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등 쟁점 법안에 대해 여야가 이견을 좁히지 못한 가운데, 여당이 강행처리를 밀어붙이면서 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진행하며 이에 맞섰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공수처법 등 3개 법안에 대해 필리버스터를 신청·진행했고 해당 법안은 9일 중 처리가 불가능하게 됐다. 더불어민주당은 정기국회 회기가 끝나면 필리버스터가 자동 종료된디는 점을 이용, 10일 소집을 요구한 임시국회에서 이들 법안을 가결시킬 계획이다. 국민의힘은 9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공수처법 △대북전단 규제법 △국정원법 등 3개 법안에 대해 필리버스터를 최종 신청하고, 밤 9시부터 이를 진행했다. 국민의힘은 당초 △5.18 왜곡처벌법 △사회적참사특별법에 대해서도 필리버스터 신청안을 냈으나 본회의 도중 "양당 협의 끝에 3가지(법안에 대해서만) 진행키로 했다"고 배현진 원내대변인을 통해 밝혔다. 필리버스터 신청이 철회된 법안 2개는 앞서 진행된 본회의에서 바로 가결됐다. 야당 의원들의 '무제한 토론'은 그러나 문언대로 '무제한' 이어지지는 못할 전망이다. 올해 정기국회 회기는 9일 자정까지이고, 국회법은 "무제한 토론을 실시하는 중에 해당 회기가 끝나는 경우에는 무제한 토론의 종결이 선포된 것으로 본다. 이 경우 해당 안건은 바로 다음 회기에서 지체 없이 표결해야 한다(법106조의2 8항)"고 정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말 패스트트랙을 통해 현행 공직선거법·공수처법이 통과될 때도 여당은 이런 방식으로 필리버스터를 무력화한 바 있다. 여당에서도 필리버스터를 무겁게 받아들인다기보다는 "오늘 자정에 저절로 끝나니 따로 조치할 게 없다", "9일은 필리버스터로 시간을 다 보낼 것 같고, 10일 정도에 표결이 가능하지 않을까"는 등의 반응이 나왔다. 앞서 민주당은 전날 법사위에서 공수처법 개정안을 기립 표결로 처리한 데 이어, 같은날 오후부터 이날 새벽에 걸쳐 국정원법·경찰청법·상법·5.18왜곡처벌법(법사위), 공정거래법·금융그룹감독법·사회적참사특별법(정무위), 노동조합법·근로기준법·고용보험법·산재보험법·징수법(환노위) 등을 모두 일방 처리했다. 여야 간 합의 처리가 이뤄진 곳은 국방위(5.18진상조사특별법) 정도였다. 특히 전날 밤 정무위를 통과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에 대해서는 야당으로부터 "입법 사기"(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라는 비난까지 나왔다. 민주당은 정무위 안건조정위원회에 참여한 정의당을 설득하기 위해 공정위 전속고발권 폐지를 약속해 놓고는, 전체회의에서는 재계 반발을 고려해 이 부분을 삭제한 수정안으로 법안을 통과시켰다. 참여연대, 경실련 등 시민단체들도 성명을 내어 민주당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 공정거래법 개정안에 대해 국민의힘은 필리버스터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 이날 본회의에서 공수처법 필리버스터가 시작되기 전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상정됐을 때, 반대 토론에 나선 것은 국민의힘이 아니라 정의당 소속 배진교 의원이었다. 정무위 안건조정위원이었던 배 의원은 토론에서 "전속고발권 폐지는 공정위 스스로 역할 한계를 인정하고 당사자들에게 고발권을 되돌려주는 안"이라며 "전속고발권 폐지는 문재인 대통령 공약이었다. 민주당이 기억상실증인지, 청와대의 특별 지시가 있었는지, '친(親)재벌당' 본색을 드러낸 것인지 해명해야 한다"고 민주당을 비판했다. 배 의원은 또 민주당이 안건조정위에서 전속고발권 폐지안을 통과시켜 놓고도 정무위 전체회의에서 이를 뒤집은 데 대해 "이렇게 할 거면 안건조정위나 소위원회의 심사 권한이 무슨 권한이 있느냐. 최소한의 신의를 저버린 것"이라고 지적하고는 "내용적·절차적 공정성과 정당성이 훼손된 이번 안에 동료 의원들이 반대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어진 공정거래법 개정안 표결 결과는 재석 257인에 찬성 142명, 반대 71명, 기권 44명, 가결이었다. 재석 과반(129명)을 10여 표 넘긴 비교적 아슬아슬한 결과였다. 결과적으로 가결은 됐지만, 민주당 의석 수(174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적은 찬성표가 나온 셈이다. 정의당 의원 전원은 물론, 국민의힘 등 보수 성향 의원들도 정의당과는 다소 다른 맥락에서였지만 반대표를 던졌다. 민주당에서도 우상호 의원이 반대 투표를 해 눈길을 끌었고, 박용진·진성준·한준호 의원은 기권표를 던졌다. 시대전환 조정훈 의원, 열린민주당 최강욱 의원도 기권했다. 참여연대, 경실련 등은 당일 새벽에 있었던 '법안 뒤집기' 사태에 대해 이날 본회의 안건상정 전 이례적으로 빠른 대응 논평을 내어 "공정거래법과 상법 개정안은 경제민주화를 저버리고 재벌들에게 특혜를 부여하는 법안들"이라며 "본회의에서 반드시 수정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무위에 그쳤다. 공정거래법과 마찬가지로 '개혁 후퇴'라는 비난이 일었던 상법 개정안은 이날 본회의 처음 순서에서 일찌감치 통과됐다. 상법 개정안에 대해서는 조정훈 의원이 나서서 "국회는 재벌 앞에 왜 이렇게 무력한가"라며 기업 감사위원 임명시 대주주(연결주주) 의결권 제한이 '합산 3%'에서 '개별 3%'로 변경되는 등 법안심의 과정에서 원안보다 내용이 후퇴한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 상법 개정안에 대해서는 조 의원과 정의당 의원들이 반대 표결을 했고, 국민의힘 의원들은 이와는 다른 맥락에서 반대표를 던졌다. 국민의힘 등 보수진영의 반대 이유는 정의당·시대전환과는 정반대로 '지나친 규제로 기업을 옥죈다'는 것이었다. 상법 개정안 표결 결과는 재석 275인 중 찬성 154명, 반대 86명, 기권 35명이었다. 이 역시 찬성표가 민주당 의석 수에 미치지 못했다. 야당의 필리버스터에도 불구하고 상법·공정거래법 등 '공정경제 3법'을 포함한 법안들이 다수 처리될 수 있었던 것은 '무쟁점 법안은 필리버스터 실시 이전에 먼저 통과시키자'는 여야의 신사협정 덕분이었다. 박병석 국회의장은 회의 모두에 "주호영 의원 등 102인(국민의힘)으로부터 무제한 토론 요구서가 제출된 안건은 의장이 교섭단체 대표의원과 협의해 상정을 잠시 보류하고, 무제한 토론 요구서가 제출되지 않은 다른 안건부터 먼저 상정해 심의·의결하기로 했다"고 공지했다.
이에 따라 여야는 이날 본회의 상정 안건 131건 가운데 필리버스터 대상 안건과 여야 추가 협의가 필요한 안건 등을 제외하고 약 100여 건의 법안·결의안·비준동의안 등을 통과시켰다. 김기현 의원부터 시작된 야당의 '무제한' 토론은 다른 안건들의 처리가 모두 마무리된 후, 밤 9시 정각이 돼서야 비로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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