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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욱 시인의 <곡면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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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서동욱 시인의 <곡면의 힘> [함께 읽기] '감전' 외 5편
최근 나온 서동욱 시집 <곡면의 힘>(민음사 펴냄, 2016년)에서 몇 편을 읽어봅니다. 철학자, 시인,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서동욱은 1995년 계간 <세계의 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래 지금껏 <랭보가 시 쓰기를 그만둔 날>(1999년), <우주 전쟁 중에 첫사랑>(2009년) 등의 시집을 펴냈습니다.

시인의 말

"시 짓기는 이상하고 덧없는 게임이다. 책받침만한 비좁은 구장에서 말(言)들을 바둑돌처럼 취급한다. 말들은 작물애비를 거쳐 물건 주인의 흔적을 말끔히 지운 듯 애초에 가지고 있던 정체성을 모두 잃어버리고서 익명의 검은 돌 흰 돌이 되어 전혀 경험하지 못한 전쟁을 수행한다. 새로운 언어의 조합 속에서 불길이 되고 홍수가 되며 또 기나긴 성벽이 된다." (<곡면의 힘>, 121쪽)

감전

옷장 안에 전기를 잘 가두었다
버려진 스웨터 속에서 잠을 자던
영혼의 마지막 조각 같은 정전기
생과
생을 통과하는 감전
나는 마흔을 슬프게 보낸 것 같고
너는 저녁이 와도 불을 켜지 않았으며
아마도 대흥역의 똑같은 개찰구를
언젠가 통과했겠지
세월을 인내할 줄 아는 것은
옷장이 아니며 냉장고다
저토록 엄격한 보호자를 보라
개찰구의 센서들만이 인과율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왜 한 사람이 우는 물처럼 지나갔고 왜
한 사람이 오지 않는지
그러나 금방 치워지는 식당 밥상처럼
새 밤이 오고 새날이 온다
어느 날 마른 발걸음은 기억을 잃어버리고서
역에서 내린다
탁, 탁 정전기 하나가 별을 괘도 밖으로 던질 때마다
깜짝 놀라서
낯익은 난간을 꽉 쥐어 본다 (<곡면의 힘>, 14~15쪽)

탄력

목이 늘어난 양말은 구두 안에서
밑창을 말끔히 핥고 싶은 걸레처럼 자꾸 밑으로,
그러니까

모든 인간관계 가운데
위인과의 관계가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남녀 관계는 윈윈도 되지만
결국 탄력이 사라지지요
그래도 사이좋은 감자들처럼 때로 무덤엔 같이 들어가요
친구도 심심하고
명강의도 언젠가 늘어지고
위인만이 늘 우리를 감탄케 합니다

팥빙수가 녹으면
수제비처럼 풀어지는 얼음물과 설탕의 탄력
그때 너는 아무것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오래도록 숟가락을 휘저을 뿐이었다
사람들이 고개를 저으며 인용하길, 정책도 탄력이 있어야지
그렇게 애석하게 기념일이 지나갔고
고등어를 꾹 눌러 보는 것이다
벌게진 눈을 관찰하며 마음을 읽으려고 애쓰느니, 이게 낫다
그리고 눈을 감고
콧노래처럼 최대한 쉽게 이해하면 된다 돈독함이란 고등어처럼 쉽게
비린내를 풍긴다네 룰루랄라
웃음은 입술의 탄력을 필요로 하고
입술의 탄력은 또 악용되는가?

발가락까지 내려간 양말
목숨은 꼭 죄어야 오래 붙어 있는 법이다
괴롭지만 매력에 대해서도 평생 생각해야 한다
붙잡을 곳도 없고 밟고 있는 걸레가 미끌거려서
이제 넘어지겠어 (<곡면의 힘>, 30~31쪽)

이별의 복기

1

잃어버린 동전처럼
구석을 점유하고 있으면 안 된다
줄 서 있는 식판들처럼 게 껍질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이동해야지
자신을 망가진 피규어처럼 애지중지해 보자
가령 볼펜의 스프링 같은 귀중한 부속은 우리에겐 감기약
추워서 훌쩍거리는 건 아녜요 그래도
망가진 피규어를 겨우 지탱하는 이쑤시개 또는
감기약, 우리는 쏟아지는 새우깡처럼
저녁의 바람 속에 있고
스프링이 사라져 해는 매달아 놓은 껌만 지익 늘어나
결국 미지근한 강가에 떨어져 익는 게 한 마리
이런 저녁엔 동전을 움직여 볼 힘이 없습니다

2

아주 무례한 연극을 익혔구나
자신을 너무 대단히 여기다 보면
고층 건물의 반사광처럼 불행해져
계속 눈감은 지붕들 위에서 발목이 잘린 채로 춤추게 될 거야
우리는 겨울엔 겨울답게
여름엔 여름답게 말했다
그렇게 해선 안 되었다
수없이 말을 골라도 꽉 잠긴 물감의 마개처럼
인간은 대단한 말을 할 수 없는 법이다
차라리 모음을 잊어버리고
식욕이 노래하게끔 하라
쏴아 빛은 황혼
정신의 불은 검은 구멍
준법은 맥주
그리고 꽤액
온도를 잃어서 돼지의 목도 오리의 성대처럼
길어질 때까지

