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 소년의 눈동자는 검푸른 바닷빛을 닮았다. 물속에서 누구보다도 몸놀림이 자유로웠던 아이, 그래서 검푸른 바닷속에서도 끝끝내 헤엄쳐 나오리라 믿었던 아이. '슬라바'로 불리던 그 아이. 고(故) 세르코프 야체슬라브 니콜라예비치.
야속하게도 시간은 잘도 흐른다. 1주기를 겨우 버텨낸 지가 언제라고 400일이 돌아왔다. 그럼 곧 또 500일이 오겠지, 그러다 1000일이 지나겠지… 날짜를 셈해본들 부질없는 일이다. 세상을 떠난 아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어머니 올가 씨는 서툰 한국말로 말한다.
"슬라바 없어. 슬라바 방도 없어. 물건도 다 버렸어. 슬라바 오지 않아."
"한국 사람 되려고 주민등록증 기다리고 있었는데…"
세월호 400일을 일주일 앞둔 지난 13일, 4.16기억저장소의 개인기록수집팀과 함께 경기도 안산시 슬라바의 집을 찾았다. 한눈에 봐도 슬라바와 똑 닮은 짙은 쌍꺼풀, 새하얀 피부, 갈색 머리의 올가 씨와 그의 남편 어성태 씨가 우리를 맞이했다.
이들 부부가 처음 만난 건 1996년, 각자 온 부산 여행에서였다. 서로 마음을 확인했지만, 다문화 가정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편견을 아는 어 씨는 올가 씨를 다시 러시아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슬라바는 그 이듬해인 1997년, 어머니 올가 씨의 고향인 러시아 체르케스크 옆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줄곧 러시아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던 슬라바는 10살 때인 2006년 한국에 와 정착했다.
러시아에 있을 때 어머니에게서 한국말을 조금 배웠다지만, 학교 생활을 하기에는 부족한 한국어 실력이었다. 다행히 안산은 이주민이 많은 동네라, 슬라바가 다니던 초등학교에는 이주민 자녀들을 위한 특수반이 있었다. 특수반에는 일본, 중국, 스리랑카 등에서 온 20명의 친구가 있었다. 일과 중 절반은 원래 배정된 반에서 수업을 받고, 절반은 특수반에서 각기 다른 언어를 쓰는 친구들과 함께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한 수업을 들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원곡동에 있는 '코시안의 집'에서 또 한국어를 배웠다.
"적응 못 할까 봐 걱정이 많았죠. 슬라바는 문제없다는데 성적이 별로였어요. 제가 만날 효자라고 놀렸어요. 엄마 이름이 '올(all) 가'인데, 애 (성적)도 '올가'더라고요. 슬라바 뒤에 대여섯 명밖에 없었어요."
공부에는 영 자질이 없던 슬라바지만, 몸 쓰는 일에선 재능을 드러냈다. 처음엔 태권도를 했지만, 초등학교 4학년생 치고 키가 큰 데다 팔다리가 긴 체격 조건을 생각한 부부는 슬라바를 수영 학원에 보내기로 했다. 다행히도 슬라바가 수영에 흥미를 보였고, 1년쯤 지나자 코치가 정식으로 배워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왔다.
"원래는 슬라바를 귀화 안 시키려고 했어요. 외국인이 10년 체류하면 외국인 전형으로 대학을 쓸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해서라도 대학에 보내려고 했는데, 도 대표나 국가 대표로 수영 대회에 출전하려면 국적이 한국이어야 한다고 해서 할 수 없이 귀화를 신청했죠."
중학교 3학년 이후, 슬라바는 수영보다 모델 일을 하고 싶다며 운동을 그만뒀다. 선수 생활을 안 할 바에야 귀화도 필요 없겠다 싶었지만, 슬라바는 한국 사람이 되겠다고 했다. 부모는 슬라바 뜻을 존중해 예정대로 귀화 절차를 밟았다.
한국인이 되기 위한 과정은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꼬박 3년을 기다려 어머니 올가 씨와 함께 주민등록 날인을 겨우 한 게 지난해 3월, 사고 나기 불과 한 달 전이었다.
"주민등록증 9월에 나온다고 그거 기다리고 있었는데…"
"성이 '슬'이고 이름이 '라바'야?"
슬라바가 한국에 정착한 이후 러시아에 다녀온 건 2008년 딱 한 번이었다.
"할머니랑 나랑 셋이 한 달 정도 갔는데 친구들이랑 뭘 하고 놀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어. 그다음부터는 여행 가자고 해도 러시아 가자는 얘기 안 했어."
러시아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지만, 슬라바는 러시아말보다 한국말이 편하다고 했다.
