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남재희 기고] 기자로 비밀당원 된 정태영 씨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남재희 기고] 기자로 비밀당원 된 정태영 씨 [고난 속 꿋꿋이 산 사람들·⑤] <죽산 조봉암 전집> 6권을 낸 학구파
아주 유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명도 아닌, 그러면서 고난의 길을 걷기도 하고, 역사에 의미도 없지 않은 인물들이 있다.

때로는 좌절의 인생이기도 하고, 때로는 회색 지대의 인물이기도 하다.

내가 직접 만났고 사귀었던, 그런 흔히 간과되기 쉬운 인물 10명쯤에 조명을 비추어 본다. 전기가 아니고 스케치다. (필자)

2000년대 초께로 기억되는데 정태영(鄭太榮) 씨가 마포대교 근처의 시내 쪽에 있는 한신빌딩의 오피스텔에서 '한국사회민주주의연구회'’를 결성하여 정기적으로 세미나를 활발히 하고 있었다. 나는 정치에서 은퇴한 후 비교적 한가한 때라 친구인 그가 주재하는 모임에 자주 가보았다. <영국노동당사>를 저술하여 이름이 알려진 고려대학의 고세훈 교수가 유럽 사회민주당들의 복지정책에 관하여 주제 발표를 한 것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한신대의 박영호 교수, 한림대의 유팔무 교수 등이 기억에 남아 있다.

한국사회민주주의연구회는 프레스센터에서 대규모의 토론회를 가졌으며, 이어서 그 뒤의 음식점에서 화기애애한 뒤풀이 회식도 즐겼었다. 정태영 씨는 내가 자주 나가니 연구회의 임원이 되어달라고 요구하며 고문 자리를 제시한다. 고문 명단을 보니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 반대로 유명한 예춘호 전 국회의원도 포함되어 있다. 예 의원은 내 둘째 딸의 시아버님이다. 그래서 사돈 둘이 고문이 이상하지 않느냐고 나이가 아래인 나는 급을 낮추어 자문위원 정도로 해달라고 하여 그리된 모양이었다.

나는 그 모임에 깊이 개입은 하지 않았었는데 그 후 시일이 지나 정태영 씨를 한번 만나니 낙담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장기표, 박영호, 유팔무 씨 등이 연구회를 이끌고 가서 한국노총과 손을 잡고 사회민주당인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연구회를 확실히 발전시킬 생각만 하였지, 정당으로 전환할 생각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당으로 간 사람들에 대해 배신을 당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마지막으로 총회라도 한번 열어 총회 결의를 하자고 하였으나 그들이 끝내 듣지 않고 결행해 버렸다"고 한탄했다. 그러면서 자기 사무실을 썼고 자기가 들인 돈만 해도 억대가 넘는다고 푸념이다. 나는 친구이기에 "몇천만 원 썼겠지…"하고 오히려 약간 농담하듯 대응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연구소가 소멸한 데에 그는 오래도록 비통한 생각을 하고 만날 때 나에게 그 푸념을 되풀이하였다. 주위를 편안케 하는 유명한 너털웃음을 뿌리기도 하면서.

일찍이 혁신정당운동을 시작하여 형무소 생활을 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경제적 여유가 있었든가 하고 궁금할 것이다. 그의 부인이 대단한 사업수완을 발휘하여 생활 무능력자인 그를 계속 지원했다는 이야기다. 부인은 진보당 사건이 있기까지 초등학교 선생을 했다. 그는 60세가 거의 다 되어 고려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가 석사학위를 하고 60세가 훨씬 지나 건국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삼성동의 인터컨티넨탈 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출판 기념회를 한다고 하여 놀라서 가보았다. 혁신 정치가가 그렇게 화려한 호화 행사를 여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다. 그가 박사 학위를 받은 <한국사회민주주의 정당사> 출판기념회였던 것 같다. 나중에 그에게 놀랐다고 말하니 "와이프가 절대 정치 참여를 안 한다는 조건부로 출판 기념회를 열어주었다"고 설명한다. 여하간 혁신 정치가 가운데는 운이 튼 사람이다.

정태영 씨에 관해서는 송병헌 박사의 '사회민주주의 실현을 향한 꿈과 여정 – 고 정태영 선생 생애의 기억과 기록'이라는 약전(略傳)이 있다. 비교적 정확한 기록일 것으로 생각한다.

