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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밑바닥 본 1년…아직 손 내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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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밑바닥 본 1년…아직 손 내밀고 있어요" [고잔동에서 온 편지<14>] 단원고 희생자 '윤민이 언니' 최윤아 씨 이야기

"2학년 3반 최윤민 언니 최윤아입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3월, 안산 고잔동에 위치한 '4.16 기억저장소'에서였다. 노란색 팔찌에, 노란 리본. 활동가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 대학생 자원봉사자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먼저 다가와 '윤민이 언니'로 자신을 소개했다.

1년 전 동생을 태운 배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이후, 그가 자신을 소개하는 말엔 항상 '2학년 3반 최윤민 언니'라는 수식이 붙는다고 했다.

그를 다시 본 것은 지난 5일, 안산에서 광화문으로 향하는 세월호 가족들의 도보 행진 때였다. 영정을 품에 안은 엄마, 아빠들 사이에서 상복을 입고 걷고 있는 그가 보였다. 도보행진 중 영상 인터뷰에서 "세월호 참사는 어른들의 밑바닥"이라고 또박또박 말하는 낮은 목소리에, 깊숙하게 누르고 있는 절망과 분노가 묻어났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6일 앞둔 10일, 안산 고잔동 세월호 형제·자매 쉼터인 '우리 함께'에서 윤민이 언니 최윤아(24) 씨를 만났다. 지난해 단원고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떠났을 때 즈음 그랬던 것처럼, 고잔동 일대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날이었다.

▲단원고 2학년3반 고 최윤민 학생 언니 최윤아 씨. ⓒ프레시안(최형락)

그날 이후, 계속 4월 16일이었다. 자꾸만 진해지는 '유가족'이란 이름표가 생긴 것 말고, 그 어떤 것도 바뀌지 않고 밝혀진 것이 없어 그렇다. 윤아 씨는 "지난 1년 사람의 끝을, 세상의 밑바닥을 한꺼번에 다 봤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전 아직 손 내밀고 있어요. 사람들한테, 잡아 달라고."

1시간 남짓의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많이 화를 냈고, 많이 울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엔 "현명한 건지 멍청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계속 사람들한테 손을 내밀 것"이라고 했다. 지난 1년, 세상에 대한 불신과 절망, 외로움, 분노로 다져졌을 단단함이 그 말 속에 박혀 있었다.

윤아 씨와의 인터뷰를 일부 중복된 문장을 정리한 것 외에 전문 그대로 소개한다. 한 문장 한 문장 힘주어 말하는 그의 말에, 365일이 4월 16일이었던 지난 1년이 있었다. 때로는 분노, 또 서러움으로 단호하게 말했던 문장들의 행간에, 무너지는 부모님 뒤에서 숨죽여 울어야 했던 지난 1년의 시간이 있었다. 팽목으로 향하던 2014년 4월의 그날이 있었다. 그가 내민 손에 대한 화답은, 독자들의 몫일 것이다.

동생의 죽음 후, 찾아온 질문

"사고 이후…저 스스로에게 질문했어요. 너한테 미래가 있다고 생각해?"

스물넷,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할 나이. 그는 참사 이후 '사라진 미래'에 대해 먼저 말을 꺼냈다.

윤아 씨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취직을 했고, 1년 남짓 직장생활을 이어오던 중 동생을 태운 배가 침몰했다. 그 이후,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사회초년생의 삶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지난 1월, 그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사고 터진 이후에도 몇 개월은 회사에 계속 나갔어요. 일 그만두겠다고 했는데, 엄마가 반대하셨어요. 엄마 입장에선 이 사건에 휘말리는 건 부모로 족하다고 생각하신 거죠. 너희는 너희의 삶이 있으니, 너희 삶을 살아. 너흰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이 많으니까…그런 거였어요. 이 사건에 너무 깊숙하게 휘말리지 않길 원하셨어요.

