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복지부가 지난달 26일 발표한 '제2차 공공보건의료 기본계획안'은 한치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공공병원과 인력 대책이 부실하고 심지어 의료 영리화 추진 계획을 포함했다는 문제는, 어쩌면 사소한(?) 것인지도 모른다(☞관련 기사 : <프레시안> 4월 26일 자 '정부 공공병원 계획안엔 여전히 의료민영화 '함정'이')
보도자료나 언론 보도의 날짜를 가리고 봐도 상관없는, 일종의 '유체이탈'이 가장 놀랍다. 1년 넘게 우리 사회를 뒤흔드는 코로나19 유행이 마치 없었던 것 같은 '맥락 없음'이 이 계획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할 정도다. 정부 발표자료(총 41쪽) 가운데 '코로나19'라는 표현은 10쪽에서 딱 한 번 나온다. 그 정도로 '탈(脫) 코로나'다. 공공보건의료의 상황 진단과 문제 인식, 과제 설정에 한국 사회의 코로나19 유행과 대응이 무관하다는 생각 또는 의식, 그러니 공공보건의료 기본계획안이 이렇게 된 것은 미리 예비된 것이었다. 코로나19 때문에 전국 곳곳에서 공공병원을 요구하고 공공보건의료를 다시 정비하라는 소리가 빗발쳤고 지금도 그렇지만, 그 많은 소리가 사소한 '민원' 취급도 받지 못한 셈이다. 정부 계획이 현실과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내친김에 더 말하자. 공청회 발표자와 토론자 구성부터 정부의 현실 감각을 의심하게 한다. 전원 중년 남성에다(최소한의 젠더 균형은 그만두고라도 이래서야 누가 인력 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공공보건의료의 토대이자 현장인 '지역'을 대표하는 사람도 전무하다. 이 계획이 처음부터 어떤 '세계'에 속하고 어떤 관계 속에서 진화했는지 그야말로 상징적이다. 물론, 보건복지부가 공공보건의료를 이 정도(?)로 생각한 것이 우연은 아닐 터. 예산 당국은 물론이고 정부와 정권 전체가 공유하는 시각을 되풀이하거나 반복했을 것이다. 근본을 따지자면 정권을 넘어 우리 사회 구성원과 세력들이 하나의 '사회적 합리성'을 구성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코로나19와 보건의료와 공공보건의료에 대해.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개인의 경제적 합리성이 반드시 그의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듯이, 사회적 합리성도 저절로 한 사회의 번영과 안녕을 보장하지 못한다. 우리 사회의 주거와 교육 문제를 보면 사회적 합리성이 결국 비합리적 결과, 다수가 불행한 사태를 빚어낼 수도 있다. 사회적 합리성을 넘어 바람직한 공동체로 나아가는데, 정치의 책임이 긴요한 이유이다. 현재의 공공보건의료에 대한 이해 또는 사지 선다형 여론을 그대로 반영하는 정부 계획이라면 굳이 공청회까지 할 필요도 없다. 인공지능도 아닌, 그저 단순 합산하는 기계적 작업으로 충분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점에서 포스트 코로나의 한국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지, 지금 정치의 역할을 다시 촉구하고자 한다. 여기서 정치란, 당연히 현실 정치와 정치인을 훌쩍 넘어 새로운 사회와 대안 체제를 모색하고 경쟁하는 모든 사회적 힘과 세력에 대한 것이다. 정권과 정부가 중요한 요소이긴 하나, 우리 자신도 그 행위자인 코로나 이후 '공공성'에 대한 정치를 말한다. 먼저, 정권과 정당과 정부에 촉구한다. 힘이 있다는 여러 외국은 이미 '포스트 코로나'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실업 대책을 어떻게 하고 공중보건 대응체계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 하는 정책 차원도 있지만, '체제' 자체를 고민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좀 더 정확하게는, 고민이라기보다는 체제 전체에 도도한 압력이 작용하고 여기에 정치가 반응할 수밖에 없다고 해야 한다. 