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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를 추도하며] 시인 김지하와의 5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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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를 추도하며] 시인 김지하와의 52년 [김지하를 추도하며] 7
시인 김지하씨와 이별을 하기 위해서, 저는 서울에 왔습니다. 깊은 회한을 품고 김지하씨가 없는 서울에 왔습니다. 긴 침묵을 계속한 채 홀로 세상을 떠나버린 시인! 왜 그랬는지 묻는 것조차 불가능한 현실이 나를 움츠려 꼼짝 못하게 합니다. 발길이 무거운 "서울길"이었습니다. 제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깨닫게 되는 이 나라에 대한 사랑, 여기에서 사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김지하씨의 작품을 통해서 내 몸 속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김지하씨와 나의 관계는, 시종 말과 함께 있었습니다. 중앙공론사(中心地方公論社)의 편집자였던 내가 1970년 6월, 편집실 한구석에서 읽던 "주간 아사히"(週刊朝日)에 한국의 시인 김지하의 장편 풍자시 '오적'전문이 게재되어 있었고, 나는 처음으로 읽는 김지하 작품의 압도적인 말의 힘에 매료되었습니다. 분노와 비웃음, 홍소(哄笑)의 화살이 부정과 부패에 빠진 통치자를 찌르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말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은유의 적확성, 뿜어져 나오는 웃음이 두드러지고 예리한 풍자가 전편을 채웠으며, 읽은 후에는 맑은 비애의 감정이 남았습니다. 시인 김지하의 '천재(怪才)'를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오적' 한 편으로 독재정권을 뒤흔든 김지하가 '반공법' 위반으로 중앙정보부에 체포 연행되었으며, 같은 해 12월에 간행된 처녀시집 '황토'도 발매금지 처분을 받았다는 사실. 한국에서 출판할 수 없다면 일본에서 김지하의 작품을 편집 출판하자고, 나는 무모하게도 결심한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내 운명을 바꿀 정도의 도약이었습니다. 일본에서 출판해 세계에 김지하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으면 한국이 낳은 희유(罕有)의 시인과 그 작품은 박정희 독재정권 아래 어둠으로 묻혀버릴 거라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시인 김지하의 재능이 나를 움직였던 것입니다. 사람을 통해 김지하씨와 접촉을 하고, 1년 반 후인 71년 12월, 일본에서 최초의 책 "긴 어둠의 끝에"가 중앙공론사로부터 출판되었습니다. '황토', '오적' 외에 김지하 작품을 망라해, 그동안의 시인의 행보가 전해지는 한권이 되었습니다. 김지하 씨로부터 편지와 자화상이 오고, 시인이 그림 그리는 재능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펜으로 그려진 그 정연하고 젊은 자화상이 지금은 나를 슬프게 합니다. 책은 예상 이상의 반향을 불러, 김지하의 이름은 조금씩 일본 속으로 침투하게 됩니다. 하지만 평온한 날들은 시인과는 인연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다음해 72년 5월, 김지하가 잡지 '창조'에 풍자시 '비어(蜚語)'를 발표하고 다시 체포 되었습니다. “세계에 김지하의 이름을 전파하는 출판 활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를 지키기 위한 구호운동이 필요하다.”고 나는 통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일본의 문학자 십수명에게 "긴 어둠의 끝에"를 보내, 위기에 있는 한국의 시인 김지하를 돕기 위한 협력을 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 결과, 나의 호소를 들어준 사람은 오다 마꼬또(小田実)씨 혼자였습니다. 오다씨와 둘이서 초안을 만들고,  '김지하 구원 국제위원회'를 발족시킨 것이 72년 6월이었습니다. 김지하는 폐결핵 악화를 이유로 마산국립병원에 강제입원 되어 있었고, 한국에 입국이 거부된 오다씨와 나를 대신해, 그해 6월 말부터 7월에 걸쳐 쓰루미 슌스케(鶴見俊輔)씨가 연금 상태의 시인과 면회하기 위해 마산을 방문하여 김지하와 쓰루미씨와의 강한 인연이 생겼습니다. 그로부터 수년간의 숨 막히는 전개는, 사라지지 않는 악몽으로서 내 속에 남아 있습니다. 