▲ 지난 4~5일, 윤아 씨도 부모님과 함께 동생 윤민이의 영정을 목에 걸고 시행령 폐기를 촉구하는 도보행진을 했다. ⓒ최윤아 페이스북
사실 출근은 하면서도 일을 제대로 할 수는 없었어요. 국회나 광화문에서, 무슨 일이 터지기만 하면 일 못하고 울고…엄마 무슨 일 있어? 엄마 괜찮아? 인터넷 보면서 계속 엄마한테 전화하고. 경찰이랑 충돌하고 끌려 나가고, 그런 일이 많았으니까요. 갑자기 눈물이 막 터져서 회사에서 그냥 조퇴하라고 한 적도 많았고…. 그렇게 생활을 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지금 왜, 회사에 다니고 있지?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일을 하지?


스스로에게 질문했는데, 답은 일단 '돈은 벌어야 하잖아'였어요. 그런데 돈은 왜 벌어야 해? 미래를 위해서? 너보다 어린 윤민이가 세상을 떠났는데, 너한테 미래가 있다고 생각해? 제가 계속 그렇게 스스로 묻고 답하고 있더라고요. 너도 당장 내일 죽을 수 있어. 그렇게 지금 계속 회사에 다니고 후회 안 할 자신이 있어?

답은 '아니'였어요. 후회할 것 같았어요. 나는 지금, 윤민이를 위해 뭐라도 하나 해줘야 하는데, 행동을 못하고 계속 출근하고 있었던 거잖아요. 시간이 흐르고 너무너무 후회할 것 같았어요. 1,2년 지나면 취직이 힘들어지긴 하겠죠. 그래도 그건 힘든 거지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세월호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람들에게 잊힐 거잖아요. 그러면 그 땐, 윤민이를 위해서 뭔가 하는 것도 불가능하니까."

학교를 졸업하고, 다들 힘들다던 취직을 하고, 여섯 살 터울의 막내 동생이 원하는 건 사줄 수 있는 직장인 큰 언니가 됐지만, 동생은 긴 수학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윤아 씨는 지금도 가끔 윤민이의 페이스북 계정에 동생을 향한 편지를 쓰곤 한다. "언니는 네가 매일매일 그립고 또 그리워서 이 그리움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4월7일)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을 위한 안산의 여러 치유 공간 중, 주로 어디에 자주 가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윤아 씨는 "광화문이요"라고 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치유하라는 말이 가장 싫어요." 또 반문했다. "우리에게, 진짜 치유가 되는 게 뭐겠어요?"

숨 죽여 울다가, 세상에 얘기하고

광화문광장에서 52명의 엄마·아빠들이 삭발을 하던 지난 2일. 잔뜩 흐린 하늘은 간간이 비를 뿌렸다. 누군가 "애들이 우나봐"라고 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이는 비를 뿌리며 울고, 남은 아이들은 그런 부모를 지켜보며 소리없이 울었다. 마음 놓고 울지 못하는 상황. 세월호에서 형제·자매를 잃은 이들에게, 지난 1년은 그랬다.


부모님들의 삭발식 이후, 몇몇 형제·자매들이 전면에 나섰다. 지난 4~5일 양일간 열린 도보행진 둘째 날, 세월호 희생자 형제·자매들이 정부의 시행령 폐기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윤아 씨를 포함해 73명이 참여했다. 그렇게 공포스러웠던 언론의 카메라 앞에, '형제·자매'의 이름을 걸고 선 첫 번째 행동이었다.

▲ 지난 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희생자 유족들의 삭발식. 윤아 씨는 부모님들의 삭발식이, 형제자매들이 세상에 나서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프레시안(손문상)

"사실 형제·자매들도 공식적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았을 뿐, 국회랑 광화문 오가면서 계속 농성하고 활동하고 있었어요. 사실 애들이 언론에 시달린 경험이 많다보니, 앞에 나서고 언론에 노출되는 걸 극도로 꺼려하고 무서워해요.

그래도 나서게 된 계기는 삭발식이 컸던 것 같아요. 성명 발표할 때 참여했던 애들도 대부분 부모님들이 삭발한 아이들이거든요.

