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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또 잔인한 달 되지 않게 하려면…" [주간 프레시안 뷰] 기억의 장: 권력에 의한 '역사' 거부하는 길
해석과 정의가 초래할 죄악들

곧 세월호 참사 1주기입니다. 여러 가지 것들이 저를 불안하게 합니다. 정부, 여당이 내뱉을 말들, 지식의 가면을 쓴 해석과 정의들이 우리를 얼마나 허망하게 만들지 벌써부터 걱정입니다. 참고 길게 보면 되겠지만 사안이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권력자들은 말로만 위험사회에 대해 경종을 울리겠지요. 또 국가 재난 시스템의 개선을 말하기도 할 겁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무능한 정부에 대한 반성문을 내세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해석적 행위, 정의 내리기 등이야 말로 현실을 호도하거나 무마하는 지식권력의 단골 메뉴입니다. 유가족들의 처절한 아픔은 그들의 해석과 정의 뒤에 가려지고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기 일쑤입니다. 그들의 아픔은 삶 속에서 커가기만 하고 해결의 실마리는 점점 멀어져 가는데도 말입니다.

일반화의 오류가 그 근원에 자리합니다. 참사의 배후에 있는 수도 없는 죄악들은 구체적 실존입니다. 그것에 의한 피해와 아픔 역시 처절한 실존들이고요. 우리는 작년 4월 16일 이후 지금 이 순간까지 그런 실존들을 마주해 왔습니다.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거리로 나서기도 하고 청와대 앞에서 피켓을 들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실존들을 일반화해버림으로써 과제와 교훈만 덩그러니 남는 상황을 맞게 되는 것이지요. 구조의 문제라느니 정신의 문제라느니 하면서, 재난 시스템을 개선하고 국민이 생명을 존중하는 정신을 드높여야 한다고 외침과 동시에 죄악과 아픔의 실존은 사라지고 맙니다.

일반화가 권력에 의해 이뤄질 때 그 심각성은 더해집니다. 권력은 천박한 자본주의, 소통하지 않는 정부의 무책임성, 꿈을 버리게 하는 맹목적 경쟁교육과 같은 근본의 문제는 교묘하게 숨겨버리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일반화를 한다 해도 유가족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이 묻혀버리고 마는 판국에, 근본을 피해 악을 은폐하는 일반화를 한다면 더더욱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가족들은 돈 버느라 아이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지 못했다 울부짖으며 금전만능주의에 물들었던 스스로를 자책합니다. 하지만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은 또 다시 경제만이 살길이라고 외치고 있지요. 대통령과 대화하자고 청운동에서 노숙하던 유가족들에게 불통의 정부는 지금도 문을 굳게 잠그고 있습니다. 꿈을 키우는 참교육에 대한 요구에도 아랑곳 없이 안산에 남은 아이들은 또 다시 학원을 전전해야 합니다. 이미 지식권력에 의한 일반화의 폭력은 작동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권력의 일방적인 해석과 정의가 초래하는 수없는 죄악들을 무기력한 생얼굴로 대면하고 있습니다.

416을 기념한다는 것

아감벤의 호모사케르가 생각납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도, 용산 참사 피해자들도, 밀양의 할머니들도 세상이 몸으로 껴안지 않는, 접촉 불능을 강요당한 존재들이라 할 수 있지요. 지식권력의 해석과 정의는 우리 사회에 수많은 호모사케르를 양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권력과 끊임없이 투쟁하며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 역시 호모사케르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 살아가지 않으려면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의 아픔을 뒷전에 물려두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어렴풋한 죄의식이 아픔의 실존을 잊지 않으려 애쓰는 힘의 원천입니다. 황석영의 말대로 추위에 떨며 죽어가는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우리의 죄의식이 가슴을 휘갈기고 있거늘, 세월호 유가족들의 아픔을 내버려 둔 채 어찌 미래를 논할 수 있단 말입니까?

