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군사 정권 시대와 달리 독재 대 민주와 같은 명확한 전선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일정한 전략과 전술을 가지고 운동의 목표와 단계를 점검할 수 있는 지도부가 있는 것도 아닌, 여중생에서부터 유모차 부대에 이르기까지의 '오합지졸'들의 모임. 누구는 그것을 '친북 좌파'의 근거 없는 광우병 선동의 결과라고 폄하했고, 또 누구는 네트워크로 연결된 '다중'의 출현이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비단 한국의 촛불 시위만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형태의 대중 운동에 대해 그 미시적 기초와 거시적 의미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시적 의미를 강조하다 보면 실제 참가자들의 의도나 욕망을 강제로 재단함으로써 왜곡하기 십상이고, 반대로 미시적 측면에 집중하다 보면 상투적 표현이지만 "나무를 보다가 숲을 보지 못하는" 지리멸렬한 분석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특정한 사회적 사건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뿐만 아니라 실천적 처방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최근 번역된 <경제를 점령하라 : 자본주의 넘어서기>(리처드 울프·데이비드 버사미언 지음, 한상연 옮김, 돌베개 펴냄)는 무척 흥미로운 동시에 분석의 전범이 될 만한 책이라 생각된다.
▲ <경제를 점령하라>(리처드 울프·데이비드 버사미언 지음, 한상연 옮김, 돌베개 펴냄). ⓒ돌베개 |
특히 천문학적인 수입을 얻으면서 불법과 합법, 투자와 도박의 경계를 줄타기하듯 넘나들면서 경제의 불안정성을 심화시키고 막상 파국이 발생하자 손실을 대중의 머리 위로 떠넘기고 자신들은 빠져 나가버리는 금융 자본가들에 대한 불만이 바로 그 상징적 장소인 월 스트리트를 점령하라는 구호로 표현된 것이다.
이 책은 인터뷰 전문 작가인 데이비드 버사미언이 미국 매사추세츠 주립대학(애머스트 소재) 경제학과의 명예교수인 리처드 울프에게 질문하고 그 답변을 주요 내용으로 엮은 것이다. 이 대학의 경제학과는 1970년대 중반 이래로 미국 내의 몇 안 되는 비주류 경제학의 요새 역할을 해왔던 곳이다. 그 교수진 중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 얼마 전에 작고한 스티븐 레즈닉과 리처드 울프다.
레즈닉과 울프는 거의 항상 공동으로 논문이나 책을 집필했는데, 사실 이들은 이른바 '포스트모던 마르크스주의'라는 약간 독특한 흐름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마르크스 경제학 안에서도 주류라거나 정통적이라거나 하는 수식어를 부여받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리처드 울프는 자신의 특정한 학문적 입장을 강하기 드러내기보다는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로 현재 미국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울프의 미국 경제 위기 분석은 <자본주의, 혼란에 빠지다(Capitalism Hits the Fan)>라는 제목의 책으로도 출간된 바 있으며, 유튜브에서도 시청할 수 있는 같은 제목의 강연 영상()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미국의 노동자 계급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선진국 최고 수준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 1970년대 이후 정체된 실질 임금을 빚을 늘림으로써 버티어왔다는 것이다. 소득이 뒷받침되지 않고 부채에 기반을 둔 소비는 결국 거품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거품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금융 세계화와 투기적 자본의 운동, 그리고 이를 부추겼던 미국 정부와 중앙은행의 저금리 정책,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등이 위기의 주범임에는 틀림이 없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기 위해 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요약하지 않겠다. 대신 개인적으로 매우 공감하는 동시에 현재의 한국 사회에도 커다란 시사점을 갖는다고 생각되는 두 가지 논점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울프는 자유와 기회의 나라라고 흔히 생각되는 것과는 달리, 미국에서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철저하게 위험시되고 배제되어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가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던 1960년대와는 달리 지금은 미국의 대부분의 경제학과에서 경기 순환론이라는 과목 자체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 예측할 수 없는 강도와 주기로 경제 위기를 겪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관해 말하지 않고 배우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대단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자본주의가 불안정하다는 점 때문에 고통을 겪으면서도 자본주의라는 단어조차 입에 올리기를 꺼려하는 것, 심지어 그렇게 말하면 배제당하기 일쑤라는 점이다. 이러한 담론의 배제로부터 먼저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미국이 이러하다면 한국의 경우야 더 말할 필요조차 없지 않겠는가?
다음으로, 울프가 이 책에서 중요한 과제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 '기업 민주화'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실천적 유효성을 믿는 학자이지만 당장에 사회주의 혁명을 하자거나 하는 얘기를 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구체적으로는 (미국의 경우) 이사회가 장악하고 있는 기업과 관련된 의사 결정의 민주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자신의 직장은 결국 기업일 터인데, 기업 안의 중요한 결정은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울프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우리가 어린 시절과 죽을 때 사이의 성인기에 내내 종사하는 것이 노동입니다. 민주주의가 어딘가에 존재해야 한다면, 삶의 큰 몫을 차지하는 노동에 존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민주주의가 저절로 주어진다고 생각해서인지 상점, 공장, 사무실 등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우리의 모든 민주적 권리와 책임을 포기하고 맙니다."
혹시 우리는 민주주의란 선거에서 누구를 찍느냐는 문제로만 생각하지 않았을까? 흔히 말하는 생활상의 민주주의조차도 '밥줄'을 위한 직장에서는 성립하는 것이 아닌 듯 살아오지 않았을까? 얼마 전 어떤 책에서 자영업의 목적을 돈을 버는 것 자체보다는 오히려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터에서 즐겁게 사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다.
민주주의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안들에 대해 아무런 발언도 하지 못하다가 몇 년에 한 번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후보에게 한 표를 던지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일까?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한국 사회에서 흔히 말하듯 경제 민주주의는 정치적 민주주의의 다음 단계에 오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정의 그 자체가 된다. 양극화와 자영업의 붕괴, 그로 말미암은 경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대통령 선거에서는 승패를 좌우할 핵심적 역할을 하지 못했던 지난 대통령 선거를 이해하는 데에도 이 책은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노동 운동을 비롯해 민주주의를 추동하는 사회적 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루스벨트 식의 일자리 창출 정책조차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울프의 주장인 바, 복지 국가의 달성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는가? 아울러 경제 민주화를 재벌과 중소기업 사이의 관계만으로 축소하여 이해하는 것이 지닌 한계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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