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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폭력을 겪을 때만 우리는 진실을 찾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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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폭력을 겪을 때만 우리는 진실을 찾아 나선다" [들뢰즈 1995+20 ④] 서동욱이 뽑은 들뢰즈의 명구절
철학 책은 어렵다. 그러나 철학자의 문장 하나 직접 맞보지 않고 그 철학자를 접했다고 할 수 있을까?

철학자 서동욱 서강대학교 교수가 <프레시안> 독자를 위해서 들뢰즈 철학의 핵심을 드러내주는 중요 구절을 들뢰즈의 저작에서 직접 발췌해 소개한다. 일견 당혹스러울지라도, 들뢰즈를 편하게 가공한 해설이 아니라 들뢰즈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뛰어난 문장가로 알려진 들뢰즈의 글들이 보석을 건네주리라.

철학에 대해서

철학은 항상 개념을 창출해내는 데 있습니다. 나는 형이상학의 지양 혹은 철학의 죽음에 관하여 근심해본 적이 없습니다. 철학은 늘 (…) 개념들을 창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철학 대신 아무도 그것을 해줄 수가 없습니다. 물론 플라톤의 '경쟁자들'에서 차라투스트라의 익살 광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에는 늘 경쟁자가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경쟁자는 '개념'이라든가 '창조적'이라는 말들을 흡수해가는 정보 과학, 전달 매체, 상업적 선전 등입니다. (…) 이 같은 세력들 앞에서 철학은 왜소하고 외로워 보입니다. 하지만 철학이 만일 죽게 된다면, 그것은 웃다가 죽은 것일 것입니다. (<대담>(김종호 옮김, 솔 펴냄))

철학, 예술, 과학은……두뇌가 카오스에 잠겨 카오스와 대적하기 위해 타고 가는 세 개의 뗏목들, 세 개의 구도들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이정임·윤정임 옮김, 현대미학사 펴냄))

진리 탐구란 무엇인가?

'누가' 진실을 찾는가? 그리고 '나는 진실을 원한다'라고 할 때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프루스트는 인간이란, 설령 순수하다고 가정된 정신이라 할지라도, 참된 것에 대한 욕망, 진실에 대한 의지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구체적인 상황과 관련하여 진실을 찾지 않을 수 없을 때, 그리고 우리를 이 진실 찾기로 몰고 가는 어떤 폭력을 겪을 때만 우리는 진실을 찾아 나선다. 누가 진실을 찾는가? 바로 애인의 거짓말 때문에 고통 받는 질투에 빠진 남자이다. 찾기를 강요하고 우리에게서 평화를 빼앗아 가는 어떤 기호의 폭력이 늘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프루스트와 기호들>(서동욱·이충민 옮김, 민음사 펴냄))

<국가론>에서 플라톤은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구별되는 사물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사유를 활동하지 않는 채로 내버려 두거나, 사유에다가 그저 구실에 불과한, 활동이라는 외관만을 씌워 두는 사물이다. 다른 하나는 사유의 재료를 주고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사물이다. 전자는 재인식의 대상이다. 모든 능력들은 이 재인식의 대상에 대해 실행된다. 그러나 재인식은 능력들의 우연한 실행이며, 재인식이란 예컨대, '저건 손가락이야', 저건 사과야, 저건 집이야 등으로 표현되는 판단이다. 반대로, 우리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또 다른 사물들이 있다. 그것은 '재인식할 수 있는' 대상들이 아니다. 그것은 폭력을 쓰는 사물들, 우연히 '맞닥뜨리는' 기호들이다. (…) 감각적 기호는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것은 기억력을 동원하고 영혼을 움직이게 한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영혼이 사유를 움직이게 하고 사유에다 감성이 당하는 압박을 전해 준다. 그리고는 마치 본질이 사유되어야 하는 유일한 것인 듯이 사유에게 본질에 대해 사유하도록 강요한다. (<프루스트와 기호들>(서동욱·이충민 옮김, 민음사 펴냄))

▲ 질 들뢰즈(1925~1995년). ⓒsocialpolicy.gr

서양 존재론을 쇄신하다

1) 차이와 반복

동일성이 일차적이지 않다는 것, 동일성은 원리로서 현존하지만 이차적 원리로서, '생성을 마친' 원리로서 현존한다는 것, 동일성은 차이나는 것의 둘레를 회전한다는 것. 이런 것이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의 내용이다. 이 혁명을 통해 차이의 고유한 개념을 찾을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차이는 미리 동일한 것으로 설정된 어떤 개념 일반의 지배 아래 묶여 있는 것이 아니다. 니체가 영원회귀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영원회귀는 동일자의 회귀를 의미할 수 없다. (…) 회귀는 존재이다. 하지만 오직 생성의 존재일 뿐이다. 영원회귀는 '같은 것'을 되돌아오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성하는 것에 대해 회귀가 그 유일한 같음을 구성하는 것이다. (…) 차이에 의해 산출되는 이런 동일성은 '반복'으로 규정된다. (<차이와 반복>(김상환 옮김, 민음사 펴냄))