정태영 씨는 1931년 전북 익산 출신으로 서울 문리대 수학과를 나온 후 진보당에 '정동화'란 가명으로, 그러니까 비밀 당원으로 입당했다. 그리고 바로 1957년 동양통신 외신부 기자 시험에 합격하여 기자가 되었다.

정태영 씨가 진보당에 관하여 소개한 글 가운데 재미있는 것은 죽산의 이른바 '용광로론'이다.

"장건상, 정화암 등은 진보당 창당준비위원회에 참가하고 있는 인사들이 우로는 진보적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좌로는 전 공산주의자도 있고 무정부주의자도 있으니 이념의 선통일이 긴요하다고 주장했으며, 이에 대해 죽산은 이념 설정의 선결을 기하려면 신당 발족은 백년하청이 될 것이며 정당은 정치단체이지 사상연구단체가 아니므로 진보주의자들을 한 가마 속에 털어 넣고 쇠는 쇠대로 금은 금대로 가려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차이가 장건상, 정화암 등 민주적 사회주의 원로들이 진보당 운동에서 떨어져 나가게 한 이유였다."


맞는 말이다. 학술 단체가 아닌 정치 단체, 즉 정당은 조직 역학상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송 박사의 약전 가운데 '7인회'와 '여명회' 설명도 참고가 된다.


"진보당의 특수 조직은 구체적으로 '7인회'와 '여명회'라는 2개의 청년층을 중심으로 한 비밀조직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수사당국의 발표를 종합하면 '여명회'는 1957년 1월 주로 학생들을 중심으로 권대복, 조규택 등이 김달호 법률사무소에서 조직한 것으로, 진보당 사건이 있기 전까지 54명의 비밀 당원을 포함했다고 한다. '7인회'는 1957년 9월 28일 동당 조직부 차장 전세룡과 비밀 당원 정태영의 주동으로 정치학술연구회라는 명목 아래 조직되어 매주 토요일 1회씩 집회를 가지면서 운영되었으며, 조직 원칙의 내용을 살펴보면 조직원으로서의 자격 요건과 충성도에 매우 엄격한 기준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태영 씨는 '7인회'는 수사 기관이 붙인 이름으로 비밀 조직이 아니고 학습회 비슷한 모임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서울시당의 상무위원이었다고.

진보당 사건이 났을 때 정태영 씨가 죽산에 '강평서'를 제출했다 해서 그게 마치 어떤 비밀 지령문처럼 선전되어 신문에 크게 났었다. 정태영이란 이름을 그때부터 알게 되었다. 그때의 희미한 기억으로 남는 것은 정태영 씨가 진보당사에 양담배가 굴러다니고 있다고 호되게 비판한 것이다.

실제로 강평서를 보니 갓 대학을 졸업한 지식인이 정성을 다하여 만든 정치이론서 같다. 정당의 기본 방향부터 구체적 활동 내용까지 그 나름대로는 정성을 다하여 만든 문서다. 물론 생경한 개념들을 많이 쓰고 "인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등등 당시에 유행하던 마르크시즘 구절들을 그대로 동원하였다. 읽고 나면 정태영 씨가 역시 사상 청년이었구나 하고 느껴진다. 작은 활자의 책자로 9페이지에 이르는 비교적 긴 글인데 끝부분에 가면 비교적 구체적이고 알기 쉽다. 물론 치기 어린 유치한 주장도 많다. 중간과 끝부분만 전문 인용한다.