삭발식 얘기는 사실 작년에 국회 농성할 때부터, 아주 초반부터 나왔어요. 그런데 주위 도와주시는 분들이 다 말렸어요. 그걸 부모님들이 이번에 하게 되신 거죠. 이 시행령이 통과되면 우리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고, 완전히 끝나버린다고…그래서 하신 거죠. 그걸 보고 나니까, 이제 아이들이 앞으로 부모님이 뭘 더 하실까 걱정이 된 거예요. 그래서 우리도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그렇게 나서게 됐어요."

윤아 씨는 지난 12일 다른 희생자 형제·자매들과 함께 광화문광장에서 '너에게 보내는 편지'란 제목의 퍼포먼스를 열었다. 편지의 수취인은 인사할 새도 없이 긴 수학여행을 떠난 형제자매. 각자가 스케치북에 하고 싶은 말을 적었다. 상처를 언론의 카메라 앞에 드러내는 일. 1년 전이라면 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마음을 먹고,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저는 그 이전부터 형제·자매들이랑 만나고 얘기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같이 공감하면서 위안 받을 수 있는 것들을 해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사실 형제·자매들의 아픔이나 마음을 알아봐 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어요. 세월호 사건에서 상처받은 아이들은, 오로지 생존자 아이들 밖에 없었어요. 형제·자매들은 생각도 하지 못한 거죠. 가여운 아이들, 불쌍한 아이들은 오로지 생존자 애들 뿐이고…치유나 복지 서비스 같은 것도 부모님들이나 생존자 아이들에게만 집중돼 있었지, 초반엔 형제·자매들을 대상으로 했던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필요하면 너희들이 찾아와, 이런 식이었어요. 그런데 어떤 형제·자매가 자기가 유족인 걸 밝히면서 자기 발로 찾아가 상담받길 원하겠어요. 그래서 실제로 심리 치유나 상담 받는 애들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사실 우리는 부모님들의 아픔과는 다른 아픔과 슬픔, 분노가 있어요. 그걸 누르지만 말고 알릴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그 마음을 스케치북에 써보자고 해서, '너에게 보내는 편지'를 하게 된 거예요. 떠난 형제·자매에게 하고 싶은 말,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 그걸 써서 피켓 퍼포먼스를 하려고 준비한 거죠."

퍼포먼스에 참여할 형제·자매들을 모으는 일부터, 홍보 동영상 제작까지. 예전엔 해보지 못했던 일들을 꾸역꾸역 해냈다. 행사 당일, 윤아 씨는 '윤민아 언니는 널 많이 사랑해. 그리고 지금 더 많이 사랑해'라고 쓰인 스케치북을 들었다.

▲ 지난 12일 광화문에서 열린 세월호 형제자매들의 '너에게 보내는 편지' 퍼포먼스. ⓒ프레시안(허환주)

▲ 윤민이의 둘째 언니가 쓴 편지. ⓒ프레시안(허환주)

"전 국민 앞에 생중계 됐는데…안 구했어요."

그 날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기억이다. 윤아 씨는 출근해 일을 하고 있었다. 직장 동료가 다가와 물었다. "언니, 오늘 동생 수학여행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수학여행 가는 애들이 탄 배가 가라앉았대요." 동료는 학교 이름을 물었다. "단원고"라고 답하니, 이어진 대답. "언니, 그 학교예요." 윤아 씨가 2014년 4월16일의 이야기를 꺼냈다.

"울면서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면서, 새로고침만 계속 누르고 있었어요. 새로운 소식, 새로운 소식 없어? 이러면서…애는 연락이 안 되고, 제가 너무 우니까 회사에서 가라고 하고. 부모님은 이미 진도로 내려가는 중이었고, 상황을 잘 모르니까 저희한테 집에서 일단 기다리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기다리고 있는데…애가 못 나온 거죠. 그래서 다음날 동생이랑 짐 꾸려서 바로 진도로 내려갔어요.

세 자매에요. 윤민이가 막내 딸, 저랑 여섯 살이 차이가 나고, 둘째와도 네 살 차이에요. 그러니 얼마나 사랑받았겠어요. 가족들이 얼마나 예뻐하고, 응석 다 받아주고. 그런 아이었는데…. 윤민이 찾을 때까지 진도에 있었어요. 회사에서 전화 오면 그냥 사직 처리하라고 하고, 나는 애 찾을 때까지 못 간다고 하고.

