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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불평등은 구조적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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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건강 불평등은 구조적 폭력이다 [서리풀 연구通] "질병의 원인은 불평등 추동하는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힘 때문"
폭력은 늘 우리 곁에 있다. 성폭력, 가정폭력, 학교폭력, 직장폭력 등 우리는 매 순간 여러 폭력의 위험에 노출된 채 살아간다. 폭력은 우리의 생명과 건강, 나아가 존엄성까지 훼손한다. 따라서 우리 대부분은 폭력을 두려워하고, 폭력에 반대하며, 폭력의 피해자 또는 가해자가 되는 것을 경계한다. 그러나 폭력의 주체를 식별하기 어려운 비가시적인 폭력, 특히 '구조적' 폭력에까지 인식을 확장하게 되면 일체의 폭력에 연루되지 않으려는 우리의 바람은 허망하게 스러진다. 최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이슈가 상기시키고 있는 바와 같이 수많은 안타까운 산업재해 이면에는 자본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의 안전을 희생시키는 폭력적인 구조가 있다. 이 구조를 용인하고 있는 우리 역시 적어도 '선량한(?)' 폭력의 방관자일 수밖에 없다. 구조적 폭력은 사고 사망처럼 즉각적으로 발생할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누적되며 영향을 미치는 '느린 폭력'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사회구조적 문제인 건강불평등 역시 광범위한 구조적 폭력의 결과물로 이해할 수 있다. 폭력에 대한 이해가 협소하고 사회적 고통으로서의 불평등 문제에 둔감한 이들에게는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로 그동안 학술연구 영역에서는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힘'들의 속성과 효과를 이해하기 위해 '건강의 사회적 결정 요인(이하 사회적 결정 요인)'과 함께 구조적 폭력 개념을 폭넓게 사용해왔다. 각 개념의 정의와 용례는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두 개념 모두 불건강은 사회적 불평등의 생물학적(신체적) 반영임을 전제한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국제학술지 <비판적 공중보건(Critical Public Health)>에는 이러한 두 개념의 기원을 탐색하고 두 개념 간 유사점과 차이점, 그리고 현실 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두 개념의 결합 가능성을 고찰한 흥미로운 논문 한 편이 실렸다.(☞ 바로 가기 : ') 연구진은 두 용어가 어디에서 어떻게 사용되어왔는지 검토하기 위해 PubMed와 Google Scholar에서 연구 문헌들을 검색하고, 이들을 비판적으로 고찰했다. 이 논문은 우선 두 개념의 기원을 검토하였다. 구조적 폭력이라는 용어는 1969년 평화학자 요한 갈퉁이 자신의 논문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사회 부정의와 불평등을 아우르며 폭력 개념을 지나치게 확장한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이후 평화학 연구를 비롯한 다양한 학문 분야로 폭넓게 확산되었다. 그리고 1990년 중후반에는 의료인류학자 폴 파머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그는 국제보건 영역에서 구조적 폭력의 개념적 속성을 이론화한 인물로, 특히 HIV/AIDS 분야에서 구조적 폭력 개념을 배포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구조적 폭력에 대한 그의 관심은 당시 불평등에 무관심한 의료인류학에 대한 각성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1980~90년대 세계은행 등의 영향으로 '비용-효과성'과 '선택적 1차의료'가 강조되던 시기에 의료인류학 역시 문화주의에 경도되어 부유국과 빈곤국의 서로 다른 '표준'을 정당화해주는 현실에 분노했다. 