7. 집권한 경우 해결해야 할 문제
• 정권 유지를 위한 정책적 제 조처
(a) 강경조처(군, 경)의 완전한 접수
(b) 현명한 경제정책(진보당 정치 하에서의 현저한 인민적 이익을 보여주어야 한다.)
(c) 노조, 협조의 조직 강화
우리의 정치적 기반은 협동조합과 노조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노동 계급이 충분히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농민 및 어민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에 주목하면서 협동조합 강화에 특히 힘써야 한다.
(d) 정권 교체에 따르는 진보당 집권 시의 정치적 경제적 제 업적이 전복되지 않게 입법조치를 취하고 그 법에 어그러지는 반대당의 당 강령을 말살시킬 것
예: 대기업 내지 공기업의 국유화 -> 사유화 방지
(e) 당 이데올로기의 적극적 선전(사회주의에 대해서)
(f) 우리 이데올로기의 실현을 위해서는 장기적이며 안정된 정국이 요청되므로 반대당에게 집권을 시켜서는 안 된다.
※ (a), (e)는 우리가 정권을 잡기 위한 투쟁 대상이기도 하다. 현 단계에 있어서 진보당의 성격은 국민적 당이라고는 하나 그 정책적 유형을 제 제도에서 찾아본다면 그것은 노동당, 즉 계급 당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미래의 이념이 그런 이상 어디까지나 조직이 그곳에 기반을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14. 만약에 신문이 안 될 경우 잡지만은 급히 발행해야 된다. 우리는 모든 활동에 있어서 가능한 장래를 고려하여 행동의 제1, 제2, 제3... 등등 방안을 미리 세워 신속히 신사태에 대처해야 된다.

느낀 점
① 당원 명부는 당의 심장이다. 어느 때 어떠한 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 그 명부를 함부로 굴린다는 것은 말이 아니다.
② 당위원장의 방에 양담배가 굴러다니는 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좋지 못한 일이다.
③ 진보당 문헌에 왜 한자를 썼는지? 우리 당은 대중 당이다. 우리 노농대중은 한자에 익숙지 못하고 있는 사실은 모르는지.

정태영 씨가 대학 졸업 후 이른바 '강평서'를 작성하였을 때에 사상 청년이었고 치기 어린 유치한 주장도 했다고 했는데 그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송병헌 박사가 쓴 '약전'을 읽어보는 게 도움이 된다.

"해방이 되고 나서는 학교가 좌우대립이 심해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고 교과 담당 선생들도 한 달에 한 명꼴로 바뀌었기 때문에 혼자서 자습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6.25라는 참혹한 민족적 비극을 경험하면서 '왜 우리 민족이 이러한 비극을 겪어야 하는지' 더욱 회의적이 되었습니다. (중략) 비극은 꼭 겪어야만 하는 것인가? 어느 쪽이 옳은가? 자본주의인가 사회주의인가 라는 학문적 호기심이 앞섰던 것이지요. 당시에 혼자서 <자본론>도 원전으로 공부했습니다. '노동가치설'을 비롯하여 마르크스주의 경제학도 원전으로 접했고 마르크스 레닌 선집 등도 섭렵했습니다. 그때 도달한 결론이 바로 사회민주주의였습니다. 볼셰비즘은 너무나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이며 독단적인 면이 있어서 좀 더 인간적인 면, 요즘 고르바초프와 같은 생각을 했던 거지요. 나 나름대로 온건한 사회민주주의적인 노선으로 입장을 정리하고 있을 무렵 진보당이 나왔던 겁니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시정하고, 공산주의의 극단적인 면을 시정하는, 이러한 중간적인 노선이 결국은 우리나라를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남북이 좌우로 대립된 이른바 '해방공간'에서 사상적인 고민을 한 대학생, 지식인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이야기이다.

정태영 씨가 한 일 가운데 중요한 것은 <죽산 조봉암 전집> 6권을 1999년 세명서관에서 간행한 일이다. 권대복 씨 및 오유석 박사와 함께 편자로 되어 있으나 일은 편집위원장인 정태영 씨가 주동이 되어 추진하였다.

1권: 죽산 조봉암 선생 개인 문집
2권: 죽산 조봉암 선생 활동 자료
Ⅰ: 일제하부터 미군정까지
3권: 죽산 조봉암 선생 활동 자료
Ⅱ: 1948년 ~ 1958년까지
4권: 진보당 관련자료
5권: 진보당 사건 및 명예회복자료
6권: 한국 현대사와 조봉암 노선

위와 같은 구성으로 되어 있는데 가히 죽산과 진보당에 관한 백과사전 격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친구라고 나에게도 지면을 주어 '진보당 사건의 진상 규명과 죽산 선생의 신원'이란 제목으로 변변치 못한 글을 실었다.

전집에 실린 정태영 씨의 글 '죽산 조봉암 선생의 죽음과 복권' 가운데 다음 부분이 특히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인용한다.