"러시아말 발음 어려운 건 잘 못해. 엄마보다 한국말 훨씬 잘해."
러시아에서는 어머니가 슬라바에게 한국말을 가르쳤지만, 중학교에 가고 난 후부터는 슬라바가 어머니의 한국어 선생님이 되었다. 공부는 잘 못했지만 슬라바는 학교 생활에, 한국 생활에 완벽 적응했다. 학교에서 슬라바는 '외국인처럼 생겼는데 영어는 못하고, 잘생겼는데 털털하고 재밌는 인기 짱'인 아이였다. (☞관련 기사 : "텅 빈 급식실, 애써 웃는 아이들이 안쓰러워요") 1학년 때는 덜컥 반장에 뽑히기도 했다.
"갑자기 담임 선생님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슬라바가 반장이 됐다고요. 딱 보니까 인기투표 같더라고요. 우리 어릴 때는 당연히 공부도 잘하고 집도 잘 사는 아이가 반장을 했잖아요. 그래서 슬라바 반장 시키기 싫다고 했어요. 반장 부모 되면 학교도 들락날락해야 하니까…. 그런데 다행히 학교에서 한 번도 안 부르더라고요."
슬라바를 처음 보는 친구들은 자신과 다른 생김새의 슬라바를 신기해했다. '슬'이 성이고 이름이 '라바'냐고 묻는 친구도 있었다. 그때부터 슬라바의 별명은 '라바'가 됐다. 친구들이 놀릴 때마다 털털한 성격이었던 슬라바는 장난스레 넘어갔지만, 사실 슬라바는 이름을 바꾸고 싶어 했다.
"내가 반대했어. 태어날 때부터 슬라바는 슬라바인데 왜 이름을 바꾸려는 거야. 내가 싫다고 했더니 슬라바도 '알았다'고 했어."
'슬'이 성이고 이름이 '라바'는 아니었지만, 슬라바는 학교에서 시험 볼 때 편의상 OMR 카드 이름난에 성은 '슬', 이름은 '라바'라고 적었다. 슬라바 이름에 얽힌 에피소드는 또 있다.
"'라바'라는 애니메이션이 있어요. 슬라바랑 동생 준성이랑 버스 타고 가다가, 버스 안에 있는 TV에서 라바가 나와서 준성이랑 그 얘기를 하고 있는데, 슬라바가 자기 얘기하는 줄 알고 화를 내더라고요. 하도 친구들이 '라바야, 라바야' 이러니까. 준성이랑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금요일마다 슬라바 형 기다리던 준성이
준성이는 슬라바의 하나뿐인 동생이자, 슬라바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이었다. 슬라바는 띠동갑 차이 나는 준성이를 갓난 아기 때부터 거의 키우다시피 할 정도로 돌봤다. 준성이도 형을 무척 잘 따랐다.
"준성이한테 '가족 중에 누구 제일 사랑해?' 하고 물으면 형이라고 했어. 준성이가 크면 버스기사 될 거라고 해서, '그럼 엄마아빠 공짜로 태워줄 거야?' 하면 '아니' 하고 '근데 형은 공짜로 태워줄 거야' 라고 했어."
평일에 늦게까지 함께 일하는 부부는 주말엔 영화를 보러 나갔다. 슬라바는 부모님 없이 준성이와 집에서 둘만 있을 수 있는 주말을 무척 좋아했다.
"우리 보내고 둘이 집에 있는 걸 그렇게 좋아했어요. 주말마다 '영화 보러 안 가? 늦게 와' 이랬어요. 우리가 집 비우면 슬라바가 준성이 밥도 먹이고, 목욕시키고, 재우고. 형제끼리 진짜 사이가 좋았죠."
부모가 2층 침대를 사 줘도 둘은 늘 1층 침대에서 꼭 껴안고 잤다. 사고 나기 전날인 15일에도 슬라바는 학교에 가기 전, 바쁜 부모를 대신해 준성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줬다.
"형이 준성이 배웅하면서 약속했었나 봐요. 금요일에 올 거라고. 준성이가 금요일마다 형을 기다렸어요."
사고 당시 여섯 살이었던 준성이는 이제 일곱 살이 되었다. '금요일에 돌아온다'던 형은 수많은 금요일이 지났는데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준성이는 이제야 죽음의 의미를 알아가는 중이다.
"이제는 형이 못 온다는 걸 준성이도 알아. 지금은 형 좋은 곳으로 보내달라고 기도해. 준성이가 슬라바 대신 러시아말 공부해."
"아들 마지막 모습 기억도 안 나는데…"
헤어짐을 예감했다면 차라리 나았을까. 부부는 준비 없이 맞이한 이별이 너무 아팠다.