하나의 소용돌이다.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후 내놓은 정책들은 오바마 정권의 연속이라는 예상을 뛰어넘어 기존 패러다임을 흔든다는 것이 중평이다. 혹자는 미국 정치에 쓰나미와 같은 전환을 초래할 것이라 해석하고(☞관련 기사 : <워싱턴 포스트> 3월 7일 자 '') 수십 년 지속한 신자유주의 체제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관련 기사 : <블룸버그> 3월 15일 자 '') 영국에서는 지금 분위기가 2차 세계대전 직후 정치경제 질서를 새로 구축할 때와 비슷하다는 논의가 한창이다(☞ 바로 보기 : <윌리 온라인 라이브러리(Wiley Online Library)> 4월 17일 자 '') 그런데 우리는? '올드 노멀'을 그대로 회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일까. 중환자 치료 병상을 찾느라 인력을 구하느라 그렇게 고생했으면서도 그 어떤 대안도 말하지 못한다. 아니 체제를 논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 같다. 검사와 백신 접종, 확진자 역학조사도 마찬가지. 급하면 자원자든 강제든 인력을 동원하면 된다는 생각에 머물러 있다. 그 말썽 많은 사회적 거리 두기 또한 개인 책임을 촉구하는 이상의 어떤 '정책'도 없는 상태다. 이러니 다음 팬데믹 대응이나 공중보건 위기상황, 나아가 새로운 경제체제의 원리나 공공과 국가 역할은 아예 상상의 범위 밖이다. 사안에 따라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은커녕 후퇴할 가능성까지 있다. 최근 일어난 한 가지 사태. 삼성의 상속세와 기부는 여러 가지 논쟁점이 있지만, 그중 중앙감염병병원과 감염병 연구소에 거액을 기부한 것은 그냥 좋게 해석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 일이 공중보건의 '민영화'를 촉진하는 마중물이 되는 것을 걱정한다. 아직은 아니지만, 국가가 책임져야 할 공중보건의 핵심 기능을 기부금에 의존할 공산이 크다. 상당한 예산이 들어간다고 하겠지만, 가능하면 일반 예산을 줄이려는 예산 당국의 '돌려막기' 논리가 어디 하루 이틀인가.(☞관련 기사 : <한국일보> 2017년 6월 29일 자 '') 국가 예산은 필시 명색일 뿐, 우리는 '삼성이 건립한 세계 제1의 감염병 병원'으로 귀착될 것으로 예상한다.(☞관련 기사 : <한겨레> 4월 28일 자 '') 이후 다른 감염병 병원과 연구는 어떻게 될까? 한번 길을 낸 후이니 이른바 '공공-민간 협력'이 모델이 되고 끈질기게 '사실상 민영화'의 길을 추구하리라. 처음에는 감염병 병원이, 그다음에는 다른 공중보건 기능도. 거의 완전 민영인 의료가 있으니 공중보건이 뒤를 따르기는 더 쉽다. 민영'화(化)'는 연속된 과정이며 서서히 바뀌는 '되기(becoming)'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기부를 통한 '민영' 공중보건의 또 다른 문제는 민주주의 원리에 어긋난다는 점이다. 기부자가 용도를 정하면 쓰는 쪽은 따를 수밖에 없고, 이는 어떤 사업과 어떤 정책을 우선할 것인지 하는 사회적, 정치적 결정을 우회한다. 기부하는 쪽과 받는 쪽의 '합의'는 늘 투명하지 못하고 그들만의 이해관계를 떠나지 못하는 법이다. 공공보건의료에 한정해도 '올드 노멀'을 벗어나지 못하거나 오히려 과거 패러다임을 강화하는 시도가 계속이다. 앞으로도 여러 모양과 방법으로 그럴 것이다. 문제는 뉴노멀의 힘이 약하다는 점. 물론,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규범으로도 그렇지만, 제대로 된 공공보건의료 없이는 우리 자신과 공동체의 건강과 안전을 보장하기 어렵다. 우리가 이 상태의 공공보건 기본계획과 모든 공중보건(중앙감염병병원과 감염병 연구소 포함) 민영화 시도에 반대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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