416을 기념하는 것은 기억하는데서 출발합니다. 그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함께 하고 몸으로 부둥켜 안아 그들을 접촉 불능의 존재로 만들지 않는데서 출발합니다. 벌거벗은 몸에 옷을 입혀주고 음식을 나누며 희미한 희망이라도 함께 나눌 때 비로소 4월 16일을 기념할 여백이 생깁니다. 4월을 앞두고 우리는 안산, 인천으로 몸을 움직여야 합니다. 진정한 기념을 위해서 말입니다. 일상의 패턴을 일부 바꾸지 않는 한 몸을 움직일 수 없답니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철저하게 훈육되어 꽉 짜인 시간표 안에서 살아가는 한 유가족의 아픔을 기억하고 몸을 움직여 함께 하는 일은 무망합니다. 4월이 또 다시 잔인한 달로 다가오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 모두는 일상의 변화를 꿈꿔야 합니다.

조금의 변화가 아니라 삶을 고스란히 바꿔버린 사람들이 416 기억저장소에 있습니다. 엄마의 노란 손수건 오혜란 대표가 그렇고 김종천 기억저장소 사무국장이 그렇습니다. 유가족들의 아픔에 끝까지 함께 하기 위해 하던 일을 모두 버린 사람들입니다. 안산에는 이런 분들이 꽤 있답니다. 치유공간 '이웃'을 운영하고 있는 이명수, 정혜신 부부가 그렇고 사회복지 네트워크의 박성현 복지사가 그렇습니다. 유가족들을 가가호호 방문하며 기록을 수집하고 있는 연극인 임기현씨, 예술학 전공자인 이해리씨 역시 일상의 변화를 실천하는 이들입니다. 기록학을 전공하다 416 기록에 인생을 바치겠다고 뛰어든 기억저장소의 권용찬 팀장과 오윤택씨 역시 같은 경우입니다. 저는 매주 화요일에 한해 안산으로 몸을 움직여 부분적이나마 그들과 함께 하고 있을 뿐입니다. 국가 수준에서 보자면 성과가 미미할지 모르지만 이런 삶들이야 말로 아픔을 나누는 여백을 조금씩 만들어가는 노력들입니다. 기억저장소는 4월 16일을 전후해서 대대적으로 재능 나눔을 조직하려 하고 있습니다. 비는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일상을 변화시켜 함께 하는 문화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4월 16일에 뭘 기념할 거냐고 오혜란 대표에게 물었더니 "사람이 중심이 되는 날이어야지요"하고 간단하게 답합니다. 어느 유가족 엄마에게 물었더니 "아이들이 마음껏 놀며 꿈을 키워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아픔의 실존 속에서 나오는 울림이 큰 목소리지요. 이들의 해석과 정의는 권력의 그것과 너무나도 다릅니다. 국가안전처를 급조하고 진상조사위원회를 훼방 놓는 권력의 행태와는 시작도 결과도 모두 다릅니다. 아픔에 눈감고 근본을 회피하는 권력과는 달리 아픈 가슴 속에서 울려나오는 근본적 해석과 정의입니다. 벌거벗은 인간이 아님을 스스로 밝히는 선언이기도 하고요.

매년 4월 16일은 "사람과 꿈"을 생각하는 날이기를 바랍니다. 5월 18일과 6월 10일이 민주주의를 생각하고, 8월 15일이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생각하며, 10월 9일이 백성들의 깨우침을 생각하는 날이듯이 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기념의 해석과 정의는 일반화의 오류를 극복함을 전제로 합니다. 도처에 존재하는 크고 작은 악에 맞서며 아픔의 실존을 함께 보듬는 일상을 전제로 해야 하지요. 또한 지식권력의 해석과 정의에 맞서 망각의 획책을 무력화하는 투쟁과 함께 해야 합니다. 한 달 후에 우리가 맞을 4월 16일은 그런 날이어야 합니다.

