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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민주주의는 신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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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민주주의는 신혼입니다" [프레시안 뷰] '민주주의'='좋은 정치' 인가?

민주화 30년, 절망의 시간

내년은 1987년 민주화 이후 30년이 되는 해입니다. 민주화 이후 한 세대가 지났는데 아직도 한국의 민주주의가 형편없다며 절망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습니다. 1987년에서 한 세대 전으로 눈을 돌려 1957년의 한국정치를 생각해보면, 민주화 이후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낸 4.19, 내각제 개헌과 5.16 군사쿠데타, 유신독재와 치열했던 민주화 투쟁, 대통령의 죽음과 또 한 번의 쿠데타, 5.18 민주항쟁,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1987년 이전의 한 세대는 말 그대로 민주주의를 위한 지난한 노력과 희생, 그리고 감격적인 승리로 기억될 만 합니다.

1987년 이후의 역사는 그렇게 감동적이지 않습니다. 민주화 이후에는 쿠데타의 주역이 다시 선거에서 승리했고, 첫 문민정부는 군부독재 세력과의 연합으로 탄생했습니다. 정부수립 이후 첫 번째 평화적 정권교체는 국가부도 사태를 직면한 외환위기와 지역주의 연합으로 겨우 가능했습니다. 뒤 이은 정부는 같은 세력이 수권했다고 말하기가 무색할 정도의 분당(分黨)으로 이어졌고, 대통령은 탄핵을 당했으며, 정권재창출에 실패한 뒤에는 전직 대통령의 자살이라는 불행한 사태를 맞이했습니다.

이후 보수 정권이 두 번 연거푸 들어섰지만, 앞선 정부는 4대강 사업 등을 추진하면서 불통정부라는 평가를 받았고, 치적으로 내세웠던 자원외교는 비리로 얼룩진 허탕이라는 것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뒤이은 정부에서는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었는데, 바다에서 생때같은 아이들이 죽어갈 때 이 정부에서는 대통령에게 올라갈 보고화면을 걱정하고 있었고, 방송은 정부의 시녀가 되었으며, 언론 자유와 민주주의 지수는 갈수록 떨어지고 있습니다.

▲ 1987년 7월 9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장례식. ⓒ연합뉴스


'민주주의'는 '좋은 정치'가 아니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는 정말 뭔가 크게 잘못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란 원래 그런 것입니다.

1987년 이전 우리는 민주주의를 신성시했습니다. 민주주의를 좋은 정치의 동의어로 여겼습니다. 일단 민주주의가 되면 모든 게 잘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이제는 민주주의가 작동해서 문제들이 척척 해결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민주주의에 배신당한 듯합니다.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답이 많을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완성되지 않았고, 질적으로 나빠졌으며, 불평등의 심화와 세습화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는 더욱 후퇴했고, 국정원의 선거 개입 사건에서 보듯이 이제는 기만적인 형태로 절차적 민주주의까지 위협받고 있기 때문에, 문제는 다시 민주주의입니다." 그렇습니까?

현대의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다수의 의견에 따르는 정치를 전제합니다. 물론 다수의 의견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결정되어야 하며, 그 전에 충분한 의견의 교환과 정보의 균질성이 확보되었는가에 대해서 수많은 이론이 있습니다만, 다수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 민주적 의사결정에서 중요한 정당성을 제공하는 것만은 여전히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민주화 이후 모든 정부를 바로 이 원칙으로 뽑았고, 그 이후의 모든 정부는 일단 전복될 정도까지는 이르지 않는 이상 정당한 정부입니다. 가령 국정원의 대선 개입에 관련된 모든 의혹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다수의 국민이 대통령의 즉각적인 하야를 원하지 않는다면 이 정부는 민주적으로 어느 정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불법적으로 집권한 정부가 어떻게 정당하냐구요? 민주적 정당성은 합법성을 뛰어넘기 때문에, 때로는 폭력에 의해 기존의 정부와 헌법을 전복하고 집권 세력도 정당할 수 있습니다. 혁명이 바로 그렇지 않습니까? 폭력은 그것이 주장하는 내용에 따라 종종 정당화 됩니다. 그리고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주체는 민주주의에서 '다수의 인민' 이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요컨대, 민주주의란 기본적으로 완전하지 않은 정치 이념이고, 그것의 완성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좋은 정치와 동의어가 아닙니다. 민주주의란 권력을 가진 소수보다는 다수 인민의 의사에 따라 통치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는 논쟁적인 명제들에 대한 합의에 다름 아니며, 민주주의 안에는 얼마든지 좋은 정치만큼이나 나쁜 정치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민주주의에 배신당한 것이 아니라, 이제 민주주의의 민낯을 막 보기 시작했을 따름입니다.