"사형이 집행되기에 앞서 절차에 따라 입회목사가 특별히 요청할 말이 없냐고 묻자, 죽산 선생은 예수가 빌라도의 법정에 세워졌을 때의 성경구절(누가복음 23장 22절 ~ 23절)을 읽어달라고 했다 한다.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헌데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이것은 아마도 자신의 처지가 바로 그때의 예수의 처지와 흡사함을 암시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려 했던 무리들이 죄 없는 자기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죽이는구나 하는 심경을 토로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학자인 오유석 박사는 진보당 사건에 관한 자료를 마련해두기 위해 2005년 세 차례에 걸쳐 정태영 씨를 면담, 녹음을 하였다. 귀중한 자료인데 그 가운데 관심이 가는 몇 가지를 소개한다.

제2대 국회에서 국회 부의장이 된 경위이다. 죽산은 그동안의 정치 활동으로 민족주의자들과 친분이 있고, 좌우 합작운동을 했던 정치인들과도 관계가 좋았다. 의장에는 신익희 씨와 조소앙 씨가 경합했다가 신익희 씨가 당선되었다. 조소앙 씨는 의장에 나갔다가 차마 부의장에 나가기가 곤란하게 되고, 죽산은 그 세력을 그대로 이어받고 거기에 국회의 소장파들을 묶어가지고 부의장에 당선되었다고 한다.

둘째 죽산은 이승만 박사에 의해 부산 정치파동 후 숙청된 이범석 장군의 민족청년단 계통을 포용하는 데 힘을 썼다는 것이다. 죽산이 민족청년단 세력과 손을 잡으려 노력한 데 관해서는 이영근 씨의 글 '진보당에 이르기까지'에 오히려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민족청년단은 중경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 참모장이었던 이범석 씨를 중심으로 조직된 것으로서 (중략) (그 민족청년단의) 중견간부 이하는, 때마침 이승만 대통령이 강행하고 있던 청년단체의 일원화-어용적 '대한청년단'의 결성에 응하지 않고 중앙, 지방 할 것 없이 그 조직기반을 다지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게다가 다행히도 그 조직의 부단장인 노태준(盧泰俊) 씨에 장악되고 있었다. 노태준 씨는 독립운동 사상 유명한 노백린(盧伯麟) 장군의 실자로서 8.15 전 유일한 미식장병(现代风格裝兵) 부대였던, 광복군 제2지대장을 맡고 있던 부자 2대에 걸친 애국자이다...조봉암 선생을 만난 그는 금방 서로 뜻이 맞아, 함께 농업협동조합 조직을 추진하고 그 책임을 맡기로 했다."

정태영 씨의 진보당 이후의 정치 행보는 죽산 다음 진보당의 지도자였던 윤길중(尹吉重) 씨의 행보와 비슷하다. 정태영 씨뿐만 아니라 권대복(權大福), 안준표(安俊杓) 씨 등도 대개 윤길중 씨를 따랐다. 4.19후에는 <민족일보>로 옮겨 일하기도 했고 통일사회당의 통일추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삼선개헌 반대투쟁을 계기로 야당 진영이 호헌투쟁으로 묶일 때 윤길중 씨도 가담했으며 정태영 씨도 나중에 신민당에 합류하여 노농국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로부터 오랜 후 윤길중 씨가 민정당에 참여했을 때 정태영 씨도 역시 합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윤길중 씨가 이름을 써넣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의 유대관계로 볼 때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합류는 합류였을 것이다.

잔류한 진보당 사람들 다수는 윤길중 씨 사무실로 모여들었다. 생활이 궁한 사람은 서도의 대가인 청곡(靑谷) 윤길중 씨의 붓글씨를 몇 점 얻어가서 알음알음으로 팔아서 생활비에 보태기도 하였다. 청곡의 붓글씨는 그가 야당 할 때는 꽤나 값이 나갔다. 여당을 하고 나서는 폭락한 모양이지만 말이다.

