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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시범경기 성적을 무시해도 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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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당신이 시범경기 성적을 무시해도 되는 이유 [베이스볼 Lab.] 시범경기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합시다. 프로야구 연습경기-시범경기 승패는 정규시즌 성적과 어떠한 관련도 없습니다. 전승을 하건 전 경기 1점 차 패배를 당하건 전 경기 노히터 승리를 따내든 간에, 시범경기 성적은 그 팀이 실제 시즌에서 거둘 결과에 대해서는 플라나리아 눈꼽 만큼도 설명해주지 못합니다. 시범경기 승패를 갖고 과도하게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를 내고 실망하고 호들갑을 떠는 건 미신적 사고방식입니다. 병을 고치려고 주문을 외우고, 가뭄이 든다는 이유로 족장을 불태워 제물로 바치던 고대인들과 그다지 다를 게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얘기가 마치 ‘시범경기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전지훈련 연습경기도 시범경기도 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실전 경험이 부족한 어린 선수들에게는 한 번 경기가 열 번 연습보다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감독과 코칭스태프에게는 선수들의 기량을 점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언론에는 쉬운 기삿거리를 제공해 줍니다. 전문가들은 구단들이 스프링캠프를 치르는 모습만 봐도 정규시즌 성적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고도 하죠. 지켜보는 팬들에게는 다가오는 시즌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오래전 미국 저술가 제리 아이젠버그가 말했듯이 “스프링 트레이닝 경기를 지켜보는 것은 자라나는 나무를 보는 것만큼이나 흥분되는 일”인 법이니까요.

문제는 이런 시범경기 승패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고, 1경기 결과에 일희일비하고, 시범경기 결과가 페넌트레이스 성적에까지 영향을 줄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미신적 착각이 워낙 널리 만연해 있다 보니, 언제부턴가 KBO리그에서 연습경기와 시범경기의 진짜 목적은 뒷전으로 밀려난 채 이기고 지는 승패만 부각되는 분위기입니다. 스프링캠프에서 정말 중요한 ‘과정’은 생략되고 아무런 의미 없는 ‘결과’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흔히 ‘결과보다는 과정’이라고 하죠? 이 말이 스프링캠프 기간만큼 완벽하게 들어맞는 때도 없을 겁니다. 스캠 연습경기와 시범경기에서는 정말로 결과가 아닌 과정만이 중요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연습경기-시범경기에서 승리는 최우선 순위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건 선수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원래 운동선수들은 지고는 못 사는 사람들입니다. 재미로 장기 한판을 두더라도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종족이죠. 시범경기라고 다를 게 있나요. 선수들은 항상 최선을 다합니다. 다만 승리를 목적으로 경기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승리가 목적인지 아닌지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가령 삼성 류중일 감독에게 내재적 접근법으로 다가가 보기로 합시다. 만약 정규시즌에서 삼성 감독이라면 어떤 식으로 경기를 해야 할까요? 승리가 최우선 목적인 만큼, 이기기 위한 선수 구성으로 경기에 임할 겁니다. 선발로는 윤성환이나 외국인 투수를 써야 이길 확률이 높겠죠. 삼성은 7일 첫 시범경기에서 정인욱을 선발로 내세웠습니다. 선발투수가 잘 던지고 있다면 5회가 지났어도 내릴 이유가 없겠죠? 8일 경기에서 차우찬은 5회까지 무실점으로 잘 던졌지만 6회부터 교체됐습니다. 그리고 선발투수가 초반에 대량실점으로 흔들린다면 바꾸는 게 상책이겠지만, 12일 LG전에서 삼성 클로이드는 1회 2점-2회 4점-3회 2점을 줄 때까지 마운드에서 버텼습니다.

반드시 이기고 싶은 감독이라면 라인업에 최형우를 빼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11일과 12일 삼성 선발 타순에는 최형우 대신 박찬도가 출전했습니다. 이기는 게 목적이라면 나바로 같은 거물을 일찌감치 교체하는 일은 하면 안 되겠죠. 11일 KIA전에서 삼성은 5회 이후 나바로-박석민-박한이를 모두 교체했습니다. 경기 후반부는 신인급과 1.5군급 선수들이 돌아가며 출전했습니다. 한파로 취소된 10일에는 이승엽 등 주전이 전부 빠진 타순이 전광판에 표시되기도 했죠. 어떻게든 이겨야 하는 감독이라면 1-2점 차로 뒤진 상황에서는 경험 많고 믿을 만한 투수를 내놓을 겁니다. 7일 두산전에서 3-5로 뒤진 7회 삼성은 원더스 출신 중고신인 김동호를 올렸고, 김동호는 아웃 하나 잡지 못하고 4점을 내줬습니다. 감독들은 꼭 이기고 싶은 경기에서는 으레 희생번트를 시도하곤 하죠. 12일까지 4경기 치르는 동안 삼성의 희생번트는 ‘0’개였습니다.

