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의 '국가 개조 프로젝트'였던 4대강 사업, 그리고 7년. 그동안 아픈 눈으로 강과 강 주변의 변화를 지켜보았고, 그 힘들의 움직임을 지켜보았으며 그 과정을 기록으로 남긴 지율 스님과 예술가들이 '4대강 기록관'을 지으려 합니다. 기록관은 모래강 내성천의 개발을 막기 위해 내성천의 친구들이 한평사기로 마련한 내성천 하류, 낙동강과 인접한 회룡포 강변 대지 위에 세워지게 됩니다.
이 연재는 기록관 짓기에 함께할 여러분을 초대하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
"수혁아, 아빠의 할머니야. 어릴 때 날 키워주셨어!"
아빠에게 엄마, 아빠는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할머니도 없을 줄 알았다. 아빠에게 나 말고 다른 가족이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너에게는 증조할머니고! 어서 인사드려!"
"아이고, 이게 누고? 내 새끼 아이가!"
증조할머니는 호미를 들었던 손을 털며, 호미처럼 굽은 등을 일으켜 나와 아빠를 맞았다. 흙빛 가득한 손으로 내 등을 쓰다듬었다.
"살아 있으면 됐다. 고마 됐다"
눈물을 훔치는 할머니 옆으로 먼 산만 바라보는 아빠가 서 있었다.
댓돌위에 신발을 벗어 두고 TV와 낡은 밥솥과 낮은 서랍장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빠는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천장 근처에 매달린 액자를 오래도록 보았다. 교복을 입고 있는 아빠와 유치원 생일 잔치에서 초를 불고 있는 내가, 빛바랜 흑백 사진들과 함께 있었다. 아빠는 낡은 벽을 잠시 쓰다듬었다.
그날 셋이서 잠을 잤다. 좁아 불편했다. 행여 나를 두고 갈까 싶어 아빠의 팔짱을 꼭 낀 채 잠이 들었다. 잠결에도 몇 번이고 아빠를 더듬었다. 아빠는 얕게 코까지 골며 잠에 빠졌다. 아빠는 늦은 아침에야 일어났다. 할머니도 나도 아빠를 깨우지 않았다. 할머니가 해준 밥을 먹고, 아빠와 난 내성천변을 걸었다. 논에는 가을걷이가 한창이었다. 둑에서 내려와 모래밭을 걸었다. 새들의 발자국이 가득했다.
"고라니 발자국도 있구나!"
아빠는 발자국 사이를 조심스럽게 지나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벗어 들고, 바지를 둘둘 말았다. 아빠의 발목이 강줄기를 나눴다. 맑고 투명한 강이었다. 잔모래들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수혁아, 너도 들어와. 어서!"
가을답지 않은 따뜻한 햇살 덕에 용기를 냈다. 강에 발을 담그자, 금세 온몸이 서늘해졌다.
"앗, 차가!"
"흐흐, 조금만 참아! 아빠는 어릴 때 만날 여기서 놀았어. 저기서 멱을 감고."
고운 모래들이 발가락 사이를 간질였다. 왕버들 가지들은 강물 속에 머리를 담구고, 바람따라 이리저리 헹궈내고 있었다.
"어? 이 물고기 좀 봐"
작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다녔다. 잔잔한 강물에 가는 선들을 수없이 그려놓았다. 난 물고기가 잡고 싶었다. 한 손으로 잡으려니 잘 안 됐다.
"아빠, 내 신발 좀 들고 있어요"
아빠는 내 신발을 들었고, 난 두 손으로 물고기를 잡았다. 하지만, 물고기들이 어찌나 빠른지 건드려보지도 못하고 온 몸에 물만 잔뜩 튀겼다.
아빠는 소리 내서 웃었다. 참 오랜만이었다.
며칠 동안 우리는 강을 걸었다. 강물 속을, 강둑을, 모래밭을 걷기도 했다.
아빠와 마지막으로 강가를 걷던 날, 그날은 먹황새를 본 날이었다. 아빠도 처음 봤다는 먹황새였다. 강 속에서 몸을 꼿꼿하게 서 있는 모습에 언뜻 사람인 줄 알았다. 먹빛을 띠고, 유유히 강 따라, 강물 속 먹이 따라 흐르듯 걷고 있었다. 부서질 듯 가는 다리로 예민하게 움직였다. 행여 어디론가 날아갈까 두려웠다. 숨죽여 오래도록 지켜봤다.
그날 저녁, 아빠는 작은 가방하나만 들고 떠났다.