우리는 아직 신혼입니다

민주주의란 결혼과 같습니다. 연애할 때는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하고, 그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하고 싶고, 그렇게만 된다면 행복이 물밀 듯이 몰려올 것 같지만, 어디 살아보면 그렇습니까?

연애와 결혼이 다르듯이 민주화와 민주주의도 다릅니다. 불타는 사랑이 식고 나면 결혼이라는 제도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듯이, 민주주의도 시간이 걸립니다. 결혼만 하면 다 될 것 같지만, 세상을 살아 본 부부들은 결혼 이후에야 진짜 누군가와 함께 하는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와 같습니다. 역사를 인간의 삶으로 바꾸어 보면, 이제 결혼한 지 3년째를 바라보고 있는 중입니다. 결혼에 골인하기까지 지난 3년은 파란만장했지만, 그 고난과 역경을 뚫고 쟁취한 결혼 이후의 3년을 돌이켜보면, 과연 이 결혼을 왜 했나 하는 생각이 들 때조차 있습니다.

결혼이 곧 행복은 아닙니다. 결혼에 대한 환상을 계속 갖고 있다면, 다른 부부들이 겉으로 잘 살고 있는 모습만 부러워하고 내 결혼생활을 비관한다면, 우리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차이는 있지만 다들 문제가 있게 마련입니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결혼이 목표지만, 결혼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문제들, 결혼하지 않았으면 결코 생기지 않았을 문제들이 잔뜩 나타납니다. 치약을 어떻게 짜느냐, 물을 마시고 컵을 헹구는 버릇이 있느냐는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육아를 어떻게 할 것인지, 아이를 어떤 학교에 보낼 것인지, 부모님들께 용돈은 얼마나 드릴 것인지, 부모님과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의 균형을 어떻게 할 것인지, 기계의 수입과 지출은 어떻게 비율을 맞추고, 자동차를 살 것인지 대중교통을 더 많이 이용할지, 차를 산다면 경차를 살 것인지 중형차를 살 것인지, 집을 사기 위해 대출을 받을 것인지. 그리고 먼 훗날 우리 부부가 어떤 삶을 살았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이런 문제들은 민주주의가 스스로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부부가 아무리 민주적 대화를 잘 한다고 해도 이 문제들에 대한 답은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의 결정도 이러한데, 수많은 사람들이 엉켜서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어떨까요?

사랑이 있어야 민주주의도 있다

산다는 것, 그것도 생면부지의 사람과 만나서,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는 사랑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평생을 함께 산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그것은 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결혼 생활을 유지시키는 가장 큰 원동력은 서로를 존중하고 믿고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바로 그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 서로가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생각이 없으면, 민주주의 따위 아무 짝에 쓸모가 없습니다. 단언컨대, 민주주의는 작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공동체가 있어야 민주주의도 있습니다. 나와 내 새끼만 잘살면 되고, 모두가 각자도생의 길을 가며, 욕을 먹든 법을 어기든 돈만 많이 벌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런 사람에게 아무런 제재를 할 수 없는 곳은 공동체가 아닙니다. 지옥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곳을 지옥공동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더불어 사는 인간성의 회복, 그것이 중요하다는 생각, 인간의 삶에 대한 존중, 그것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자본주의가 인간을 잡아먹는 일을 돕는 형식적 절차에 불과할 것입니다.

논어에서는 서른 살을 이립(而立)이라고 해서 모든 것의 기초를 세우는 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이제야 민주주의와의 결혼생활에서 기초를 세워나가는 중입니다.

조급해할 필요도, 섣부른 비관이나 낙관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토록 사랑했고 아직도 그에 대한 믿음이 남아있다면, 이제 환상을 버리고 앞으로의 긴 여생을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한두 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 결혼이라는 제도가 그런 것처럼 민주주의가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럴 때일수록 서로에 대한 믿음과 존중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 없이는 결혼이든 민주주의든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입니다.

* 이 글은 <또!오해영>, <디어마이프렌드>, <연애시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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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후
16대, 17대 국회에서 보좌진으로 일하고, 영국 런던대학교(UCL)에서 '정치적 대표'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와 경남연구원에서 일하고, 행정안전부 장관정책보좌관, 국무총리 메시지비서관을 지냈다. 정치의 이론과 현실에 모두 관심이 있다.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로 있으며, <프레시안>을 비롯해 <경향신문>, <한겨레>, <피렌체의 식탁>에 칼럼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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