이게 승리가 목적인 정규시즌과 그렇지 않은 시범경기의 차이입니다. 시즌 때는 모든 팀이 이기기 위한 경기를 합니다. 최상의 투수와 타자들을 배치하고, 가진 전력을 모두 쏟아가며 온갖 전술과 수단을 동원해서 승리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정규시즌에서는 이기고 지는 결과가 의미 있고 중요합니다. 시범경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라인업에는 골수 팬도 처음 보는 선수들이 등장하고, 에이스는 2회만 던지고 마운드를 내려갑니다. 1점 차에서 절대 기용하면 안 될 투수가 마운드에 오르고, 그 포지션에 절대 써서는 안 되는 선수가 맞지 않는 글러브를 끼고 뛰어다닙니다. 경기 후반이 되면 아마도 시즌 개막하면 두 번 다시는 보기 힘들 희한한 라인업이 필드를 가득 채웁니다.

시범경기는 승리를 추구하는 기간이 아닙니다. 정규시즌에서 더 많은 승리를 따내기 위한 발판을 만드는 기간입니다. 선수들은 겨우내 쉬었던 몸을 움직이고, 운동장에 서서히 적응시켜 시즌 개막 ‘땅’과 동시에 스타트할 준비를 합니다. 오프시즌 기간 새로 익힌 구종을 테스트하기도 하고, 일부러 같은 구종이나 코스만 계속해서 던지기도 합니다. 바뀐 타격폼을 점검하고, 새로운 포지션에 도전하고, 과감한 작전이나 수비 로테이션을 테스트합니다.

시범경기 기간에 감독은 후보 선수들을 고루 기용하며 동기를 부여해 주고, 기존 주전 선수들에게도 긴장감을 불어넣으려 시도합니다. 그러다 보니 시범경기는 퓨처스리그 선수와 1군 선수들이 한데 뒤섞여 선수들의 경기력 수준이 천양지차입니다. 엘리트 투수와 일류 타자들만 상대해야 하는 정규 시즌과는 달리, 1군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투수와 타자를 계속해서 마주치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후보나 신인 선수들과 스타 선수들의 처지는 전혀 딴판입니다. 후보 선수들은 스캠 기간부터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지위가 보장된 스타 선수들은 정규시즌 개막에 맞춰 컨디션을 조절합니다. 선수와 팀의 진짜 실력을 가려내기에는, 시범경기 성적에는 너무 많은 노이즈(noise)가 끼어 있습니다. 여기서 의미있는 신호(signal)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게다가 시범경기는 경기수가 너무 적기 때문에, 여기서 나온 기록은 통계적으로 거의 가치가 없습니다. 천하의 이승엽도 시즌 중 10경기만 떼어놓고 보면 1할대로 부진한 기간이 있고, 천하의 심수창도 시즌 5경기만 따로 보면 엘리트급 피칭을 선보이는 시기가 있는 법입니다(지금 다시 기록을 찾아보니 그런 기간은 없군요). 2013년 4월까지 리그 타율 1위는 LG 김용의(0.420)였고, 같은 기간 KIA 홍재호가 0.409, 넥센 허도환이 0.393을 치고 있었습니다. 시즌이 끝났을 때 김용의는 0.276을, 홍재호는 0.194를, 허도환은 0.215라는 숫자를 남겼습니다. 팀으로 말하자면, ‘봄데’라는 좋은 역사적 선례가 있기도 합니다. 샘플 사이즈가 충분하지 않은 성적은 신뢰할 수 없는 기록입니다. 팀당 고작 14경기를 치를 뿐인 시범경기 성적이 바로 그런 예입니다.

시범경기 성적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건 역사적 데이터를 통해서도 입증됩니다. <베이스볼 Lab.>은 최근 5년간(2010~2014) KBO리그 구단들의 시범경기 승률과 정규시즌 승률의 상관관계를 조사해 봤습니다. 상관계수는 0에 가까울수록 상관관계가 없고 1에 가까우면 상관관계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죠. 만약 상관계수가 음수일 경우에는 두 변수가 관계가 없는 수준을 넘어 아예 반대로 움직인다는 의미가 됩니다. KBO 시범경기와 정규시즌의 상관관계는 어땠을까요. 결과는 아래 표와 같습니다.


놀랍게도 시범경기-정규시즌의 상관계수는 음수인 -0.049가, R제곱 값은 0.0024가 나왔습니다. 성적과 실제 시즌 때 성적이 완전히 따로 놀았다는 얘기입니다. 혹시 승률이 아닌 순위를 비교하면 다르지 않을까 해서 조사해 봤지만, 역시 음수값이 나오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뉴욕 닉스의 승률도 이것보다는 높습니다. 아마 제가 먹은 아침밥과 타일러 스위프트의 몸무게의 상관관계를 구해도 저거보다는 더 높게 나타날 겁니다. <비욘드 더 박스스코어>의 조사에 따르면 경기수가 많은 미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의 경우에는 이보다는 높은 0.219의 상관계수가 나타났다고 합니다만, 이 또한 거의 의미가 없는 수치인 건 마찬가지입니다.