"금방 돌아 올 거야. 할머니 말씀 잘 듣고…. 네가 할머니 많이 도와드려야 해. 네가 할머니를 지켜야 해. 자주 연락할게"
할머니는 아빠를 잡지 않았다. 할머니는 마르고 갈라진 손으로 눈가를 닦았다.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눈을 연신 닦아냈다.
"오야, 오야. 또 온나. 괘얀타. 네 새끼는 내가 거둔다. 내 그랄 수 있다. 오야. 오야!"
아빠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다. 아빠가 떠나는 그 길 위로 낡은 플래카드가 바람에 날렸다.
'영주 댐 수몰지구 이주 안내 설명회'
아빠가 떠날 때만 해도, 내가 이 마을로 올 때만 해도, 마을 사람들이 삼사십 명은 되었는데, 지금은 나까지 해서 딱 3명만 남았다. 서장골 할매와 우리 할머니와 나. 얼마 전까지 함께 있던 이장할매와 할배도 며칠 전 시내 이주단지 아파트로 이사 갔다.
"평생 농사만 짓던 사람이 우째 땅을 버리노!"
그렇게 말해놓고는 가버렸다. 큰 아들이라는 사람이 이장할매와 할배를 트럭에 싣고 가버렸다. 할머니는 질금으로 감주를 해 이삿짐에 실어 보냈고, 서장골 할매는 꼬깃꼬깃한 만원짜리 몇 장을 이장할매 손에 쥐어주었다.
마을로 들어오는 다리가 끊어지던 날 서장골 할매는 한숨을 쉬었다. 군청 직원들이 다녀가는 날이면 우리 할머니는 몸져누웠다. 가끔 명절 선물을 주고 가기도 하고, 홍화씨를 팔아주기도 했지만 그들이 가고 나면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 불도저가 들어와 빈 집을 부쉈고, 전기가 끊어지기도 했다. 가끔은 수돗물이 안 나오기도 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이사를 갔다.
그런데도 우리 할머니는 이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내 거로 가면 울 손자가 내 사는 데를 알라?"
"곡식들을 숨궈 두고 어데 갈라꼬!"
우리 아빠가 돌아올 이곳을 할머니는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 할머니가 심어 둔 곡식을 두고는 차마 못 떠난다고도 했다. 할머니는 이전까지 이렇게 많은 땅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주인이 사라진 빈 밭에 무엇이든 심었다. 할머니는 더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할머니가 일하는 밭 뒤에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경작금지. 이 곳은 영주댐 건설로 인한 수몰예정지구입니다. 무단 경작을 금지하며, 무단경작물은 사전 안내 없이 임의로 철거할 수 있습니다.'
만날 허리가 아프다고 하면서도 밭에만 나가면 일을 했다. 학교를 다녀오면 밭으로 달려 나가 할머니가 일하는 것을 지켜봤다. 가끔은 할머니를 찾기가 어려웠다. 땅과 할머니는 하나가 된 듯 붙어 있었다. 할머니의 굽은 등은 점점 더 땅과 가까워졌다.
가끔 아빠가 생각이 나면 내성천변을 걸었다. 여름에는 강에서 살았다. 잔모래가 없어져 발바닥이 따끔거릴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가을이 오고, 할머니가 가을걷이를 위해 바삐 움직일 때였다. 멀리서 먹황새가 날아들었다.
"할머니, 저기 좀 봐요!"
할머니가 굽힌 허리를 일으켜 먹황새 보았다.
"야야, 우짜노!"
먹황새는 다리를 절고 있었다. 길고 가는 다리 하나를 털며 불편한 듯 절룩거렸다. 갑자기 불안했다. 혹시라도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역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날 군청 직원이 다녀갔다.
"할매요. 더는 안되니더. 이제 곧 담수할꺼니더"
어서 집을 비우라고 했다. 이제 댐에 물을 채울 거라고 했다. 할머니가 살던 마을, 내가 살던 마을은 곧 물속으로 사라질 거라고 했다. 할머니가 심었던 수많은 곡식들도, 아빠와 걸었던 내성천의 강가도 강물도 물고기들도 모두 물속에 잠길 거라고 했다.
무서웠다. 두려웠다. 할머니가 이곳을 떠나면 못 살거라는 말에 겁이 났다.
난 아빠에게 편지를 썼다. 종이 위에 연필로 쓰는 것 대신에 내성천 고운 모래밭에다 자갈들을 주워 한 자 한 자 새겨 넣었다.
늦었지만 지금도 괜찮아요. 하지만 더 늦으면 안 돼요. 아빠. 어서 와요. 어서요.
하늘을 올려 봤다. 먹황새는 양날개를 펄럭이며 강을 따라 날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아주 오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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