윤민이는 23일 나왔어요. 3반 애들이 제일 많이 올라온 날이 23일이거든요. 일주일 정도 있었던 건데,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져서…몇 달은 된 거 같아요. 잠도 못자고, 먹지도 못하고 하니까…마지막엔 빨리 애 데리고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버텼어요."

윤민이는 수학여행을 간다며 집을 나선 지 8일 만인 4월23일 아침, 133번째로 돌아왔다.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 발톱에 분홍색 바탕에 흰 꽃을 매니큐어로 그려놓은 모습 그대로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 윤아 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배가 침몰하는 게 생중계된 거잖아요. 모두 다 보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정작 구조가 정말 이뤄지고 있는지는 가족들이 알 수가 없었어요. TV에선 계속 구조하고 있다고 하는데, 무슨 인력과 장비가 이렇게 투입됐다고 하는데, 실제론 전혀 그렇지 않았던 거예요.

그래서 부모님들이, 꾸역꾸역 그 현장을 찾아서 보셨어요. 원래 침몰 현장도 못 가게 했는데, 사비 털어서 배 빌려서 나가 보니까 구조를 안 하고 있었던 거예요. 슬퍼할 새도 없이 거짓말에 대한 분노가 생기는 거죠. 애들 빨리 꺼내줘야 하는데, 그걸 안 하니까. 빨리 꺼내야 애들이 사는데, 다 죽이고 있는 건데…구하지 않고 있으니까. 사고 직후부터 그저 아파하고, 슬퍼할 시간도 없었어요."

▲ 세월호 참사 직후인 지난해 4월18일, 진도체육관의 모습. ⓒ프레시안(최형락)

이별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온전히 슬퍼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1년이었다. 애도하고 슬퍼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웠을 지난 1년, 가족들은 거리에서 싸워야 했다. 귀 닫고 때로는 조롱하는 세상을 향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호소해야만 했다. 전국적으로 추모 행렬이 이어지고 노란 리본이 번지던 1년 전, 그 때는 1년 후에도 유족들이 여전히 길거리에 있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진짜 이 나라가 부끄러운 게 뭐냐면…전문가가 왜 전문가고, 재난 컨트롤타워가 대체 왜 존재하냐구요. 어떤 방식이 제일 구조에 효과적이고 적합한지, 전문가들이나 재난 컨트롤타워가 책임지고 해줘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진도에서 유가족한테 물었어요. 저희가 뭘 해줬으면 좋겠어요? 공무원들이 전문가 의견을 묻는 게 아니라, 정신없는 가족들한테 와서 물어봤어요. 조명탄 터트려주세요, 그러면 터트려주고…계속 그런 식이었어요. 책임을 지기 싫으니까, 다 부모님들한테 미뤄버린 거예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정치인들이나 국회의원들이 진상 규명 제대로 해줬다면, 가족들이 아직도 거리에서 이러고 있지 않겠죠. 나도 아프고 나도 힘들어 죽겠는데, 누가 생업도 포기하고 그러고 싶겠어요. 자식뻘 되는 경찰이랑 누가 몸싸움을 하고 싶고, 누가 길에서 자고 싶겠어요. 그런데, 정부가 그러지 않으니까…우리가 말을 하고 요구해야 이 나라가 듣는 척이라도 하니까…. 그걸 부모님들은 진도에서 너무 일찍 깨달았던 거죠. 저도 그렇고. 쉬지 않고 왜 애들 죽었는지, 왜 구조하지 않았는지 알려달라고…그렇게 계속 계속 묻는 것 같아요.

제가 우스갯소리로 그런 얘길 한 적이 있어요. 나이 스물다섯 먹고 꿈이 대통령이 될 줄은 몰랐다고…. 얼마나 답답하면 그런 얘길 하겠어요. 형제자매 중에 그런 얘기 하는 애들 많아요. 내가 국회의원 해도 저 사람들보다는 잘 하겠다, 그런 얘기요.