따라서 그의 초기 저작에서 구조적 폭력은 의료인류학의 편협성에 대한 '해독제'로서 학문적 교정의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그의 책 <권력의 병리학(Pathologies of Power)>(국내 미번역)에서부터 추상적인 힘들의 집합을 가리켰던 기존 용법에서 벗어나 하나의 학술 개념으로 정식화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반면 사회적 결정요인 개념은 영국의 두 학자, 리처드 윌킨슨과 마이클 마멋의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윌킨슨은 영국의 무상의료체계 국립보건서비스에도 불구하고 사회 계급에 따른 사망률 격차가 지속되는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사회경제적 지표의 영향력을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정부에 '긴급한' 문제 해결을 촉구하였다. 마멋 역시 '건강의 사회적 기울기'로 잘 알려진 화이트홀 연구를 통해, 건강 결과의 계급 차이는 사회 불공정을 보여주는 척도가 된다고 주장했다. 마멋과 윌킨슨은 1999년 출판된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 편집자로, 또 WHO 유럽지역사무소에서 펴낸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 견고한 사실들>의 공저자로 참여하였다. 이 출판물들은 2005년 출범한 WHO의 '건강의 사회적 결정 요인 위원회'의 활동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위원회는 2008년에 보고서 <한 세대 안에 격차 줄이기>를 출판하였다. 이 보고서는 단지 건강 수준을 향상하거나, 또는 (파머가 주장하는 것처럼) 가장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형평성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보편적인 건강의 사회적 기울기를 완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를 위해 가깝게는 일상생활 환경 그리고 멀게는 사회계층과 규범, 가치, 국내외적 경제사회정책, 거버넌스 등을 포함한 구조적 동인을 다룰 것을 권고하였다. 위와 같이 두 개념적 프레임 모두 1970년 무렵에 등장하여 1990년대 후반 신자유주의가 절정에 이른 시기에 주요 의제로 부상하였다. 또한, 두 개념은 권력의 불공정한 분배와 사회 부정의가 건강한 삶의 역량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하는 점, 그리고 개별 주체에 책임을 묻는 인식론적 경향성에 도전한다는 점 등에서 유사하다. 무엇보다 두 개념 모두 건강불평등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동인들에 주목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개념이다. 동시에 두 개념은 모두 개념적 모호성이라는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사회적 결정 요인은 구조적 폭력보다는 더 기술적으로 정교한 편이지만, 대부분 구조의 '대리지표'로 연구되는 한계가 있다. 실제 정책 차원에서도 소득, 교육 수준과 같은 구체적 지표에서 '자유'와 같은 철학적 개념에 이르기까지 건강의 '비의료적' 영향 요인을 망라하는 하나의 개념적 '블랙박스'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두 개념은 여러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학문적으로 개념 간 연결 논의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구조적 폭력의 용어 사용은 대체로 의료인류학 분야에 국한된 반면에 사회적 결정 요인은 역학과 사회의학, 보건학 등에서 주로 사용되어왔다.(하단 표 참고) 이러한 학문적 단절은 의료인류학과 역학 사이의 불편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역학자들은 인류학자들이 구조적 폭력을 측정가능하지 않은 하나의 설명적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며 정확한 과학적 근거를 요구한다. 반대로 인류학자들은 역학자들이 "입증된" 방법론 뒤에 숨은 채 사람들을 아프게 만드는 구조적 힘과 과정들을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처럼 상반된 학문적 지향성은 두 개념의 결합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 Pubmed에서 키워드 검색 결과(2019년 9월).
