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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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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하지 않는다 [시민정치시평] 노동자·서민이 계급 배반을 하는 이유
1803년 프랑스 경제학자 장 바티스트 세이(Jean Baptiste Say)는 공급은 그 자체로 수요를 창출한다는 '판로설'을 제안하였다. 즉, 기업가들이 생산한 재화는 소비자들에 의해 모자라거나 남김없이 모두 자동적으로 구매된다는 것이다. '세이의 법칙'으로 불리는 이 주장은 신고전학파로 불리는 현대 주류경제학의 경제학 교과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핵심 학설이다.

그런데 세이의 법칙이 '법칙'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자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행위자와 그들이 딛고 있는 조건을 구분하며 요약해 보자. 첫째, 주체적 행위자인 공급자와 소비자의 합리성은 완전해야 한다. 둘째, 모든 경제주체는 오로지 경제적으로만 사유해야 한다. 곧 순수한 경제적 인간,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말이다, 셋째, 모든 경제행위자들은 동질적이어야 한다. 정보량은 물론 소득의 차이도 없고, 문화적 차이도 없는 똑같은 사람들만 시장에 모여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객관적 조건으로서의 시장은 완전해야 한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완전하게 경쟁적이어야 한다. 또 하나는 상품에 대한 지식과 가격에 대한 정보가 모두에게 완전하게 공개될 뿐 아니라 소비자들은 그 모든 것들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완전경쟁시장'에서 공급자는 최고의 상품을 공급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가정들이 충족되는 시장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황당한 가정들을 벗어던지고 현실로 돌아가 보자. 허버트 사이먼(H. Simon)이 주장한 바와 같이 인간의 합리성은 제한적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금융자본의 도박놀음에 의해 환경이 급격히 변할 때 시장은 중대한 불확실성에 빠진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자가 합리적 판단을 내리기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경제학 교과서를 통해 소비자가 상품을 경제적 합리성에 따라 구매한다고 배웠고, 콩나물 한 봉지 살 때도 이 제품 저 제품 비교하니 독자들 중 대다수도 스스로 그렇다고 믿고 있다. 실제로 몇몇은 매일 가계부를 작성하고, 인터넷에서 가격을 비교하면서 경제적이며 합리적으로 구매한다. 특히 예산 부족에 시달리는 저소득층은 그래야 근근이 연명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 소비자들은 콩나물의 품질, 가격, 중량을 꼼꼼히 따지며 구매를 결정하지 않는다. 또 적지 않은 사람들이 홈쇼핑 광고에 따라 충동적으로 구매한다.

그뿐인가? 부유한 '유한계급'은 실용적 목적보다 이웃에게 자신의 부를 자랑하고자 소비한다. 또 중산층들은 품이 넓은 멀쩡한 양복을 장롱에 처박아두고 요즘 유행하는 꽉 끼는 양복을 비싸게 주고 구입한다. 유행에 뒤처져 사회적 비난을 받을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과시소비'와 함께 '모방소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아가 그러한 유행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으면 소비자는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추종한다. 남이 하니 별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구매하는 것이다! 반면, 이런 사람들도 있다. 아무리 유행하는 '신상'이라도 생명과 환경을 훼손하거나 자원을 심각히 낭비할 경우, 나아가 불공정하게 생산되는 경우 '가치 지향적' 소비자들은 불매운동으로 대응한다. 이런 의식적 불매운동은 '전통'을 존중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존재한다. 경제보다 문화가 소비를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소스틴 베블런(Th. B. Veblen)이 밝힌 바와 같이 우리 대부분은 이처럼 비합리적인 동시에 '사회적', '문화적'으로 소비한다. 그리고 소비하는 방식도 경제적 소득, 사회적 지위와 문화적 습관과 가치에 따라 다르다. 소비자는 결코 동질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 지난 2월 8일 서울 광진구 중곡동 중곡제일시장을 방문해 순대를 구입하는 박근혜 대통령. ⓒ뉴시스

많은 이들이 현대사회를 지식기반경제로 부른다. 고도의 지식과 복잡한 기술이 생산과정은 물론 소비과정에 대폭 투입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식(knowledge)과 정보(information)는 다른 개념이다. 11월 24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스위스를 격파했다는 '정보'를 인지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한번 들으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이런 정보와 달리 고도의 지식이나 기술을 수용자가 곧바로 이해하고 적용하기는 어렵다. 지식이나 기술의 이해 및 적용 가능성은 해당 지식의 특성과 그것을 수용하는 주체들의 인지역량에 따라 다르다. 예컨대, 기술역량이 낮은 중소기업이 매우 어렵고 깊이 있는 지식과 기술을 생산과정에 적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새로운 기술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장년층과 노년층이 컴퓨터나 스마트폰과 같이 혁신적인 제품을 자유자재로 활용하기도 쉽지 않다. 아무리 훌륭한 제품이 공급되더라도 현실시장에서 그것이 소비자들에게 자동적으로 확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시장은 완전하지 않다. 그곳에선 합리적이고 경제적일 뿐 아니라 비합리적이고, 비경제적인 소비자들이 뒤죽박죽 뒤엉켜 있으며 고도의 지식과 복잡한 기술이 제한적으로만 인지되고 있을 뿐이다. 그런 불완전한 시장에서 공급되고 소비되는 상품이 최선의 제품이 아니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소비자가 완전하지 않으니 생산자도 완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완전한 제품을 창조했더라도 그것이 소비자들에게 자동적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실제 시장에서 공급은 그 자체로 수요를 창출할 수 없다.

정치현장도 이런 불완전한 실제 시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불완전성은 경제현장보다 오히려 훨씬 더 강하다. 진보적 지식인과 정치인들은 중산층, 노동자, 서민의 이익을 대변하고자 한다. 개인사를 둘러보면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진정성을 가지고 이러한 목표를 향해 매진하고 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다. 사랑과 열정을 품고 헌신했던 중산층, 노동자, 서민들은 항상 이 이타적 지사들의 헌신과 희생을 배신해 왔기 때문이다. '계급배반'이다. 대선, 총선은 물론 최근 몇 차례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확인되듯이 배신은 더 빈번해지고 그 규모도 커지고 있다. 자주 당하니 모두 어리둥절해지고 포기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나중에 포기하더라도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진보적 지식인과 정치인들이 애정을 가지는 중산층, 노동자, 서민이 완전히 합리적이거나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 중에는 합리적이고 가치지향적인 사람도 있지만 별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판단하며 그냥 남 따라 투표하는 유권자도 많다. 나아가 진보적 지식인들이 공급하는 정책과 이론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유권자도 적지 않다. 뿐만 아니라 한국노총처럼 너무나 경제적이어서 오히려 의식적으로 계급배반을 일삼는 집단도 있다.

이런 뒤죽박죽 불완전 경쟁시장 아래서 진보적 지식인들은 유권자들의 비합리성과 무지에 기대어 흘러간 옛 노래를 틀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이론과 정책을 맹신한 나머지 설득력 있는 이론과 정책에 대한 성찰을 시도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럴 경우 계급배반이라기보다 '계급저항'이라고 불러야 한다.

계급배반 때문이든 계급저항 때문이든, 진보적 지식인과 정치인들은 지금 중대한 과제에 직면해있다. 정책소비자에 대한 진지한 연구와 공급하고 있는 정책과 이론에 대해 뼈아픈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현실 시장에서 공급은 그 자체로 수요를 창출하지 않기 때문이다.

※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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