적어도 저희들은, 그리고 어린아이들은…적어도 약속은 지키려고 노력은 하잖아요. 가슴 아픈 일이 있으면 공감하고, 이해해 주려고 하고. 그런데 대통령이 약속한 것 중에, 지켜진 게 하나라도 있나요?

그래서 형제자매들 중 많은 애들이 '어른들 말은 믿을 수 없어. 특히 정치하는 사람들 말'. 이런 얘길 해요. 그래서 어른들에 대한 반감이나 경계심도 높은 것 같아요. 나는 적어도 커서, 저런 어른은 되지 않겠다는."


▲ 윤아 씨는 참사 이후 종종 자신이 그린 그림을 페이스북에 올린다. 지난해 10월 그린 '속죄의 길'. 윤아 씨는 페이스북에 "그림 속의 다리는 희생자들의 다리이기도 하고, 저희 유가족의 다리이기도 하다"며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들이 '속죄받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최윤아

어른들의 밑바닥


윤아 씨는 여러 차례 사람들이, 그리고 어른들이 무섭다고 말했다. 그가 1년 동안 목격했던 '어른들'이 그랬다. 아이들을 버리고 도망간 선장, 아이들이 바다 속에 가라앉는 걸 그저 지켜보며 거짓말만 했던 해경, 잔인하고 집요하게 카메라를 들이대던 기자들, 유귀족이니 시체장사니 하는 말로 대놓고 조롱했던 자칭 '어버이들', 그리고 다시 돌아온 4월을, 돈 얘기로 시작한 정부. 그런 '어른들'의 밑바닥을 한꺼번에 봐 버렸다고 했다. 그래서 화가 난다. 원망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그 어른들'이 화가 난다.

"사고 터지고 나서, 부모님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씀이 그거예요. 내가 잘못 살았다, 이런 나라에서 내 아이를 낳고 기르다니…아이한테 너무 미안하다. 내가 너무 잘못 살았다. 그런데, 그건 이미 중장년층인 어머니·아버지들 얘기잖아요. 형제·자매들, 저의 경우는 달라요. 저는 이제 사회에 나왔어요. 아직 이 사회에 어떤 것도 저는 한 게 없어요. 그런데 이 사회는, 이미 엉망진창이고 더러운 모습을 나한테 한꺼번에 보여줬어요. 그럼 그 사회를 만든 사람을 원망하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웃긴 건, 아예 그런 원망조차 못하게 해요.

그리고 오히려 그런 얘길 하죠. 젊은 니들이 바꿔야 한다고. 너희들은 젊은 게 무기라고. 젊다는 이유로 너무 짊어져야 할 짐을 많이 주세요.

처음엔 저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건 터지고 '왜'라는 질문을 정말 많이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그 말에도 왜라는 질문이 생기더라고요. 정말 왜 어른들은 그런 거지? 왜 이렇게 사회를 만들어놓고, 우리한테 이러는 거지?

그건, 상대적으로 죽은 애들이 어린 애들이라 더 그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피해자들은 아이들이었고, 어른들이 만든 온갖 부조리한 것들 때문에 희생된 거고, 어른들이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그 배에서 나오지 못 했고…. 어른들의 잘못으로 아이들이 희생됐잖아요."

"변명할 기회를 주는 거예요. 그 '기레기'들한테"

참사 이후 윤아 씨는 종종 페이스북에 그림을 그려 올렸다. 채찍질 당해 상처입은 벌거벗은 몸,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검은 카메라들. 지난 1월에 그린, '언론'이란 제목이 붙은 그림이다.

"사람들은 언론에 노출되는 빈도가 높을수록 그게 사실인 줄 알잖아요. 언론은 사실만 말한다고, 그렇게 배웠으니까. 그런데, 제가 본 언론은 사실만 말하지 않았어요. 사실이 아닌 것도 당당하게 말했어요. 그리고 나중에 저희가 오보 냈습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한 번 말하고 끝나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피해가 얼마나 컸든, 당사자들이 얼마나 괴로웠든, 자기들은 사과 방송 한 번 했으니 됐다고 생각하는 거죠.