권력에 의한 역사 서술을 거부하는 길

1주년을 맞아 온갖 백서가 난무할지 모릅니다. 어처구니없는 '역사'가 서술될 수도 있고요. 권력이 써내려간 '역사'야말로 '지식'의 폭력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객관적' 자료를 토대로 '전문적 역사가'가 쓴 '역사'로 현장에 존재하는 죄악과 슬픔의 실존을 덮어버리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아니 은폐하고 호도하며 훈육하는 일에 ‘역사’를 이용하지요. 근대 이래 권력들은 ‘역사’를 이용해 복종하는 국민을 만들어갔습니다. 이러한 ‘거인의 역사’에 대항하여 ‘난장이의 역사’를 시도하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권력에 의한 훈육의 효율을 부분적으로 떨어뜨리는데 일조하는 수준이었지요. 기본적으로 ‘역사’는 살아 있는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변경을 불허하는 고정체로서 우리를 훈육하는 성질을 갖습니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우리가 할 일은 이러한 죽은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죄악과 슬픔의 실존들을 있는 그대로 하나하나 불러내어 소통하고 이를 바탕으로 아래로부터의 미래를 생성해내 나가는 것이지요. 416 기억저장소가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기억저장소는 고정체로서의 '역사'를 거부하고 생생한 기억을 소환하여 아픔의 주체들이 스스로 해석하고 미래를 생성해가는 장으로서 역할할 겁니다. '역사'가 고정체이자 소통과 참여를 틀어막는 권력의 수단이라면 기억저장소는 유동체이자 사람이 중심이 되어 소통하고 참여하는 생성의 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416 기억저장소는 권력에 의한 역사 서술을 거부하는 새로운 시도입니다. 기억의 장이 '역사'를 대체하는 실험의 공간이기도 하고요.

416 기억저장소 2호관이 안산 고잔동에 또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1호관이 사무실, 정리작업장, 회합의 장소라면 2호관은 핵심 기록을 저장하고 전시하는 곳입니다. 새로운 건축사협의회의 윤승현 건축가 등과 5개의 건설사가 비용 일체를 대고 자원봉사로 참여하고 있답니다. 2호관 천장에는 희생자들의 기억함 304개가 걸릴 예정입니다. 도기로 제작한 기억함에 희생자들의 일기, 사진, 인형 등을 보존하고 상단에 작은 LED 조명을 달아 하늘의 별을 상징할 것입니다. 기억함이 달려있는 아래 공간에는 전시관이 마련됩니다. 큐레이터 김태현씨의 기획으로 '아이들의 빈 방'이라는 주제의 개관전시가 1주기 2주일 전인 4월 2일을 목표로 준비되고 있습니다. 하늘로 간 꿈의 주체들이 별로 화하여 땅의 빈 방을 밝혀주는 모습을 구현하려 합니다. 아픔의 실존은 별이 된 희생자들의 인도로 새로운 꿈의 미래로 나아가야 합니다. '역사'에 속박되어 머물러 있는 주체가 아니라 기억을 소환하여 아픔을 부등켜 안은 채 새로운 가치를 형성해가는 살아있는 주체가 이 공간에 모일 것입니다.

'416 기억 순례'

기억저장소의 김종천 국장의 제안으로 '416 기억 순례'를 4월부터 시작합니다. 416 기억저장소 2호관의 전시를 출발로 하여 단원고등학교 교실, 기억저장소 서고를 거쳐 유가족들과의 만남으로 이어지는 순례길을 국민 모두와 함께 걷고자 합니다. '역사'의 해석과 정의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기록을 통해 기억을 소환하고 벌거벗은 자들과 아픔을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단원고등학교의 교실이야말로 아픔의 실존 그 자체입니다. 아이들의 사물함, 칠판에 쓰인 친구들의 글과 그림, 방안을 가득 메운 노란 색 포스트 잇, 텅 빈 책상 위에 남겨진 국화 꽃송이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근본의 소리를 듣게 해 줄 것입니다. 기억저장소 서고에 켜켜이 쌓여있는 아이들의 꿈의 기록들, 수도 없이 존재하는 죄악들과의 처절한 싸움의 기록들이 우리의 나약함을 일깨워줄 것입니다. 유가족들과 부등켜 안고 흘리는 눈물과 격려는 그들을 치유하고 우리 모두를 치유할 것입니다.
지식권력의 해석과 정의를 거부해야 합니다. 훈육된 우리의 일상을 작게 혹은 크게 변화시켜 몸을 움직여야 합니다. 운동이건, 자원봉사건, 416 기억 순례건, 몸을 움직여 우리의 새로운 생성을 꿈꿔야 합니다. 권력에 의한 '역사' 서술을 거부하고 우리 스스로 기억을 소환하여 아픔을 끌어안고 미래를 생성해가야 합니다. 2015년 4월 16일을 그렇게 맞이할 때 비로소 우리는 권력 장치의 작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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