정태영 씨가 남긴 현실정치에 관한 조언 가운데 기록으로 남아 있는 한 가지를 소개하고 싶다. 2006년 8월 당시의 민주노동당에 관하여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나름의 집권 스케줄을 갖고 있으니 20년만 애정을 갖고 지켜봐 달라'고 하는데, 현실을 전혀 그렇지 못해요. NL(민족해방)-PD(민중민주) 계열 간의 주도권 싸움에, 비현실적인 얘기만 하는데 어떻게 국민들이 미더워하겠어요. 당장 당원들의 부인들조차 민노당에 투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가 보기에 현재 민노당을 비롯한 진보진영은 과거 진보운동의 전철을 되밟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진보운동은 정권의 탄압이나 냉전 같은 외적 요인에 의해 좌절됐다고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게 모든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진보운동이 현실에 기초를 튼튼히 둔 이념적 좌표를 세우지 못하고, 당내 정파들의 조급한 헤게모니 투쟁으로 분열해 대중에게서 유리됐기 때문입니다."

▲ 진보당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정태영 씨가 별세 전인 지난 2006년 <경향신문>과 한 인터뷰.


2008년 그가 작고하여 강남성모병원 영안실에 갔더니 그를 따르던 젊은 연구자들이 많이 와 있고 거기서 그의 부인을 처음으로 만났다. 여동생도 만났는데 매우 활동적인 여성으로 전북에서 야당으로 도교육위원을 지내기도 했단다. 정태영 씨의 집은 정미소를 하는 등 유복했던 것 같다. 진보당 사건이 났을 때 경찰이 몰려와 구둣발로 방안을 샅샅이 뒤지는 봉변을 당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상가에서 가끔 느끼는 일이지만 대개의 경우 언론에 부음 기사를 내는 일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태영 씨의 경우도 학자들이 그런 일에 방심하고 있었다. 내가 재촉을 하여 언론 기관에 연락을 하고 추모의 글도 부탁하고 하여 <한겨레>에 서중석 교수의 추모문이 크게 날 수 있었다. 역시 상가에는 나이 많은 사람들의 조언이 필요하다.

진보정당에 관한 연구가 깊은 조현연 교수는 '한국 민주화와 진보정당운동'이란 그의 논문을 정태영 씨의 책 <조봉암과 진보당: 한 민주사회주의자의 삶과 투쟁>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인용하면서 끝냈다.

"안타깝게도 오늘의 진보 세력은 과거에서 배우려는 노력이 크게 부족하다. (중략) 많은 사람들이 진보 운동은 정권의 탄압이나 냉전과 같이 외적 요인들에 의해 좌절되었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이 사실의 모든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측면은 진보운동이 현실에 기초를 튼튼히 둔 이념적 좌표를 세우는 데 실패하고, 조직에서 건전한 작풍을 만드는 데 실패하고, 당내 정파들의 조급한 헤게모니 투쟁 때문에 분열하고, 결과적으로 대중으로부터 유리되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사회민주주의연구회의 2001년 11월 19일 한국 프레스센터에서 있은 창립대회의 자료가 보관되어 있어 앞으로 혹시나 참고가 될까 하여 식순과, 창립선언문, 그리고 그 임원을 소개한다.

1. 식순

등록(6:00-6:30)

제1부: 창립대회(6:30-7:20)
진행: 송병헌(한성대 겸임교수)

-경과보고
-창립선언문 낭독
-창립총회

제2부: 창립 기념 토론회(7:30-9:30)
사회: 박영호(한신대 교수)

발표1: 왜 사회민주주의인가?
발표: 유팔무(한림대 교수)

발표2: 한국 사회민주주의의 방향과 과제
발표: 윤도현(현도사회복지대 교수)

토론: 윤건차(서울대 초빙 교수), 정범구(국회의원, 민주당), 조희연(성공회대 교수), 주대환(민주노동당, 마산지구당 위원장)

2. 창립선언문

현재 세계는 위기를 겪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빈곤의 세계화를 낳고 있으며, 테러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이 보여주듯이 인류는 전쟁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한국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세계화로 인하여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으며 아직도 한반도에는 평화체제가 구축되지 못하고 있다.

위기는 대안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 몰락으로 공산주의적 대안은 역사적 실패로 끝났다.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시장주의가 승리를 구가하고 있지만, 시장과 경쟁만능주의는 일국 내에서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사회적 문제들을 방치해 놓고 있다.