생존자 전원 구조 오보가 나왔는데, 저희한테 정신적으로 피해 보상해준 게 있나요? 아뇨, 전혀 없었어요. 오보했습니다, 사과합니다. 그거 하나로 끝인 거예요. 그 말 한마디면 자기들은 다 용서받는 거예요.

▲ 지난 1월, 윤아 씨가 그린 그림 '언론'. ⓒ최윤아

제가 본 기자들은 기레기가 맞았어요.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전 정말 기레기들을 봤어요. 엄마가 진도 내려간 첫날, 가장 앞장서서 '지금 애들 다 죽습니다! 빨리 뭐라도 해야 돼요!"라고 소리치던 한 아저씨가 있었어요. 엄마가 팽목항에서 진도체육관 돌아가는 차를 놓쳐서, 그 사람 차를 얻어 탔는데, 이것저것 질문을 하더래요. 누구냐고 물어보니 삼촌이라고 말 흐리고. 알고 보니 기자였어요. 유족 행세를 한 거죠. 엄마가 저 내려왔을 때 조심하라고 당부했는데, 저도 그런 사람을 만났어요.

진도 내려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애들 인양 정보가 많이 나올 때였어요. 빨리 확인해야 돼, 윤민이면 어떡해…그래서 막 달려가서 경찰 붙잡고 물어보고 했었어요. 애냐 어른이냐, 남자애냐 여자애냐. 근데 어떤 젊은 여자가, 울면서 아이 나왔냐고, 그렇게 저랑 똑같이 묻더라고요. 저처럼 언니나 누나인 줄 알고 친절히 설명해줬어요. 근데 진도 내려온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아까 너랑 얘기했던 그 여자, 지금 밖에서 그걸로 기사 쓰고 있다고. 그 당시의 그 충격과 소름은…제가 어떻게 표현할 수 없어요. 여기 정말 무섭다, 나가고 싶다, 근데 어떡해, 윤민이 찾아야 나가는데…정말 여기 너무 무서워. 친구가 다음날 안산에 올라가는 버스를 탔는데, 그 기자가 거기서도 유족 행세를 하면서 인터뷰하고 있다고 문자가 오더라고요.

저는 그런 사람들 다 만났거든요. 기자들이 계속 오보내면서 무리하게 취재하니까, 부모님들이 체육관에서 다 나가라고 한 적이 있어요.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해요. 어떤 기자가, 부모님들한테 욕을 하더라고요. 시발 더러워서 못 찍겠다고, 유족이라고 유세 떤다고. 부모님들한테 욕했던 기자도 정말 많았어요."

그의 표현대로, 참사 이후 기자들은 '기레기'라는 별명을 얻었다. 언론사 여기저기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참사 보도 매뉴얼이 유행처럼 번졌고, 여러 세미나도 열렸다. 1년 후, 언론은 달라졌을까. 윤아 씨는 "전혀 변화를 느끼지 못하겠다"고 잘라 말했다.

"죄송하지만, 기자란 말이 저에겐 기레기와 동급이에요. 아니, 기레기라는 단어조차도 저에겐 아까워요. 1년 지나고, 내부적으로 변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는데,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저희가 느끼는 변화는 없어요. 1주년 되니까, 다시 기자들이 왔네. 1주년 특집기사 쓰러 왔구나…그런 느낌만 강해요.

그래도 기자들 취재에 다 응해주는 건, 하나라도 더 알려야 하고, 단 한 명에게라도 더 우리 말을 전해야 하니까…그래서 탐탁지 않아도 부모님들도 다 인터뷰 하고 그러시는 거예요.

물론 저희를 도와주려는 좋은 기자들도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사실 만날 일이 별로 없으니까요. 저는 어쩌면 지금도 기자들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에게 변명할 기회요.

