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은 '안전 문제'? … "가부장제와 성 고정관념"이 성폭력 유발
지난달 24일 김현숙 여가부 장관은 같은 달 15일 발생한 '인하대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 "학생 안전의 문제지, 또 남녀를 나눠 젠더갈등을 증폭하는 건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APWLD 등은 이번 보고서에서 현 정부의 이 같은 현실 인식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성폭력은 개인 간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뿌리 깊은 가부장제와 유해한 성 고정관념"으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며, 그러한 성폭력을 제대로 방지하고 소거하기 위한 정책 및 사법적 노력, 피해자 보호를 위한 예산 및 인력의 투입 등이 한국사회엔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특히 지난 2020년 세상에 드러난 텔레그램 성착취(소위 N번방) 사건 등 디지털 성범죄를 한국사회의 대표적인 젠더폭력 문제로 지적했다. 불법촬영 등 디지털 성범죄 사건의 2020년 국내 기소 건수가 2003년 대비 11배 증가(국제앰네스티)했으며, △성폭행 과정에서 촬영되거나 △동의 없이 촬영되거나 △동의 없이 유포되거나 △조작·합성된 이미지들이 "수익을 창출하는 데 사용"(휴먼라이츠워치)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이러한 디지털 성범죄가 지속·증가하는 이유로 △불법촬영 사진, 영상 등의 '판매' 구조 △성적 순결의 이미지가 여성의 평판과 직결되는 문화 △피해자 지원센터의 인력 및 훈련 부족 △사건 방지를 위한 당국과 소셜미디어 플랫폼 간의 협업 부재 △성범죄 기소 과정의 결함과 불충분한 처벌 등을 제시했다. '여성폭력에 대한 언론, 사법부, 정치권 등의 태도' 등이 사건의 구조적 원인이자 "공범"으로 자리한다는 박지현 전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의 발언(7월 16일)이나 "성폭력은 피해자의 절대다수가 여성이고, 성차별적 통념이 범죄 발생에 중요한 이유인 가장 전형적인 여성 폭력"이라는 권인숙 의원의 발언(7월 27일)과도 맞닿아 있는 인식이다. 한편 여성 대상 불법촬영 등 디지털 성범죄는 이번 '인하대 성폭력 사건'에서도 경찰이 가해자의 휴대전화에서 발견한 영상을 토대로 가해자에게 카메라 등 이용 촬영 혐의를 추가하면서 화두가 된 바 있다. 김 장관은 24일 발언에서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의 남성 피해자 비율이 20%가 넘는다"며 이를 "남성과 여성의 문제로 갈 게 아니"라고 언급했지만, 검찰 통계상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의 94%가 남성인 점, '몸캠피싱'에 집중된 남성 대상 범죄와 직접적 성폭행은 물론 '성착취를 통한 수익구조'와 직결되는 여성 대상 범죄를 단순 비교할 수 없다는 점 등이 해당 발언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구조적 성차별' 심각한데 … "반 페미니스트 대통령, 성평등에 위협"
실제로 '남성의 중위소득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중위소득의 차이'로 정의하는 OECD 기준 성별 임금격차에 관하여, 한국은 OECD 통계상 1995년부터 1위를 차지하고 있다. 2018년 시중은행 채용 성차별(관련기사 ☞ 성차별·가족찬스 채용비리 은행원들은 여전히 고액 연봉을 받고 있다), 2020년 언론사 채용 성차별(관련기사 ☞ '남녀고용평등법'은 있는데...대전MBC 채용 성차별 못 막은 이유는) 등 채용 과정에서의 성차별도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정치적 영역에서의 성차별, 낙태에 대한 접근성 부족 등도 문제로 지적됐다. 단체들은 "국회 300석 중 여성은 57석(19%)에 불과"하며,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형사처벌 헌법불합치 결정에도 "(헌재) 결정 이후 정책과 프로그램의 진행이 없는 탓에" 여성들이 "포괄적인 낙태 서비스와 치료를 제공"받고 있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들은 "윤석열 대통령의 여성 인권과 성 평등에 대한 공격"이 한국 내 성평등 관련 상황을 악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난 3월 대선 국면부터 이어진 윤석열 대통령의 반 페미니즘 기조와 성평등 전담기구인 여성가족부 폐지론 등이 한국사회의 공고한 구조적 성차별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이다. 보고서는 특히 "윤 대통령의 공약과 반 페미니즘적 발언은 가뜩이나 취약한 국내 여성의 권리와 성평등 운동에 큰 위협"으로 작용한다고 강조했다. 여가부 폐지 방침에서 엿보이는 "(구조적) 성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 정부의 인식이 성폭력 등 "성 불평등 문제들에 대한 법적, 정책적, 규범적 해이함을 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보고서에선 "성평등 전담부처인 여성가족부의 권한과 역할을 강화하고 모든 정부 부처에 성평등 전담 부서를 신설할 것"을 필두로 △차별금지법 제정 △정치 및 공적 영역에서의 여성 대표성 확대 △온라인에서의 성적 괴롭힘을 성폭력의 형태로 규정 △강간죄 판단 기준을 동의 여부로 개정 △안전한 임신중지에 관한 보편적인 접근권 보장 등을 한국 정부의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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