최대의 위기는 74년이었습니다. 4월 3일, '민청학련' 사건이 일어나 치안 당국은 '민청학련' 관계자 34명의 체포를 발표, 지명 수배된 김지하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피신하던 중 전라남도 흑산도에서 체포되어, 7월 9일 비상군법회의에서 사형을 구형받고 13일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일본에서는 사형구형 다음날인 10일에, '김지하 구원 국제위원회'를 발전시킨 '김지하 등을 돕는 모임'을 발족시켜, 세계에 구원을 호소했습니다. '김지하를 죽이지 말아라! 석방하라!'라는 한국대통령에 보내는 서명의 호소는 세계 각지에 확대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오오에 겐자부로(大河健三郎),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마쓰모도 세이조(松本清張), 시바다 쇼(柴田翔), 다니가와 슌타로(谷川俊太郎) 등 많은 사람들이, 해외에서는 사르트르, 보브와르, 마르쿠제, 하워드 진, 노엄 촘스키, 에드윈 라이샤워 등 수많은 저명인이 서명했습니다. 수많은 집회, 서명 활동, 한국에서의 재판 방청, 단식투쟁 등의 운동에 의해, 김지하 구호운동은 한국 민주화투쟁에 연동해 나갑니다. 한국정부는 국제적인 항의에 굴복하고 사형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지만, 김지하가 '형 집행정지‘ 처분에 의해 석방된 것은 1980년 12월 12일이었습니다. 74년 이후의 김지하씨의 수난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수난의 내실이 정확하게 알려져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시인의 고독한 죽음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죽기 전에는 꼭 결별의 말 한 줄은 남기고 가자" 라고 시의 말미에 적은 김지하는, 무음으로 모습을 지워 버렸습니다. 남겨진 자들에게 끝나지 않은 것을 짊어지게 하고. 나는 구명운동과 더불어 75년 12월에 "불귀(不歸)"를, 78년 9월에 "고행(苦行)"이라는 제목의 김지하 작품을 편집간행했습니다. "불귀"에는 열세(劣勢)의 싸움의 끝, 지하(地底) 잠행(潛行)하는 젊은 김지하가 적어둔 시편 외에 '옥중 체험기'도 들어있고, 영혼의 해방을 기록한 명작 '고행-1974' 등, 그 시점에서 모아진 작품 여러 가지가 수록됐습니다. 도망가는 절망의 날에, 혹은 사로잡힌 옥중에서 태어난 시들은, 절절한 슬픔에 파묻혀 있으면서도, 한 줄기 빛을 요구하며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어디 있느냐날 맞던 불빛 아련한 그 처마 밑부산스러이 신발 끄을던 소리이제는 어디 있느냐 낯익은 신작로가흙내 정다운 이 비오는 밤에어디서 애틋했던 그 마음이제는 굳어 사정없이 돌이 되느냐 어렵고 지리한 먼 길을 돌아지친 마음이 동네 어귀에 첫발을 디딜 때의 서러움이여그토록 괴롭히던 초라한 그림자도이제는 떠나가고 없는 밤 울어라맹꽁이야 나를 울어라 실컷 울어구름 낮게 흐르는 저 어둑한 고개를 다시 넘어빈 들녘 끝없이 헤메어 갈 나를 미친 듯이 울어라 마주할 얼굴도내밀 손길도 이제는 없는옛날엔 애틋했던 호롱불 및의 그 둥근 미소여이제는 어디서 굳어 사정없이 돌이 되느나돌이 되느냐."(「비 오는 밤」)
"새벽 두시는 어중간한 시간잠들 수도 얼굴에 찬 물질을 할 수도책을 읽을 수도 없다공상을 하기는 너무 지치고일어나 서성거리기엔 너무 겸연쩍다 무엇을 먹기엔 이웃이 미안하고무엇을 중얼거리기엔 내 스스로에게너무 부끄럽다. 가만 있을 수도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새벽 두시다어중간한 시간이 시대다" (「새벽 두시」)
"눈이 내린다술을 마신다마른 가물치 위에 떨어진눈물을 씹는다숨이 지나온 모든 길두려워하던 내 몸짓 내 가슴의모든 탄식들을 씹는다혼자다마지막 가장 자리바늘로도 못 메꿀 틈 사이의 거리아아 벗들나는 혼자다" (「바다에서」)
또 언젠가, 이것도『불귀』에 수록되어 있는 시 '서대전역(西大田驛)'에 대해 제가 "이 시를 좋아하고, 한번 서대전역에 내리고 싶다"고 편지로 써 보냈더니, "그것은 참 좋다. 서대전역에도 목포에도 가자"라고 하는 시인의 전언이 도착했습니다 . 지하에 잠행하고 도망갈 때에도 향하는 곳은 남쪽. 고향 땅을 목표로 하는 시인의 영혼이 너무 슬픕니다. 민주화가 달성되었다고 게을러진 많은 사람들에게 김지하의 처절한 맨손의 싸움, 고난의 도주의 날들을 상상해 주었으면 합니다. 민주주의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전처럼 두툼한 한 권,『고행』은 옥중 및 법정에서의 시인의 투쟁의 모든기록입니다. 책 띠에 나는 이렇게 썼습니다. "74년 4월의 체포부터 10개월 후의 석방. 