저는 그래요. 모든 사람들에게 상처 입었지만, 그 사람들에게 제가 지금 모두 기회를 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람들이 너무 싫고 더 상처받기도 싫은데, '나를 도와주세요'라고 먼저 말하고 손을 내밀어요. 사람이 정말 무섭지만, 손 내미는 것까지 무서워하면…결국 제 손해 같더라고요."

ⓒ프레시안(최형락)

윤아 씨는 동생을 찾아 진도에서 올라온 뒤, 오랫동안 대인기피증 때문에 힘들었다고 했다. 사람에 대한 불신, 분노. 그럼에도 그는, 진도에서 만난 자원봉사자들 이야기를 꺼내며 다시 '사람에 대한 믿음'을 갖기로 했다고 말했다.

"제가 진도에서 돌아오고 나서 몇 달을 사람들 눈을 못 맞춘 적이 있어요.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서. 경찰들이고 기자고 모두 다…대인기피증 같은 거죠. 그 때는 회사도 다니고 있었는데, 사람들 눈을 못 봤어요. 그런데 그렇게 생활하다 보니까…화가 나더라고요. 내가 왜 이렇게 죄인처럼 살아야 하지? 다른 사람들은 얼굴 뻣뻣하게 들고 웃고 장난도 치면서 사는데. 난 왜 이래야 하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일부러 사람들 얼굴 보려고 노력하고, 당당하려고 노력하고. 난 죄 짓지 않았다, 그런 생각도 자주 하고.

자원봉사자들이 정말 큰 도움을 주셨어요. 정말 고마운 분들이 많아요. 저도 처음엔 사실 그 분들이 보이지 않았어요. 처음엔 정신이 거의 반쯤 나가서 미친 애처럼 돌아다녔어요. 그 분들이 보일 틈이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새벽, 정말 가슴 아픈 얘기를 듣고 정신을 차렸어요. 배가 완전히 가라앉은 어느 새벽에, 아빠가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배가 완전히 가라앉은 것은 애가 살아있을 확률이 없다는 거야, 윤아야. 이제 애 찾아서 가는 일만 남은 거야. 엄마 안 쓰러지게 네가 옆에서 잘 보고 있어. 아빠는 괜찮아…. 그러면서 아빠가 막 우셨어요. 그 말을 하시는데, 아니야 아빠 윤민이 살아있어, 그런 말도 못했어요. 사실 누구보다 애가 살아있기를 바라는 건 제가 아니라 아빠잖아요. 그래서 그 말도 못하고, 그냥 엎드려서 막 울었어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엄마가 그러시는 거예요. 이제, 애 데려가는 게 목표라고…애 나오면, 데려가는 게 목표라고. 이제 그것밖에 없다고…. 윤민이 무슨 옷 입었는지, 잘 생각해 보라고…그 말을 엄마가 하시는 거예요.

그 얘기들 듣고 나서…그 때까지는 어떻게든 애가 살아있을 거라고 믿고 버티려고 했는데, 도저히 버틸 수가 없더라고요. 부모님들이 그러시니까,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애 삶을 포기하고 나니까, 살아있을 거란 희망을 버리고 나니까, 그 때부턴 주위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라고요. 그 전까진 정신없어서 몰랐던 자원봉사자들이 뭘 하고 계시는지 보이더라고요.


▲지난 4월 18일, 진도체육관의 모습. ⓒ프레시안(최형락)

진도체육관 청소를 한 게 시에서 한 게 아니었어요. 자원봉사자 분들이 다 하셨는데, 그 넓은 바닥을 일일이 손 걸레질 하셨어요. 먼지 있으면 유가족 건강 나빠진다고. 저희가 정신이 없으니까, 신발 아무렇게나 벗어놔도 몇분 지나면 그새 신발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어요. 그러면서도 그 분들이, 저희랑 눈 마주치면 죄송하다고 했어요.

그 때는 몰랐는데, 그 분들이 내부적으로 정한 규칙이 있었대요. 유가족이랑 눈 마주치지 말 것, 어린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은 엄마아빠들 앞에 나서지 말고 안 보이는데서 일할 것. 보면 아이 생각이 나니까.