3

에고라는 것은 치석 같은 것이며
너는 입술에 물었던 바람
그러니 상실에 대한 몽상 없이는 너는 관념조차 없는 것
바람은 혼령들의 사기극이니
사라짐을 계속 눈여겨보고 있는
정신의 불을 꺼트리지 않도록 마음을 다하여야 한다
눈꺼풀의 캄캄한 뒷면에는
천사들이 뒤통수에 매달고 다니는 휴대용 풍향계처럼
가느다란 원이 뱅글뱅글 돌고 있으니

4

의사는 너무 딱딱해져 치석을 제거할 수 없다고 했다
쓸데없는 것은 어느 날 꼭 되돌아와
핸드폰의 오래된 문자 함에 적혀 있다
아 그래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구나, 하고
어느 저녁이 못쓰게 된 전구 안으로
출렁거리며 입장할 것이다 (<곡면의 힘>, 56~58쪽)

피에타

블록과 인형이 들어 있는 주머니를 흔들면
창조의 얼떨결에
여관이 생기고 처녀가 들어오며,
드디어 처녀는
머나먼 군대의 아들에게서 편지를 받기 시작한다
팝콘을 먹으면서 구경한 그 외의 다섯 날이 겨우 끝날 때
그러니 그만큼 중요하다 돼지머리 풍선 하나가
엄마 엄마 웃으며 하늘을 떠다니기 시작하는 것은 어느 처녀에게나

부대가 이동한 떡처럼 두꺼운 구름 아래 가나안이 있다
가나안의 시계는 나무 한 그루
아들은 시침과 분침 아래서 조용히 흔들리며
아직도 휴가를 생각하지
조용히 좌우로 흔들리며
매 맞은 시계는 무엇을 연기해야 하는지 알지

그러나 신의 정신은 어묵의 고요함을 견지하고 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습니까!
어묵의 미덕은 피에타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 것
종교란 인간 정신의 보편적 오류를 겨냥한 명궁
갑(甲)이신 하나님! 어묵으로 물고기를 만드신 하나님!
돼지머리 풍선들은 시루떡처럼 두꺼운 당신의 층들을 하나하나 올라가며
마지막엔 접수창구에서 아가씨의 음성이 들려올 것을 믿습니다
그러면 어묵처럼 먹기 좋은 물고기들이
지상의 모래로 떨어지겠지요
다시 한번
우리는 물고기를 주울 수 있습니까?
아닙니까? 아들의 휴가를 끝내려고
어머니는 돼지 풍선을 꼭 끌어안고 있습니다 (<곡면의 힘>, 82~83쪽)

물의 증인

피부가 잠수복이 아니라면
몸은 깻묵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정치가여 고무공을 꼭 잠가 놓으라고 말해 봐라

그러나 장래의 모든 세대는
바닷가에서 시험관에 조심스럽게 물을 담을 것이다
바다는 고백을 않고는 버티지 못한다
바다의 성분
바다의 성분

거대한 종처럼 날마다 우는 바다여
에밀레, 하며 파도가 바다의 가죽을 벗기고
또 벗길 것이다 (<곡면의 힘>, 77쪽)

스피노자

인물을 내세우는 것은
지킬 수 없는 시간표 같은 것

그러나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에티카에 이렇게 썼다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자에게 몸을 맡기는 것을 상상하는 자는
사랑하는 이의 이미지를
다른 사람의 음부 및 분비물과 결합시키기 때문에
그 여인을 혐오한다
탈무드풍으로 정의한 이 질투를 후에,
또 다른 유대인 프루스트가 스완을 통해 반복했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아니면 다르게,
그는 해결할 수 없는 감정의 난폭함에 대해 모르는 자가 아니다
고독할 기회 없이 식탁에 앉았으며
공동 화장실 앞에서 기다려야 했다
편지들도 있었으나
옷깃 속에 꿰매 둘 단 한 문장의
따뜻함도 가져 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고생스럽게 시끄러웠다

모두가 증오했던 책의 저자
탐낼 것 없는 이 지위는
어이없이 덧없는 노력을 요구한다

목적 없이 살아야 한다 헤헤헤

어떻게 인간은 이렇게 예외적일 수 있는가?
건전한 인간들의 저주와
네덜란드의 바쁜 사업가들을 피해서
망각과 조급함의 소명을 배반하지 않는 두뇌들을 통과하며
전단지와 흥행사들 틈에 끼어
어떻게,
까다로운 책들이 살아남길 바라는가?
태양과 별들 사이에 끼어든 가당찮은 렌즈가
무슨 역사를 교정하겠는가?

경탄할 만큼 전신이 휘어진 관상목처럼
인간들은 지구에 수북한데
차력사처럼
사랑받는 일도 소유도 없는 한 삶을
자기 어깨 위에다, 무엇 때문에?
그러곤 하숙생은 일찍 사라졌다

글을 쓴다는 것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기대 없이,
하도록 돼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곡면의 힘>, 108~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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