다.

*이 연재는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교원법적지위쟁취특별위원회의 기획으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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