그 한 달 후의 재체포에서 76년 12월의 '최후진술'까지, 약 2년 반 동안의 쓰고 말한 모든 내용이 여기에 있다". 그 엄청난 기록은 언제나처럼 여러가지 방법으로 나에게 전달된 것이었습니다. '옥중 메모'에 대해서 나는 "여기에 있는 대부분은 김지하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무기형을 받고 영등포 교도소에 복역하던 1974년 11월경부터 석방되는 1975년 2월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썼습니다. 단기간에 쓰여진 구상 메모는 작은 문자로 빽빽하게 쓰여져 있고, 내밀한 번역 작업은 너무 어려웠습니다. 내 앞으로 온 접힌 종이조각을 앞에 두면 언제나 피로가 멀리 날아갈 정도의 긴장을 느꼈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힘없는 나를 의지해야 하는 김지하씨의 외로움을 생각하면, 아무리 힘들어도 그의 신뢰에 응하고 싶어서 노력했습니다. 다른 출판 작업도 당연히 있었고 저의 30대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도 시인의 글에 감응할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해서 용기를 가졌습니다. 사상을 심판하는 '반공법 위반' 사건 재판에서의 시인의 투쟁 기록은 지금도 나의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그 명민함, 뛰어난 사고 능력을 발휘하여 때로는 유머마저 섞은 김지하씨의 법정에서의 싸움은 압권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김지하씨를 비웃어 온 '민주주의’자들은 읽어 주셔야 할 문건입니다. 특히 '최후진술'에서 놀라운 김지하씨의 말에는 빨려들어갈 정도입니다. 「오적」 이래 이처럼 정연하면서도 웃음으로 정권을 우롱한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징역 10년에 자격정지 10년의 구형은 나에게 영광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종신형을 다 마치고 죽은 후 다시 부활해서 10년의 징역을 한번 더 살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감사에 감사를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진술은 확 바꾸어 장중하고 막힘이 없는, 김지하의 사상의 깊은 부분을 전하는, 뛰어난 문학적인 것이었습니다. 김지하라는 사람의 뛰어난 언어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인 진술이라고 생각합니다. 1980년 5월에 일어난 민주화 투쟁에 있어서의 최대의 비극,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 교도관으로부터 사태의 경위를 들었던 김지하씨는 잠 못 이루는 밤들을 보내는 가운데, 현행의 정치 투쟁의 이념으로는 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릅니다. 무엇보다 인간 정신의 해방이 필요하다는 인식입니다. 김지하 씨가 석방된 것은 그로부터 7개월 후, 한국 전역에 패배감이 감도는시기였습니다. 민주화 운동은 정체되고 고립되어 전투를 첨예화하는 그룹도 생겨났습니다. 격화된 민주화 투쟁의 현장은 74년과 같은 과격한 선동을 김지하에게 요구하면서, 침묵하는 김지하 씨에게 이따금 '전향자' '변절자'라는 꼬리표를 붙였습니다. 장기간의 옥중생활은 김지하씨의 정신과 육체를 해치고, 폐소공포증이 원인인 병으로 시인은 고통받고 있었습니다만, 6년의 공백을 메우듯 82년 6월에는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를, 12월에는『대설 남』제1권을 발표했습니다. 두 권의 책은 즉시 발매금지. 당시 문예지 '우미'의 편집장이었던 저는 다음 83년의 '우미' 4월호에 '발매금지의 최신작'으로 '대설 남'을 게재했습니다. 그리고 김지하씨의 구명운동에 진력한 쓰루미슌스케씨와 오오에겐자부로씨에게「『대설 남』을 읽는다」라는 대담을 시도했습니다. "편집 후기"에 저는 "그동안 그에 대한 보도의 대부분은 김지하씨의 전향을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라고 명기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피상적인 이해인지에 대해서도. 자신의 내부에 깊게 침잠했던 김지하씨는 91년 5월 노태우 정권에 항의해 분신자살하는 젊은이가 속출하는 것을 우려해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 걷어치워라' 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습니다. '비폭력의 저항'인 자살을 신성화하는 경향에 대해 김지하씨는 젊은 생명을 사랑한 나머지 쓰라린 고통의 말을 던졌습니다. 