그날, 4월 16일. 부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사무실에서 분주하게 일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몹시 바빴던 터라 휴대전화를 확인할 시간도 없었다.
"엄마가 단원고에서 문자가 왔다고 했는데, '(수학여행) 잘 가고 있다는 거겠지' 생각하고 그냥 안 봤어요. 한창 바쁠 때 지나서 다시 확인하니, 전원 구조라느니, 몇 명 구조라느니 그런 내용이었어요."
낌새가 이상한 걸 느낀 어 씨는 인터넷을 뒤져보고서야 사고 소식을 알았다. 아내만 남겨둔 채 서둘러 사무실을 떴다. '설마'하고 가 본 학교는 한마디로 난장판이었다. '잠깐 진도에 갔다 온다'며 아내에게 대충 둘러댄 뒤 다른 학부모들과 함께 진도행 버스를 탔다. 거짓으로 아내를 안심시키기를 이틀째, 결국 올가 씨는 혼자 버스를 타고 진도에 갔다. 분노와 한숨이 여기저기 쏟아지는 지옥 같은 팽목항에서 애끓는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슬라바는 사고 닷새 만인 21일, 77번째로 부모 곁에 돌아왔다. '구조'가 아닌, '수습'이었다.
"수영을 잘하는 앤데…. 마지막 모습이 뭔지 기억도 안 나는데…."
띄엄띄엄 이어지던 말이 이내 끊겼다. 부모는 할 말을 잃은 듯했다. 한참 만에야 올가 씨가 다시 말문을 뗐다.
"슬라바는 친구들이랑 여행 가도 연락을 안 해. 16일에도 연락 안 하고, 15일 저녁에 하도 전화가 안 와서 전화했는데 바람 소리만 들려서 내가 '알았어, 알았어' 하고 끊었어."
어 씨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말했다.
"15일에 손님이 와서 공항에 가느라 다른 집처럼 '사랑해, 잘 다녀와' 이런 얘기를 못 했어요. 수학여행 가는 날인지도 그날 알았어요. 원래 남자애들이 그렇죠."
씁쓸한 웃음을 짓던 어 씨는 "그래도 제가 이렇게 무심했나 싶더라"며 마른세수를 했다.
"슬라바가 4반인 걸 진도 가서 알았어요. 먹고 살려고 보니까 몰랐어요. 저도 매일 밤 9시, 10시에 들어오고, 그런데 애들은 그때 자서 아침에나 잠깐 얼굴 보니까. 아무리 그래도 참 무심하지 싶더라고요. 어떻게 반도 몰랐을까…. 평소에 같이 좀 많이 놀아줄 걸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이렇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대놓고 보상금 물어보는 사람들… 너무 힘들어요"
잊을만하면 덮쳐오는 죄책감은 부모를 고통 속에 몰아넣는다. 부모를 힘들 게 하는 건 '기억'만이 아니다. 주변의 시선과 야유는 더욱 그들을 아프게 찌른다.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나를 TV에서 봤대. 그러면 내가 정색하면서 '잘못 봤어'라고 말 해. 요새는 대놓고 보상금 얼마냐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어. 그리고 아빠 보면서 친아빠 맞느냐고 물어보고. 그럼 아빠한테 귀 막으라고 하고 가던 길 가. 도대체 왜 그런 걸 묻는 거야. 이해할 수 없어. 너무 힘들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올가 씨는 슬라바 사진을 들여다봤다.
- 세월호 1주기 특별기획, 고잔동에서 온 편지1부. 아이들의 빈 방<2> "월요일 점심 카레라이스 기다리던 소녀는 왜…"
<3> "교복 입은 긴 머리 소녀 보면 숨도 못 쉬겠어요"
<5> "이모에서 엄마 된 지 8년, 듬직했던 우리 큰아들…"
<7> "아프다고 수술받는 것도 죽은 딸한테 미안해요"
<8> "아들이 조립한 컴퓨터도 그날, 작동을 멈췄다"
<9> "'거위의 꿈' 부르던 보미 목소리가 듣고 싶어요"
<10> "우리 강민이 옷, 죽을 때까지 입을 거예요"
<12> 아이들의 빈 방에 놓인 어른들의 숙제
2부. 아직 4월 16일을 사는 사람들
<14> "세상 밑바닥 본 1년…아직 손 내밀고 있어요"
<15> "텅 빈 급식실, 애써 웃는 아이들이 안쓰러워요"
<17> 기억은 침몰 않게…"망각의 바다서 꺼내줄게"
3부. 4월 17일을 준비하는 사람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