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엔화 가치가 1990년대 거품붕괴 시기 이후 32년여 만에 최저 수준으로 폭락했다. 시장은 일본은행의 강력한 시장 개입 가능성을 다시 점치고 있다. 18일 오후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달러당 149.03엔을 기록하는 등 장중 149엔을 돌파했다.엔/달러 환율이 달러당 149엔을 웃돈 것은 일본의 1980년대 거품경제가 붕괴하기 직전이던 1990년 8월 이후 32년 2개월여 만에 처음 나타난 현상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강경하게 밀어붙이는 기준금리 인상 기조와 일본은행이 정반대로 태세로 취하는 금융완화 정책이 맞물리면서 엔화 가치가 기록적인 수준으로 폭락하는 현상이 지속된 결과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엔화 가치가 폭락하는 와중에도 단기금리를 -0.1%로 유지하고 10년물 국채금리는 0%로 유도하는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고수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로 인해 시간이 갈수록 미일 금리 격차가 더 벌어짐에 따라 엔화 가치가 빠른 속도로 폭락하는 현상이 빚어졌다. 이와 관련해 달러당 엔화 가치는 이미 지난 14일(현지시간) 뉴욕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148엔을 돌파하며 150엔선에 바짝 다가섰다. 지난 13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147엔대로 오른 후 하루만에 148엔선을 넘어섰고, 이어 이날에는 149엔선까지 돌파했다. 엔/달러 환율은 작년 말만 하더라도 달러당 115.07엔 수준이었다. 그러나 두 나라 중앙은행의 상반된 기조가 우크라이나 전쟁, 물가 폭등 등의 이슈와 맞물리며 이날 현재까지 엔화 가치를 연초 대비 29.5%가량 끌어내렸다. 일단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은 강력한 시장개입에 나서 엔화 가치 절상을 유도할 것으로 보인다. 앞서 이미 지난달 22일 일본 당국은 엔화 가치가 달러당 146엔에 다가가자 시장에 개입해 엔화를 사들인 바 있다. 이는 일본 당국이 1998년 6월 이후 처음 시도한 시장개입이다. 이 때 시장에 쏟아부은 돈은 3조 엔 수준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엔화 가치가 다시금 급락세를 이어가는 것을 고려하면 일본 당국이 빠른 시간 안에 두 번째 개입에 나설 가능성은 커졌다. 대규모 외화를 보유한 일본 정부가 가진 '총알'은 충분해 보인다. 문제는 이 같은 개입이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는 데 있다. 세계 대부분 국가가 미국 연준에 이끌려 자국 기준금리를 끌어올리는 등 고육책에 나서는 가운데, 일본은행도 결국 같은 기조에 들어서야만 엔화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막대한 국가부채로 인해 기준금리 인상 시도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기준금리를 올리면 그만큼 일본의 국채와 차입금, 단기증권을 포함한 국가부채 규모는 올해 6월말 기준 1255조1932억 엔(약 1경2003조9146억 원)에 달한다. 일본 인구 1인당 약 1005만 엔 수준이다. 2003년 550만 엔 대비 두 배가량 불어나면서 사상 처음으로 1인당 빚이 1000만 엔을 넘어섰다. 이 상황에서 기준금리를 올린다면 그만큼 이자 부담액이 더 커진다. 정부로서는 이자의 늪에 빠져 더 위험한 상황에 다다를 수 있다. 결국 킹달러-엔저 현상이 장기간 이어진다면 '슈퍼엔저'는 앞으로도 상당기간 더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는 역시 자국 화폐 가치 하락 위험에 직면한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나라 외환시장의 변동성을 더 자극하는 연쇄고리로 촉발될 가능성을 가진다. 특히 엔저 현상이 기록적으로 이어진다면 일본 제품의 가격경쟁력이 강해지면서(가격 하락) 한국과 중국 제품의 수출경쟁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이는 아시아 위기를 더 부채질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엔화의 기록적인 폭락 행진이 단순히 남의 나라 이야기로 끝나지는 않을 공산이 큰 셈이다. 이와 관련해 일본 <지지통신>은 외환시장 관계자의 말을 빌려 "심리적 저지선인 150엔 돌파를 눈앞에 두고 (당국의 개입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엔화 약세를 시험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며 "조만간 150엔을 돌파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당국이 시장에 개입하더라도 한번에 대규모의 공세를 하지 않는다면 엔저 흐름을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리라고도 전망했다. 통신은 시장관계자의 말을 빌려 "지난 13일에도 1조엔 규모의 엔화 매입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며 "3조 엔 미만의 개입으로 시세를 5엔가량 엔고 방향으로 돌린 일전(10월 22일)의 개입에 비해 그 효과가 희미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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