구조적 폭력 개념은 사회적, 정치적 조건과 질병을 연결하는 능력이 강력하다. 상대적으로 수동적 개념인 사회적 결정 요인과 달리 구조적 폭력은 불건강의 '원인 중의 원인'으로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시스템을 식별한다. 따라서 구조적 폭력 개념의 사용은 늘 기존 정치질서와 현상 유지에 대한 명시적 또는 암묵적 비판과 연관되어 있다. 반대로 사회적 결정 요인 프레임은 '정치적 무관심'으로 비판받아왔다. 빈센트 나바로는 앞서 사회적 결정 요인 위원회의 보고서가 권력 재분배를 위한 급진적 요구와 신자유주의적 시스템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회피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구조적 폭력은 정확히 그 반대 지점에서 비판받고 있다. 광범위한 구조적 비판은 다만 도덕적 열기를 만들 뿐, 구체적 정책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 결정 요인은 사망률, 유병률 등의 불평등 감소라는 분명한 정책 목표와 대상을 가진 것에 반해 구조적 폭력의 정책적 영향력은 하나의 내러티브적 은유라는 제한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즉, 사회적 결정 요인이 권력을 건드리지 않은 채 정책들만 이야기하고 있다면 구조적 폭력은 정책은 건드리지 않은 채 권력만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최근 두 개념의 융합 가능성의 조짐이 일부 나타나고 있다. 그 가능성은 '건강의 사회적(societal) 결정 요인'과 '건강의 구조적 결정 요인'과 같이 새롭게 등장한 용어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불평등의 구조적 메커니즘을 조명하지 못하는 사회적 결정 요인 프레임에 불만을 가진 역학자들 가운데 이러한 논의가 두드러지고 있다. 사회적 결정 요인 위원회 역시 2010년 보고서에서는 '구조적 결정 요인' 개념에 새로운 중요성을 부여하였다. 또 다른 융합의 징조는 최근 구조적 힘들에 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는 의료 영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예로, 일부 학자들은 의사들 역시 "임상 증상과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시스템 간의 복잡한 관계를 다룰 수 있도록" 구조적 역량을 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멋과 파머가 공동연구자로 참여한 '뉴잉글랜드저널오브메디신'의 '사회의학의 사례 연구'(2018년)에서는 임상의학에서 사회적 개념과 맥락의 중요성을 조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두 개념이 연결된 용어를 제안한 바 있다.
"건강과 질병의 근본적 원인은 소득, 인종, 민족, 이민, 주거공간 등처럼 겉으로 드러난 정적인 불평등의 특성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러한 불평등을 추동하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힘들이다. 우리는 이것을 '건강의 사회적 결정 요인의 구조적 결정 요인'이라 부른다."
아울러 이 논문은 '구조'를 개별 신체적 문제만을 치료하려고 하는 임상 의사들의 경향성에 대한 '개념적 해독제'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다만 이렇게 의학적 개입에만 범위를 한정할 경우 상위 구조의 변화를 위한 정부와 기업 등 비-건강 영역 정책결정자들의 책임을 면제해줄 위험이 있다. 결론에서 연구진은 최근 WHO가 사회적 결정 요인 위원회를 재소집하며 전략의 전환을 도모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는 구조적 폭력이나 사회적 결정 요인 프레임 모두 지금껏 정치적 또는 사회경제적 현상 유지를 크게 바꾸지 못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진보의 실패는 최근 발간된 영국의 한 보고서에도 잘 나타나 있다.(☞바로가기 : ') 보고서는 그동안 영국 정부의 긴축이 어떻게 건강기대수명 성과를 후퇴시켰는지, 또 사회적 결정 요인들을 다루려는 노력을 방해하였는지 보여준다. 끝으로 연구진은 '사회적 결정 요인의 구조적 결정 요인' 논의가 두 개념을 가깝게 연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피상적인 결합으로 남아 있다고 평가하며, 학문 간의 인식론적 긴장을 극복할 의지를 포함한 다학제적 대화를 통해 새로운 유형의 통합적 접근을 개발할 필요성을 제언하고 있다. 사회적 개념은 현실에서 사람들의 생각과 결정, 행동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 논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회적 결정 요인과 구조적 폭력, 두 개념 모두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너무 밋밋하지도, 또 너무 과격하지도 않으면서 불평등 문제를 정확하고 절실하게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통합적 개념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건강불평등에 극도로 무관심한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두 개념 모두 아직 낯선 용어일 뿐이다. 사회적 결정 요인과 같은 소극적 개념으로는 어지간해서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어렵다. 비록 학술적으로 허술한 개념일지라도 구조적 폭력은 사람들에게 정서적 충격과 일종의 도덕적 의무감을 불러일으키면서 불평등 문제 해결의 시급성을 자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더 많은 이들의 공감과 연대, 실천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라도 '건강불평등은 구조적 폭력'이라는 사실을 더 자주, 더 많이 이야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 서지 정보- Clare Herrick, Kirsten Bell (2020). Concepts, disciplines and politics: on 'structural violence' and the 'social determinants of health', Critical Public Health, DOI:10.1080/09581596.2020.181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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