냉전의 볼모로 반세기를 지낸 우리 한민족은 독립된 자주통일 국가를 건설하지 못한 채 남북으로 분단되어 비극적인 분단체제를 지속해오고 있다. 그동안 이러한 냉전체제의 질곡 속에서도 민중들은 양극체제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왔으며, 진보세력들은 사회의 민주화와 민중의 해방된 삶을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이 몰락한 이후, 신자유주의의 공세가 강화되고 있고, 내적으로는 명확한 대안과 장기적 전망의 부재로 인해 시민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 등이 표류하고 있다. 아직도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미망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 거시적 대안을 포기한 채 미시적 대안에만 몰두하는 현상들도 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사회민주주의의 길을 추구하거나 관심을 가진 일단의 지식인, 활동가들은 사회민주주의의 이념과 정책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교육, 홍보하기 위한 연구회를 만들었다.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이다.

사회적 약자를 소외시키고 불평등을 방치하는 자본주의는 장기적인 생명력을 가질 수 없다. 반면 구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는 많은 민중의 열망을 담은 혁명을 통해 형성되었고 역사적 의의를 지닌 것이었기는 하지만, 결국 인간해방이라는 원래의 목적을 스스로 배반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라는 19세기 및 20세기의 거대한 변혁이념을 나름대로 결합하고자 노력했으며, 이론적 독단에 항거하면서 점진적이지만 지속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인간해방을 위해 헌신해온 이념이자 사회체제이며 실천적 노력이었다. 이러한 사회민주주의의 중심 가치는 확대된 민주주의와 연대이다. 사회민주주의는 모든 사회구성원을 포괄하며 오직 '더불어 살아가는' 연대적 삶을 지향한다.

우리 한국 사회민주주의연구회는 이러한 사회민주주의의 오랜 역사 속에 간직되어온 가치와 이상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옹호하고자 한다. 우리는 우익으로부터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라고 규정받는 것을, 좌익으로부터는 수정주의 및 개량주의로 비난받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면서, 사회민주주의가 보편적 민주주의의 범주에 속하는 것일 뿐 아니라 민중의 이해를 지속적으로 대변하는 민중적이고 진보적인 이념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사회민주주의의 보편적 원칙에 기초하는 동시에 여러 나라들에서 발전되어 온 사회민주주의의 특수한 측면과 정책적 차이에 주목하면서, 우리 사회에 역사적 당위성과 현실적 적합성을 가지는 한국적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정립하고 이에 따른 구체적인 정책들을 연구, 개발하면서 이를 국민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그리하며 우리 한국 사회민주주의연구회는 한국의 진보세력들이 서로 아집에 사로잡힘이 없이 장기적인 공통의 전망을 중심으로 연대하는 데 기여하고자 하며, 아울러 일반 국민의 여전히 두터운 냉전의식의 벽을 조금씩 허무는 데 일조 하고자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많은 유사한 연구단체들이 생성, 소멸되어온 역사를 알고 있다. 예상되는 어려움이 적지 않지만 말 없는 다수 인사들의 성원과 격려에 힘입어 생명력 있는 연구회로 발전시켜 나갈 것임을 감히 약속드리는 바이다.

뜻을 같이 하는 많은 분들의 성원을 기대해 마지않는다.

2001년 11월 19일
한국 사회민주주의연구회
창립 발기인 일동

3. 공동대표 및 감사, 기타 임원 내정자

<대표> 정태영, 주섭일, 박영호

<고문> 이태영(전 호남대 총장), 김병태(전 건국대 경영대학원장), 예춘호(한국사회과학연구소 이사장), 지용택(새얼문화재단 이사장)

<감사> 박노영, 이재봉(원광대 교수)

<자문위원> 남재희(전 노동부 장관), 김영태(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서중석(성균관대 교수), 김용기(전 고려대 교수)

<운영위원> 당연직: 정태영, 주섭일, 박영호, 정병호, 유팔무, 윤도현, 허상수, 송병헌, 김정훈, 홍영용
임명직:

<연구소> 소장: 유팔무
- 역사/이론 연구분과 위원장: 송병헌
- 정책 연구분과
- 정당정치 연구분과
- 사회운동 연구분과

<아카데미>
원장: 정병호
부원장: 허상수

<편집/홍보위원>
위원장:
실장: 김정훈

<사무처>
처장: 윤도현
국장: 홍영용

<지역연대 모임>
- 서울/강원/제주
- 경기/충청
- 영남
- 호남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원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