운동가들과 젊은이들은 충격을 받고, '죽은 자에 대한 모독', '김지하의 변절', '김지하의 전향', '김지하는 죽었다'고 규탄하는 풍조가 민주화 운동 속에 한국사회에 퍼져 나갔다고 생각합니다. 그 편향된 김지하 관점에 괴로운 마음을 안고 '동아일보'(91년 3월 7일~6월 20일)에 게재된 작품이 회상기 '모로 누운 돌부처'입니다. 내가 "우미" 다음에 편집한 "중앙공론 문예특집"(94년 봄호)에서는 번역을 히라이히사시씨에게 의뢰해 게재했습니다. 원고를 읽으면서 여기에 김지하를 만든 토양, 지하수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인간 정신의 해방"은 생명사상으로 이어지는 것이겠지요. '일본의 독자에게'에서 김지하씨는 "나의 생애를 관철하는 어둠과 우울은 어릴 때부터 시작되어 그것은 반도의 역사의 반영이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김지하씨 9세의 6월로 끝나는 이 회상기는 음영(陰影)을 깊게 하고 있습니다. 히라이씨의 번역은 제 상상 이상의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회상기『모로 누운 돌부처』는 비참과 아름다움이 교차하고 몽환(夢幻)과 현실이 뒤섞이는 유년기의 기억을 그린 "세계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새로운 세기가 됐을 무렵, 김지하씨가 병으로 입원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걱정이 되어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에 대한 회신이 나의 손에 있습니다.
"우주의 끝까지 함께 '흰 그늘'을 안고 가는 것이 우리 두 사람의 운명이다 라는 나의 말을 잊지 않고 계신 것을 확인하고, 무한히 내 마음이 넓어지는 것을 절절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말대로 무리를 해서, 4, 5개월정도 입원요양하고 며칠 전에 집에 돌아왔습니다. 급했던 마음도 안정되어, 끝없이 먼 길을 서서히 나아가겠다고 결단하고,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시인 김지하, 미학자로 복귀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고자 합니다.나의 지난 30년 동안 당신의 사랑과 우정을 과분하게 받고 성장한 것, 그리고 지금도 사랑받고 있는 것을 알고, 멋진 행복에 잠겨 있습니다. 마리에(毬栄)님!" 2000년 6월 29일 한국 일산에서 지하 배(拜)
시인의 편지는 모두 시인만 쓸 수 있는 편지였습니다. 마음이 너무 넘쳐서 그것을 모두 받았는지 불안해집니다. 그렇게 부드러운 마음을 보내 주었는데, 왜 나는 그 때 "실망하고 우려하고 있습니다"라고 써 보낸 것일까? 라고 자신을 나무라던 9년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보낸 긴 편지의 날짜는 2020년 7월 8일.
"내가 2013년 1월에 보낸 편지는 제 진실한 생각이었습니다. 박근혜를 지지하는 시인의 행동을 훌륭하다고 쓸 수 없었습니다. '실망하고, 우려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은 시인과의 긴 세월 속에 생겨난 나의 성의였습니다. 나의 시인 김지하씨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담긴 말이었습니다……."
그 편지가 김지하 씨 손에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나는 마지막 날까지 후회하며 살겠지요. 상냥한 누나로 시인의 모든 행위를 받아들이는게 좋았는지, 나는 끊임없이 괴로워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김지하씨를 거기까지 몰아넣었을까요? 한국에서 심포지엄 등에 참석할 때 사람들의 반응에 불안을 느낀 경험이 있었습니다. 문학 관계자도 "김지하…. 과거의 사람이지?"라고 하는 반응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과거라고 해도, 70년대는 고작 반세기 전입니다. 잊혀져도 좋을 정도의 옛날은 아닐 것입니다. 때때로, 김지하씨와의 악수를 기억합니다. 너무 강한 악수. 그 때마다 시인의 타고난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모로 누운 돌부처"에서 회상되는 소년의, 누구에게서도 구할 수 없는 고독과 겹쳐서 나에게는 보입니다. 잊어 버리기 쉬운 사람들을 위해, 내가 알게 된 김지하 시인 상(像)을 지금이라도 쓰기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지하 시인의 영결식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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