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법은 매우 명확하다고 본다. 고령층이 집단 자살을 하거나 집단 할복을 하면 되지 않을까."
이 무시무시한 발언이 뒤늦게 <뉴욕타임스> 등에 보도되면서 나리타 교수의 이름이 세계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논란이 일자 나리타는 일본 사회를 정체시키는 나이 든 엘리트들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취지였다고 애써 진화하려 했지만, 인터넷 방송뿐만 아니라 학회 토론회에서도 비슷한 발언을 한 적이 있음이 알려지며 논란이 커지고 있다 한다. 얼핏 듣기에는 실소를 날리고 넘어가도 될 기사 같다. 그러나 일본보다 더 심각한 저출생-고령화의 인구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의 시민으로서 결코 가볍게 흘릴 수만은 없는 소식이다. 나 역시 최근에 비슷한 이야기를 다름 아닌 한국어로 직접 들은 바 있어서 더욱 그렇다. 아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지나가는 이가 툭 던진 한 마디였다. 길거리에서 동료와 잡담을 나누다 연로한 어느 지인의 건강 문제로 화제가 옮아가자 옆 사람이 불쑥 끼어들며 이렇게 내뱉었다."나이 든 사람들은 다 없애버려야죠. 예순 살 넘은 노인네는 쓸모가 없어요."
내가 놀란 것은 이 발언의 무도함 탓만은 아니었다. 이 말을 한 사람 자신이 이제 곧 60살이 될 것 같은 초로의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절망과 냉소, 어쩌면 자기혐오가 섞인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우리가 정말 '위기'의 한복판에 들어섰음을 실감했다.한국 사회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집단행동, 출산 파업
저출생은 자본주의 산업화가 성숙한 국가에서 경향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고 개인주의 문화가 발전하면 어느 곳이든 출생률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한국의 출산율 저하는 이런 보편적 경향과는 또 다른 차원의 가파른 기울기를 보인다. 나리타 교수의 망언이 불거진 이웃나라 일본보다 고령화 속도가 훨씬 더 빠를 정도로 말이다. 아마도 보편적 출산율 저하와 한국의 저출생 사태 사이의 편차를 설명하는 중요한 단어는 '출산 파업'일 것이다. 내 기억에 2000년대에 출산율 저하가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기 시작할 때에 언론에서 자주 사용하던 말은 '저출산'이나 '저출생'이 아니었다. '출산 파업'이었다. 하지만 이 말이 출산율 저하를 마치 여성들의 의도적인 선택 탓으로만 몰아가는 것처럼 들린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사용을 기피하게 됐다. 물론 국가기구나 정치인, 언론은 '출산 파업' 같은 비유를 자제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 출산율 저하의 급격함에는 아무래도 이 비유를 동원해야만 설명이 되는 측면이 있다. 작년 8월에 영국 BBC가 한국의 저출생 사태를 보도하면서 '출산 파업'이라는 표현을 다시 끄집어내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분명히 있다. 다만 이것은 '출산' 파업이라는 표현이 암시하는 것처럼 여성하고만 관련 있는 현상은 아니다. 여성이 모순을 가장 첨예하게 경험하며 따라서 가장 의식적으로 선택을 하기는 하지만, 한국의 출산 파업은 여성들의 행동으로만 설명되기에는 너무도 광범하고 강력하다. 같은 연령대 남성들이 동조하고 동참하지 않는다면, 이 정도로 심각해질 수 없다. 이것은 한국 자본주의의 최근 전개와 얽혀 특정 연령 이하 세대 '전체'가 무의식적으로 내린 집단적 선택의 결과다. 한국의 출산율 저하가 비슷한 경제 수준의 다른 나라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반이다. 이때는 1980년대 중-후반에 시작된 한국 사회 변화의 결말이 어느 정도 분명히 드러나던 시기였다. 민주화는 군부정권을 종식시킬 만큼은 전진했지만, 사회적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출구는 끝내 열리지 않았다. 분단, 현실사회주의 붕괴, 노동운동의 좌절 등등 이유의 목록이야 길고 길겠지만, 어쨌든 다들 이게 이 사회의 숙명임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바로 이 시점에 교육, 부동산 등을 중심으로 중산층 지위를 굳히고 이를 자녀에게 상속시키는 '강남 중산층' 생활양식이 좁은 의미의 강남 중산층을 넘어 전국의 중산층에 확산되고 뿌리를 내렸다. 이 생활양식을 유지하거나 이에 근접하기 위해 필요한 자녀 1인당 최소 투자비용의 규모를 누구든 가늠할 수 있게 됐다. 반면에 외환위기 등을 겪으며 그 반대편에서는 중산층에서 멀어지거나 거기에 끝내 다가갈 수 없는 운명의 윤곽이 드러났다. 어떤 계층으로 살아갈지 확연히 가르는 분단선이 대다수 시민의 턱밑으로 파고들어 왔다. 이 무렵은 1960년대에 출생한 세대(흔히 '86세대'라 불리는)가 혼인을 마치고 자녀 수가 평균 두 명인 표준화된 핵가족의 삶을 꾸린 시점이었고, 1970년대 초반 이후 출생 세대('86세대'에 대비해 'X세대'라 불린)가 이제 막 그런 삶에 합류하려던 참이었다. 바로 이 후자 세대가 '출산 파업'의 첫 번째 세대다. 이들은 2000년대 초에 이미 확연히 굳어진 한국 사회 상황을 무의식적으로 감지했고, 계층 분단선의 위협 앞에 전율했다. 그리고 급격한 자녀 출산 기피로 이에 반응했다. 