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건 나쁜 만화다. 주인공들은 미래를 향해 나래를 펴는 우리 모두의 발목을 붙잡은 채 과거에만 사로잡혀 있다. 26년 전 남쪽 도시에서 벌어졌던 어떤 학살 사건의 앙갚음만이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다. 이들은 사사로운 보복을 감행함으로써 국가의 공적인 법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자들, 한 마디로 반국가적인 테러리스트들인데, 이 만화는 이 테러리즘에 장대한 품격을 부여한다.
혹시라도 <26년>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우리의 권리(자연권)를 주권에 양도해서 세운 것이 국가인데, 국가가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바를 관철시키기 위해 언제든 국가에게 양도했던 힘을 다시 돌려받는다고. 그리고 죽은 자는 제대로 매장되지 않았다면 언제든 다시 우리의 현재로 되돌아오며, 가짜 화해와 가짜 정의 같은 어떤 눈속임도 그의 귀환을 막을 수 없다고.
<26년>은 우리 사회에 보복이 '상속'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상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야기다. 청산하지 못한 광주는 광주를 체험하지 못한 아이들의 십자가가 되며, 그 아이들이 청산하지 못하면 그 아이들의 아이들의 십자가가 될 것이다. 광주, 그것을 직접 겪은 자들이 아니라 그들의 아이들이 상속받은 현재적 유산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26년>의 시각은 참신하며 또 집요하다.
고만 좀 하지. 이제 잊어버리지. 어쨌든 피를 부르는 복수는 나쁜 것 아닌가? 복수를 권장하다니! 이렇게 말하겠는가? 그러나 '복수하는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 알기 위해서 우리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들로 되돌아가 보아야 한다. 최근 <26년>이란 한 작품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대를 이은 보복 서사'는 사실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26years.co.kr |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그리스 비극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 중의 작품이라 할 만한데, 바로 '복수'에 대한 고대 그리스인의 깊은 숙고를 온존하게 보존하고 있다. 어머니에게 억울하게 살해된 아버지 아가멤논을 위해 그 자녀들인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가 보복을 감행하는 이야기가 이 비극의 뼈대를 이룬다.
흥미로운 것은 이 비극의 마지막은, 국가의 정의(正義)가 시험받는 법정 드라마로 꾸며지고 있다는 점이다. 복수는 사사로운 것이고 법정은 보편적인 것이다. 서로를 모순으로 체험하는 이 두 가지가 대면하기 위해선 참다운 용기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흔한 말처럼 보복은 보복을 부른다. 그리하여 복수를 통해 원수를 갚은 오레스테스는 어머니의 혼백이 부른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기게 된다. 그래서 끊임없는 복수가 또 이어지는가?
오히려 복수 대신 아폴론과 아테네 여신의 주선으로 오레스테스를 심판하는 재판이 열리게 된다. 여기서 그의 복수 행위는 무죄 판결을 받고 복수의 여신들은 국가 안에서 복수를 근절시키는 자비로운 여신들의 지위를 부여받는다. 그렇게 대를 이은 복수는 마침내 소멸하며 다음과 같은 노래가 국가 전체를 통일하는 가운데 비극은 막을 내린다.
"이 도시의 흙먼지가 시민들의 검은 피를 마시고는 복수심에 불타 보복 살인에 의한 재앙을 반기는 일이 없기를!" (<아이스킬로스 비극 전집>(천병희 옮김, 숲 펴냄))
아이스킬로스의 복수극에는 있는데 <26년>에는 없는 것, 그리스인은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가지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 바로 정의에 입각한 판결을 통해서 보복을 근절하고 보복의 힘을 자비로운 여신의 힘으로 변모시키는 국가다. 아이스킬로스의 저 비극의 진정한 주인공은 오레스테스도 엘렉트라도 아니며, 바로 시민들이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각자 사용하는 복수의 힘을 흡수해 보편적인 정의로 수립하는 국가의 힘인 것이다. 이런 국가를 가지지 못한 아이들은 국가에게 양도했던 자연권을 다시 회수해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국가를 대신하여 보복이라는 형태로 힘든 노역을 각자 떠맡는다.
그러니 <26년>은 단지 광주에 국한된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보다 보편적인 차원에서 국가의 의미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작품이며, 사람들이 국가와의 계약을 파기하는 위험한 상황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이 말만큼 <26년>에 등장하는 모든 주인공들의 생각과 행동을 잘 대변하지는 못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참되다고 믿는 생각이 범죄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것을 가장 견디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법을 거부하게 되고, 법정에 반대하는 것을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 명예로운 일로 여기게 된다. 그렇게 하여 선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려한다."
제 기능을 못하면 버려지는 망가진 기계처럼, 국가가 기능을 못한다면, 사람들은 국가와의 계약을 깨뜨리고 양도했던 자신의 힘을 돌려받아 정의를 위한 노역을 개인의 사업장에서 수행할 것이다. 이것은 모두에게 너무도 힘든 일이다.
후기 이 글에 대한 최초의 몇몇 반응을 보면서 약간의 첨언을 하면 어떨가 하는 생각에 이 글을 붙인다. 글을 다듬어 나가는 과정에서 사라졌지만, 글의 시작이 된 최초의 문장은 "<26년>을 보며 많이도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였다. 그렇다. 이것은 내 눈물에서 탄생한 글이며, 나처럼 눈물을 흘릴 모든 이들과 함께 생각해 보고 싶은 이야기다. 처음에 글의 제목으로 마음에 두었던 것은 "<26년>과 그리스 비극"이었다. <26년>과 관련해 나의 흥미를 끌었던 것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이 작품이 고대 이래 문학에서 수없이 계속되어온 '대를 이은 복수 서사'를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민주주의를 실험하던 최초의 사회였던 고대 그리스는 자신의 주요한 표현 수단으로 비극을 가지고 있었고, 그 가운데 아이스킬로스의 복수 비극 <오레스테이아>가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시대 정치와 관련된 우리의 복수 비극은 <26년>이다. 따라서 이상적인 민주 국가의 구현과 맞물린 <오레스테이아>와 우리의 정치극인 <26년> 사이의 거리 가늠을 해본다면 우리 국가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물음은 <26년>과 관련된 나의 두 번째 관심과 연결된다. 도대체 국가를 대신해서 개인이 보복을 수행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왜 <오레스테이아>의 법정은 사사로운 보복을 흡수해 보편적인 정의를 탄생시키는데, <26년>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인생을 대가로 치르고 힘겹게 개인의 정의(正義)를 완수하는데 그치고 마는가? 여기엔 마땅히 있어야만 하는 국가의 기능이 누락된 것은 아닌가? 개인이 국가 대신 정의의 문제를 짊어진다는 것은 국가의 기능의 정지를 의미할 것이다. 또한 개인이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개인의 권리를 국가에게 양도하는 계약이 영구적인 것이 아니며, 파기될지 유지될지 실시간 검증받는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서로 연결된 이 두 가지 관심이 <26년>에 관한 이 글을 쓰게 했다. 이 짧은 글이 우리 시대, 우리들의 작품이라 할 만한 <26년>에 사람들의 애정을 보다 지속적으로, 그리고 보다 따뜻하게 잡아둘 수 있다면, 이 서투른 글쓰기 시도는 너무 큰 보상을 얻는 것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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