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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 병원' 명단 공개, 왜 늦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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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메르스 병원' 명단 공개, 왜 늦어졌을까? [다시 읽기] '위험의 세계화'와 '무너진 공동체'
주말 오후, 서울 명동 거리가 한산했다. 중국인 관광객이 뿌리는 돈으로 흥청대던 거리의 활기는, 중동에서 건너온 바이러스 앞에서 확 시들었다.

돈과 병을 함께 움직이는 '세계화'. 우린 종종 잊고 지낸다. 대항해 시대 이후, 유럽이 주도한 세계화의 원동력이 볼리비아 포토시 광산에서 무진장 캐낸 은이었다는 걸. 그리고 스페인 정복자들이 포토시 은광을 손에 넣는 과정은, '병균의 세계화'이기도 했다.

낯선 존재와의 교류는 '부자가 될 기회'와 '환자가 될 위험'을 함께 키운다. '세계화' 흐름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돌아보자는 게다. 잇따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세계화'의 문은 열만큼 열었다. 그와 동시에 늘어난 위험에 대해, 우린 얼마나 준비가 돼 있나.

지난 역사는 반대 방향이었던 모양이다. 사스(SARS)가 유행했던 노무현 정부 당시와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가 번지는 지금을 비교해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사스 예방 모범국'으로 꼽혔던 한국이 '메르스 숙주'로 주변국의 비난을 산다. 나라 안팎을 넘나드는 사람과 상품은 계속 늘어났는데, 함께 들어오는 바이러스 위험에 대비하는 공공 의료 수준은 오히려 뒷걸음질 했던 탓이다.

'위험의 세계화'에 대한 책을 소개한다. 그리고 낯선 바이러스가 공동체를 어떻게 망가뜨리는지를 묘사한 소설을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세계화'의 그늘 속으로 들어온 바이러스를 소재로 한 영화를 소개하겠다.

<닥쳐라, 세계화!>"'위험의 세계화', 그보다 위험한 '절망'"

<닥쳐라, 세계화!>(당대 펴냄) 저자인 엄기호 박사를 인터뷰한 건, 미국 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가 한창이던 2008년 5월이었다. (☞관련 기사 :"'위험의 세계화'…손 놓은 정부, 싸우는 시민")

급격한 세계화는, 대표적인 '신선 식품'인 스시마저 세계화 했다. 화물 운송 및 식품 보관 기술의 진보와 맞물린 결과다. 그러나 한계도 분명하다. '먹을거리 세계화'에 따른 위험은, 몇 가지 기술로 해결할 수 없다. 광우병 위험이 있는 쇠고기의 수출입이 고도로 복잡한 정치경제 사안이었다는 걸, 지금은 다들 안다. 활발해진 교역의 결과로, 들어오게 될 낯선 바이러스에 대한 대응 역시 마찬가지일 게다.

저자는 "에이즈, 인간 광우병, 조류 독감 등의 지구적 확산은 국민 국가가 더 이상 시민의 안전을 지켜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말했다.

"이른바 '세계화'라고 불리는 흐름 속에서 국민 국가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이와 함께 근대적인 국민 국가의 존재 근거 역시 흔들리고 있다. 국가가 해야 할 기본적인 역할은 '시민의 안전 보호'다. 이는 국민 국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생겨난 일종의 합의다. 그런데 이런 합의가 깨지고 있다. '세계화'라는 명분 앞에서 국가가 기본적인 역할조차 내팽개치고 있기 때문이다. 식품이 생산지에서 소비되던 과거와 달리, 지구 전체로 전달되면서 질병도 함께 세계화되고 있다. 하지만 '세계화'로 인해 이익을 누리는 집단을 대변하는 각국 정부는 이런 위험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세계화'로 인해 이익을 누리는 집단을 대변하는 각국 정부."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2013년 홍준표 경상남도 지사의 진주의료원 폐쇄 논란이 잘 보여줬다. '질병 세계화'의 위험에서 시민을 지키려면, 공공 의료 확대가 필수적이다. 공공 의료 확대와 축소는 다양한 세력의 권력 관계가 결정한다. 어떤 권력이 센지에 따라, 우리가 누리는 공공 의료 수준이 정해진다. 그래서 한숨이 나온다. 공공 부문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높게 쳐주는 세력이 잇따른 선거에서 졌다. 그럼, 계속 한숨만 쉬어야 하나. 저자는 아니라고 한다.

"흔히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데올로기의 가장 핵심에는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라는 주장이 있다고들 한다. 공식적으로는 신념에 가득 차서 '이것이 대안이다'라고 외치는 사람들조차 돌아서서는 '대안은 없어'하고 중얼거린다.

그래서 많은 좌파들, 특히 지식인들이 가장 과격한 언어로, 그러나 패배주의에 가득 찬 태도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와 지역·시민 사회로부터 지금까지 관리되고 통제되기만 했던 사람들이 세계화의 바닥에서부터 직접 나서서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싸움을 하며 희망의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에이즈에 걸려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당한 채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까지 농노이기만 했던 사람들이 싸우며 희망을 만드는 이야기다.

도저히 싸움이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 그렇지만 분명히 싸우고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나는, 세상은 여전히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고 가장 절망적인 곳에서조차 활동은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안은, 논리적으로 완결된 모델이 아니다. 중요한 건, 현장의 울림이 던지는 영감이다. 저자가 종종 "운동권은 '비장미' 좋아하다 망했다"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예정된 패배를 미화하는 정서, 사실은 퇴폐적 낭만주의"라는 게다.

<28>…'한갓 가축이니까'라고?