자, 사정이 이런데도 우리가 굳이 시범경기에서 이기고 지는 것에 열을 올리면서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요?

이쯤에서 잠시 포털 사이트 스포츠 섹션을 장식한 헤드라인을 봅시다. 여기서는 매년 이맘때면 나오는 한국야구만의 독특한 풍습을 보게 되는데요, 바로 스캠 연습경기와 시범경기 결과를 마치 정규시즌 경기처럼 스코어와 승패 위주로 ‘대서특필’하는 이상한 풍습입니다. 가령 전지훈련 기간 지나치게 집중 조명을 받은 KIA의 연습경기 연패 행진이 그런 예입니다. ‘충격의 9연패’ ‘깊은 한숨’ 같은 표현이 연습경기 결과를 설명하는데 아낌없이 동원됐습니다. 막상 시범경기에서 KIA가 승리를 거두자, 이제는 “KIA의 반전드라마” “확 달라졌다” “우리 KIA가 달라졌어요” 등의 표현이 등장하고 있죠.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 화제를 몰고 다니는 한화는 “오키나와 3연승”이 화제가 되더니, 시범경기 첫 경기 승리 후에는 “눈부셨던 야신의 재림” “역시 김성근” 등이 제목을 장식했습니다. 제목만 보면 한국시리즈 우승 소식과 헷갈릴 정도입니다. 심지어 LG 상대로 한 점차 패한 뒤에는 “달라진 한화? 1점야구서 가능성 보였다”는 헤드라인도 나왔습니다. 세상에, 단 1경기, 그것도 시범경기 1경기를 갖고 어떤 가능성을 볼 수 있다는 것인지 도저히 상상도 되질 않는군요. 그 외의 보도를 봐도 승패와 스코어에만 방점이 찍힌 제목이 대부분입니다. 제목들만 봐선, KBO리그 구단들은 시범경기를 다들 목숨 걸고 치르나 싶을 정도입니다.

이는 메이저리그 시범경기를 다루는 미국 매체들과 비교되는 대목입니다. 한번 시범경기가 끝난 직후 ESPN 사이트를 들어가 볼까요. 톱에는 2014 포스트시즌이 바꿔놓은 세인트루이스 2루수 콜튼 웡의 야구 이야기가 걸렸습니다. 그 외에는 다르빗슈의 팔꿈치 부상, 클리프 리의 은퇴 고려 소식, 클루버 재계약 소식 등 시범경기 승패와는 무관한 헤드라인이 대부분입니다. 시범경기 결과가 나온 기사는 딱 하나인데, 화제의 인물인 에이로드가 첫 홈런을 때려냈다는 ‘중요한’ 소식입니다.

CBS, 야후, SI 등을 살펴봐도 비슷합니다. 스타 선수들의 부상 소식, 에이스급 투수들의 복귀 소식이 많습니다. 컵스의 시범경기 연패 때문에 매든 감독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소식이 있긴 하지만, 시범경기 승패와 점수를 경마식으로 중계하는 헤드라인은 찾아보기 힘들군요. 아무래도 미국 쪽 매체들은 시범경기 승패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그래서 비중 있게 다룰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모양입니다.

스프링캠프 기간에 정말로 중요한 건 결과로 나오는 숫자가 아니라, 내용이고 과정이며 그 안에 담겨 있는 수많은 스토리입니다. 그리고 이를 멋지게 풀어내기란, 연습경기 1경기 승리를 갖고 월드시리즈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호들갑 떠는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게 마련입니다. 국내에서 유독 한 경기에 일희일비하는 뉴스가 넘쳐나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겠죠. 이기고 지는 차원을 넘어선다는 건 응원하는 팬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연습경기이고 의미가 없다는 걸 이성으로 알고 있어도, 응원팀이 이기면 기쁘고 지면 속상한 게 팬의 마음이니까요. 또 온통 성적에만 초점을 맞추는 뉴스들 속에서 전혀 무관심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도 쉬운 일만은 아닐 겁니다.

스프링캠프와 시범경기는 즐거운 시간이어야 합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정규시즌에 겪게 될 응원팀 성적에 대한 집착과 고통에서 벗어나,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플레이를 말 그대로 ‘즐길’ 수 있습니다. 단골 꼴찌 팀 팬들도 항상 이맘때는 온갖 희망과 비전으로 가득합니다. 야구장은 따뜻한 봄햇살과 바람, 막 자란 잔디의 냄새가 가득하고 야구장 콘크리트 내음마저도 반갑게 느껴집니다. 무엇보다 겨우내 그토록 갈망하던 야구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합니다. 이 모든 벅찬 즐거움을, 아무런 의미도 없는 승패 따위에게 빼앗겨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니, 그냥 이 시간을 원 없이 즐기도록 합시다. 시범경기 기간이 주는 행복을 아무것도 방해하지 못하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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