제일 인상 깊었던 자원봉사자 분은…이 분은 정신없을 때였는데도, 분명히 기억나요. 초기였어요. 저희가 밥을 못 먹었어요. 애는 굶고 있는데, 밥이 넘어가? 밥이 어떻게 넘어가요. 어떻게 밥을 먹어요. 애 생사가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데, 애는 굶고 있을 텐데…. 그래서 못 먹고 있었는데, 그런데 한 자원봉사자 분이 음식들 가져와서 나눠주시면서 먹으라고, 제발 먹으라고 그러시더라고요. '안 먹을래요' 했어요. 그런데 그 분이 그 말을 하는데 먹을 수밖에 없더라고요. 저랑 동생한테, 니들이 먹어야 엄마가 먹는다고. 니들이 먹어야 된다고. 그 말을 듣는데…아, 우리가 먹어야 그래도 엄마가 한 숟가락 뜨겠구나…동생이랑 그런 생각이 들어서, 엄마 우리 밥 먹자, 엄마가 먹어야 우리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그랬어요. 그게 진도에서 첫 끼니였어요. 정말 자원봉사자 분들한테 너무 감사해서, 진짜 너무 감사해서…그게 눈에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감사하다고 볼 때마다 인사드렸어요.


ⓒ프레시안(최형락)

그런 얘기 많았잖아요. 유족들 니들이 자원봉사자나 잠수부들한테 고맙다고 인사는 해봤냐고. 그런 악플 많잖아요. 전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어요. 난 만날 때마다 감사하다고 했고, 잠수부들한테도 찾아가서 감사 인사 다했다고. 전 당당하게 말 할 수 있어요.

그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제가 사람들에 대한 희망을 못 버리는 것 같아요. 사람의 끝을 봤지만, 좋은 사람도 있어서. 그래서 버리지 못하는 것 같아요. 어쩌면 멍청한 짓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현명한 짓일지도 모르는데…그래도 사람에 대한 희망을 놓지 못한 것 같아요."

17년 짧은 생. 동생의 삶을 포기한 그 날의 이야기를 꺼내며, 그는 많이 울었다.

그럼에도 나는, 손 내밀고 있어요

인터뷰 말미, 마지막으로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의 밑바닥을 본 사람이에요. 그 현장 한 가운데서, 대한민국 밑바닥을 보고 사람들에게 배신을 정말 많이 당한, 사람들에게 버림을 정말 많이 받은, 그런 사람이에요.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계속 손을 내밀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렇게 버림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도와주려는 감사한 사람이 있다는 걸도 알고, 누군가 그 손을 잡아줄 거라는 희망이 있으니까…마지막 남은 내 희망 같은 거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난 밑바닥까지 쳤지만 포기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은 너무 쉽게 그걸 포기하는 것 같아요. 내가 이런다고 세상이 달라질까?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근데 손 하나 내미는 거, 그거 정말 별거 아니거든요. 단지 내 용기가 필요할 뿐, 정말 별거 아니에요. 또 거기서 돌아온 보상은 너무나도 감사하고 큰 거거든요. 사람들이 그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어차피 안 될 거라고,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밑져야 본전으로 일단 손 한 번 내밀어 봤으면 좋겠어요.

그걸 너무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고, 그래서 행동하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지금껏 제 손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저는 끝을 보고,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음에도, 지금도 용기내서 손 내밀고 있으니까…그러니까 다른 분들도, 손 한 번 내밀어 보셨으면 좋겠어요. "


ⓒ프레시안(최형락)

"나는 손 내밀고 있으니, 사람들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그의 마지막 이야기가, '지금 내 손을 잡아 달라'는 구조요청으로 들렸다. 그 때 맹골수도에 침몰한 배에서 그랬던 것처럼, 섬처럼 고립된 광화문광장, 냉소와 외면의 거리에서 빨리 꺼내 달라는 절박한 요청으로 들렸다. 다시 4월 16일. 내년의 오늘은 좀 나아질까.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지며 그는 "1주기라고 한 번 인터뷰하고 말 거 아니죠?"라고 물었다.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내년의 오늘 다시 만난다면, 그 땐 인터뷰가 아니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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