정유정 작가의 수작이다. 메르스와 같은, '인수공통전염병(人獸共通傳染病)'이 소재다. 동물로부터 사람에게 감염되는 병인데, 메르스는 박쥐에서 시작해서 낙타를 거쳐 사람에게 전염됐다고 알려졌다. 소설 <28>(은행나무 펴냄) 속 전염병 '빨간 눈'은 개에게서 비롯됐다.

바늘 하나 꽂을 틈 없는, 탄탄한 문장. 간호사 출신 작가의 경험과 지식이 묻어나는 생생한 묘사. 한마디로 '잠 도둑' 소설인데, 한번 잡으면 초여름 밤이 후딱 지나간다. 출간 직후 작가 인터뷰를 소개한다. (☞관련 기사 : 온 몸에 피 흐르는 '괴질'의 정체, 생매장된 개의 '진실'!)

작가는 '인수공통전염병'이라는 소재를 택한 계기가 구제역 파동이라고 했다. 돼지를 몰살하는 장면을 뉴스로 본 뒤, 이런 구상을 했다고.

"내게는 그 (돼지 몰살) 뉴스 동영상의 쇼크가 메가톤급이었다. 처참한 심정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끝까지 다 본 다음 죄책감과 부끄러움 때문에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다. 인간이 이러다가 처벌받을 거다, 동물이 화를 당하면 인간도 화를 당할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 공멸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뉴스 댓글을 보니까 더 잔인했다. '한갓' 가축이니까 그렇게들 말하는 거겠지만, 동물을 도구화하는 시선이 너무 잔인하다고 느꼈다.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본질적인 가치,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가치들을 가지고 있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 종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그 본질적인 가치가 달라지는 걸까? 만일 농장에서 키우는 가축이 아니라 집 안에서 키우는 개를 소재로 한다면 좀 충격을 받을까 싶었다."

인간의 극단적인 이기주의. 그게 공포와 만나면 공동체가 무너진다. <28>에는 "전염병을 막기 위해 도시가 폐쇄되고 비상 상태에 놓인다는 설정"이 잘 그려져 있다. 광주 5.18 항쟁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 많다. 전라남도 함평 출신인 작가는 15살 때 5.18 항쟁을 경험했다.

"근대사의 가장 큰 상처는 광주다. 아직까지 암매장된 사람이 몇 명인지 모르고, 실종자로만 남아있는 이름들도 많으며, 사망자 수치도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내가 15살 때 광주 항쟁을 겪었기 때문에, 부분부분 상황을 안다. 도청 앞 상황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광주 도로에 차들이 죽 서있었고, 공수부대가 학생들을 폭행하던 풍경 말이다.

도시를 통제하려면 당연히 계엄군이 들어오게 된다. <28>을 쓰면서 광주의 모습이 필요했다. 5.18 자료집에서 군대가 움직이는 경로라든가 명령 계통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어떻게 도시를 장악하는지를, 특히 5월 17일부터 마지막 진압을 끝내고 물러가는 날까지의 기록을 유심히 봤다. 그리고 시민들 역시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반응하고 평화 행진을 했는지를 살펴보면서 <28>의 화양을 축조해간 거다. 5.18의 향기가 날 수밖에 없다.

그때 광주에선 폭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계엄군과 충돌할 때만 총소리가 났지, 시민들 자체는 고요했다. 자기 자식이 죽어가고 있으니 아주머니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학생들을 위해서 김밥이랑 주먹밥을 싸서 시청 앞으로 부지런히 날랐을 따름이다."

<감기>…'비열한 국회의원과 멋진 대통령', 현실은?

소설 <28> 속 폐쇄된 도시 '화양'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가 있다. 김성수 감독이 연출하고, 장혁과 수애가 출연한 영화 <감기>다. 경기도 분당에서 전염병이 돈다. 정부는 도시를 폐쇄하고, 권력으로 시민을 통제한다.

영화 도입부는 '위험의 세계화'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동남아시아에서 값 싼 노동력을 몰래 들여온다. 한국에 있는 누군가가 이익을 얻기 위해 한 짓일 텐데, 이 과정에서 전염병이 함께 들어온다.

공황 상태에 빠진 중산층 도시 분당. 흥미로운 건 상황에 대처하는 권력의 모습이다. 분당이 지역구라는 국회의원은 지독히 무능하고 비열한 모습이다. 반면, 대통령은 단호하고 책임감 있다. 국민을 보호하는 아버지 같은 모습이다. 비열한 입법부와 아버지 같은 행정부.

박정희, 박근혜 부녀가 생각한 정치 모델도 이런 것 아닐까. 박정희는 죽을 때까지 의회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오죽하면 '유정회' 의원을 직접 임명했을까. 박근혜 대통령도 마찬가지. 최근의 국회법 논란은, 의회 정치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시각을 확인시켜 준다. 그들 부녀에게 의회 정치란, 일종의 낭비다. 강하고 효율적인 행정부가 잘 작동하면, 세상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과연 그런가. 실제 현실은 아주 복잡하다. 입법부를 구성하는 정치인은, 생각만큼 비열하지 않다. 시험으로 뽑힌 관료와 전문가는, 생각만큼 공정하지 않다. 이해 관계로 굴절된 행정은, 기대만큼 효율적이지 않다. 이리저리 휘어진 행정 체계를 바로 펴는 힘은, 결국 시민에게서 나온다. 주권자인 시민이 정치와 행정에 늘 관심을 가져야 한다.

'메르스' 유행을 둘러싼 최근 상황이 이를 보여준다. 관료와 전문가가 무능했던 건, 그들의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었다. 그들 역시 이해 관계자였다. '메르스 병원 명단' 발표는 왜 이렇게 늦었던 걸까.

▲영화 <감기>의 한 장면. ⓒ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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