2) 생성이 곧 존재이다

존재란 없으며, 모든 것은 생성 속에 있다.……존재는 있는 그대로의 생성의 존재이다. (<니체와 철학>(이경신 옮김, 민음사 펴냄))

3) 시뮬라크르(허상)가 근본적이다

시뮬라크르는 퇴락한 복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원본과 복사본, 모델과 재생산을 동시에 부정하는 긍정적 잠재력을 숨기고 있다. 적어도 시뮬라크르 속에 내면화된 발산하는 두 계열들 중, 그 어느 것도 원본이 될 수 없으며 그 어느 것도 복사본이 될 수 없다. (<의미의 논리>(이정우 옮김, 한길사 펴냄))

정신 분석 비판과 정치 철학

욕망이 어머니에 대한 욕망이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욕망이라서 욕망이 억압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욕망이 억압되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욕망이 이런 가면을 쓰는 것은, 욕망의 가면을 설계해서 이 가면을 욕망에게 떡칠하는 억압 아래서일 뿐이다. (<안티 오이디푸스>(김재인 옮김, 민음사 펴냄))

역사와 정치에서 정신 분석의 수치에 대해 한마디 하겠다. 그 절차는 잘 알려져 있다. 위인(위대한 인간)과 군중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역사는 이 두 존재물, 이 두 꼭두각시, 즉 '위대한 갑각류'와 미친 '무척추동물'로 되어 있다고 주장된다. (…) 히틀러는 아버지를 죽이고 나쁜 어머니의 힘들을 자기 속에 풀어놓으며, 루터는 아버지를 내면화하고 초자아와의 타협을 확립한다. 다른 한쪽에는 군중이 있는데, 군중 역시 2차적인 부모 이미지, 즉 집단의 부모라는 이미지에 의해 오이디푸스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안티 오이디푸스>(김재인 옮김, 민음사 펴냄))

욕망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이다. 혁명적인 것은 욕망이지 축제가 아니다! 또한 어떤 사회라도 참된 욕망의 정립을 허용할 수 있게 되면 그 착취, 예속, 위계의 구조가 반드시 위태로워진다. (…) 욕망이 그 사회를 본질적으로 위협한다. 따라서 욕망을 억압하고 나아가 탄압보다 더 나은 것을 찾아내어 탄압, 위계, 착취, 예속이 그 자체로 욕망되도록 하는 것이 사회로서는 사활이 걸린 중대한 일이다. (…) 욕망은 혁명을 '바라지' 않는다. 욕망은 그 자체로, 저도 모르게, 자신이 바라는 것을 바람으로써 혁명적이다. (<안티 오이디푸스>(김재인 옮김, 민음사 펴냄))

전복적 힘을 끌어들이는 예술의 힘

1) 낯선 말의 창조로서 문학

글을 쓰기 위해서는 모국어는 불쾌한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어떤 통사적 창조가 거기서 일종의 외국어를 그려나가도록, 그리고 언어 활동 전체가 모든 통사법을 넘어 자신의 바깥을 드러내도록 말이다. (<비평과 진단>(김현수 옮김, 인간사랑 펴냄))

2) 그림, 천편일률적인 것에서 낯선 것으로

사실 미학의 모든 문제는 예술을 일상적 삶으로 끌어들이는 데 있다. 우리의 일상적 삶이 표준화되고 천편일률화되면 될수록, 또 점점 더 소비 대상들의 가속적 재생산에 굴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수록, 그 만큼 예술은 더욱더 일상적 삶에 집착해야 한다. 그리하여 더욱더 이 일상적 삶에서 어떤 작은 차이를 끌어내어 반복의 다른 수준들 사이에서 동시적으로 유희하게 만들어주어야 한다. (…) 이 모든 것은 결국 본연의 차이가 가장 기이한 선별을 끌어들일 수 있는 어떤 힘, 그 자체가 어떤 반복적인 분노에 찬 힘과 함께 표현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함이다. (…) 회화 부분에서 팝아트가 모사(copi), 모사의 모사 등등을 밀고 나가 결국 모상이 전복되고 허상(simulacre)으로 변하게 되는 그 극단의 지점까지 이르는 방식을 보라.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펴냄))

3) 판에 박힌 것과 싸우는 미술

판에 박힌 것, 판에 박힌 것들! 우리는 세잔 이래로 상황이 정리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 판에 박힌 것에 대한 저항마저도 판에 박힌 것들을 양산해 냈다. (…) 판에 박힌 것들에 대한 투쟁은 무시무시한 일이다. (…) 위대한 화가들은, 진정한 웃음, 진정한 변형을 얻기 위해서는 판에 박힌 것을 자르거나, 학대하고 개작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안다. 베이컨은 자신에 대해서 세잔과 마찬가지의 엄격함을 가진다. 그리고 세잔과 마찬가지로, 적이 나타나자마자 많은 그림을 상실하였거나 혹은 포기하고 그것들을 던져버렸다. (…) 베이컨에 따른다면 베이커에게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몇몇의 머리들이고, 한 두 개의 공중 삼면화이며 남자의 넓은 등 하나이다. 하나의 사과와 한두 개의 꽃병 이상의 전쟁이다. (<감각의 논리>(하태환 옮김, 민음사 펴냄))

▲ 서동욱 서강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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