그러고 보면 '출산 파업'은 얼마나 예리한 역사적 안목을 보여주는 작명인가! '출산' 파업보다도 출산 '파업'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1987년 6월 항쟁이 끝나자마자 "노동자도 인간이다"라며 자신들의 지위를 새롭게 확인하려 한 이들이 기댄 수단은 파업이었다. 그러나 군부독재 잔당뿐만 아니라 이른바 '문민'정부들마저 낡은 악법과 공안기구를 동원해 철저히 짓밟으려 한 것이 파업이었고, 외환위기를 거치며 일부 대기업 정규직을 제외하면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일처럼 되어 버린 것이 파업이었다. 대신에 출산 파업이 시작되었다. 눈에 보이는 파업이 탄압받거나 경원시되자 파업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쉽게 눈에 띄지 않는 파업으로 바뀌어 전개됐다. 이 무의식적 집단행동 덕분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더 낮은 계층으로 추락할 운명에서 가까스로 자신과 가족을 구해낼 수 있었던가. 이제껏 이 땅에 등장한 어느 정부도 하지 못한 일을 조직도, 지령도 없는 이 파업은 해냈다. "나도 인간"이라며 들고 일어나기에는 '인간'의 값이 너무나 확고히 결정된 사회에서 우리는 감히 '인간'이란 누구인지 되묻지 못했다. 정해진 '인간'의 값에 맞춰 우리끼리 담합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현기증 나는 속도로 선진국을 향해 질주하는 조국에서 상대적 궁핍화의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일단 이 정도 집단행동으로도 충분해 보였던 것이다.무의식적 집단행동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 초고령화 사회라는 물음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 성공적 집단행동이 낳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와 마주해야 한다. 그것은 '초'고령화 사회라는 초유의 현실이다. 노인이 인구 절반에 육박하고 총인구가 5천만 명인데 초등학교 신입생 수는 20만 명대로까지 떨어지는 사회. 단지 현 세대가 처음 경험할 뿐만 아니라 인간 역사에서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는 다시금 '인간'의 값이 문제로 떠오른다. 다만 이번에는 질문이 새로 세상에 나오는 세대가 아니라 그 반대쪽을 향한다. 경제활동인구에 비해 너무나 많아진 노인 인구에게 어느 정도의 경제적 자원을 허용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사회의 나머지 부분이 지나친 부담 때문에 생활 수준 하락까지 겪지 않으려면, 노인들에게 어느 정도의 삶을 허락해야만 하는가? 연금은? 의료비는? 대중교통 이용요금은? 지극히 정당해 보이는 이 물음은, 그러나 불과 몇 걸음만 더 나아가면 이런 물음으로 비화할 수 있다. 이 사회가 현 생활 수준을 유지하려면, 노인 인구를 과연 어느 정도나 감내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사회에 기여하는 생산과 재생산에 '필요한' 인간은 누구이고 '필요하지 않은' 인간은 누구인가? 이 '필요'를 개인의 나이로 환산한다면? 나리타 교수가 이와 비슷한 말을 감히 입 밖에 꺼낸 것은 그가 특별히 '무도한' 인간이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선량한 한 사람의 '경제학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냉정히 돌아봐야 한다.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이런 위기적 양상은 우리의 성공이 낳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다. 압축 성장뿐만 아니라 그에 적응하려던 출산 파업이 낳은 결과다. 대기업 담벼락 안에서만 벌어지던 파업이 소수 대기업 노동자와 다수 중소기업 노동자의 격차를 벌리기만 하는 뜻밖의 결과를 낳은 것처럼, 또 다른 파업, 출산 파업은 초고령화 사회의 긴장과 압력, 무거운 질문이라는 예기치 않은 고뇌와 고통을 몰고 왔다. 물론 출산 파업 자체가 문제의 근원은 아니다. 출산 파업은 그런 행동이라도 펼치지 않을 수 없었던 이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보다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대중 스스로 답을 찾으려는 노력을 우회해온 결과라는 점 또한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정해진 '인간'의 값에 반응하려 했을 뿐 '인간'이 도대체 누구인지는 묻지 않았다. 그런 값을 정하고 판을 벌인 이들에게 정색하고 '인간은 누구인가?',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는가?' 따지지 못했다. 회피해버린 물음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형태로, 더 막중한 무게와 엄청난 크기로 돌아온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기업과 국가의 대차대조표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지는, 꺼져가는 인간 생명의 값어치라는 더 난처하고 처절한 모양새로 이 물음과 재회한다. 이제라도 우리는 이 미친 듯이 질주하는 고속열차와 같은 자본주의에 용기 있게 이 물음을 던질 수 있을까?"정말 우리는 그렇게 없어져야만 하는 존재인가? 나는? 그리고 당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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