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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범 혀 깨물고 '가해자' 된 여성, 법원은 "어쩔 수 없었다" 재심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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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강간범 혀 깨물고 '가해자' 된 여성, 법원은 "어쩔 수 없었다" 재심 거부 [현장] '56년 만의 미투' 당사자 최말자 씨, '재심' 촉구하며 대법원 앞에 서다
18세의 성폭력 피해 여성이 가해 남성에게 '상해를 입힌 죄'로 오히려 징역을 살았다. 자신을 강간하려던 남성의 혀를 깨물었다는 이유였다. 59년 전 1964년의 일이다. 6개월의 옥살이 끝에 집행유예로 석방된 날, 피해자 최말자 씨는 아버지를 따라 걸었던 들판과 산길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 이후 그에겐 "평생 죄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그리고 평생을 "억울함과 분노 속에 살았다." 올해로 77세가 된 최 씨는 지난 2018년부터 5년 동안 싸우고 있다. 당해는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미투' 운동이 터져 나온 때다. 미투 당사자들이 전한 피해의 경험에서, 최 씨는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켰던" 그날의 억울함과 분노를 떠올렸다. 다른 피해자들로부터 용기를 얻은 그는 또 다른 피해자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기로 했다. 마침내 2020년, 최 씨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56년 만의 미투였다.

"어쩔 수 없는 판결이었다"? … 법원은 재심을 거부했다

2일 오전, 최말자 씨가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정문 앞에 섰다. 한국여성의전화 등 총 288개 여성단체와 70여 명의 시민들이 최 씨와 함께 했다. 기자회견을 개최한 이들은 이날 "재심 청구를 접수한 지 2년이 다 되어감에도 대법원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라며 "바로 지금 대법원이 사법부의 잘못을 바로잡을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최 씨의 재심 청구는 현재 기각된 상태다. 법원은 왜 최 씨의 재심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지난 2021년 재심을 기각한 부산지방법원과 재심 항고를 기각한 부산고등법원은 석연치 않은 답변을 내놨다. 64년 당시 "공판절차에서 이루어진 검증의 방법, 감정의 내용, 법관의 언행 등이 상당히 부적절하고 피해자의 인격을 침해했을 우려가 있었다"면서도 이는 "당시의 시대 상황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판결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64년 당시엔 검사, 판사 등 개인을 넘어 법령 자체에도 '강간 통념'이 공고하던 때다. 당시 재판부는 "당황하거나 괴로워하는 표정이 없었다", "범행현장까지 따라나섰다", "소리를 지르면 주위에 들릴 수 있었다"는 등의 말을 정당방위 불인정의 근거로 삼았고, 검사와 판사는 최 씨에게 "가해자에게 호감이 있던 게 아니냐", "가해자와 결혼하라"는 등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한 '56년 만의 미투' 당사자 최말자 씨. ⓒ프레시안(한예섭)
그러나 최 씨의 소송대리인단 측은 그러한 시대상을 최대한 고려한다 하더라도 법원의 재심 기각이 "완전히 잘못된 판결"이라고 강조한다. 최 씨의 재심 청구 사유가 '적법절차를 무시한 수사 남용'에 있기 때문이다. 재심결정의 핵심 요인으로는 흔히 △수사의 위법성과 △무죄를 밝힐 수 있는 새로운 증거의 발견이 꼽힌다. 대리인단에 따르면 당시 경찰은 최 씨에 대한 성폭력 가해 사실을 인지, 최 씨의 중상해죄를 정당방위에 의한 무죄로 검찰에 송치했다. 그러나 이후 검찰이 성폭행 미수 건을 자의적으로 배제했다. 재심 청구 당시 최 씨는 △영장 없는 구속 △진술 거부권, 변호인 선임권 미보장 등 위법수사 정황을 주장한 바 있다. 대리인단 단장을 맡고 있는 김수정 변호사는 이날 '재심 기각 결정에 법적인 근거가 있다고 보는가' 묻는 기자의 질문에 "(변호인단은) 당시 재판이 적법절차를 어김으로써 위법한 판단을 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라며 "이 사건은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무죄가 되는 사건이 아니라 그 당시도 무죄고 지금도 무죄인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당시 판결문을 보면 재판부는 최 씨의 방어행동으로 인해 성폭력 가해자가 "평생 말 못하는 불구가 되었다"라며 최 씨의 행동을 "과잉방어"로 규정했는데, 대리인단은 "당시 가해자가 (재판으로부터) 약 4개월 후 신체검사에서 1등급을 받고 군에 입대했다는 새로운 증거"를 발견했다. 당시 재판부의 유죄 논리를 뒤집는 새로운 증거 또한 충족된 셈이다.

최말자 씨 "너무 긴 세월 고통 속에 살았다 … 무죄 나왔으면 하는 생각 뿐"

이날 기자회견에 나선 최말자 씨는 "당시 아버지는 무지한 농부였고, 저는 18세의 아무것도 모르는 미성년이었다"라며 "누구도 날 지켜줄 수 없었고, 검사의 일방적인 폭언과 압박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돌이켰다. 대법원의 침묵 속에서 재심 청구가 3년 동안 끌려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도 그는 "너무 긴 시간에 내일이면 나이가 80이 된다. 정신력과 몸이 따로 논다"라며 "하루 빨리 정당방위를 인정받고 무죄가 나왔으면 하는 생각 뿐"이라고 심정을 밝혔다.
▲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개시 촉구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발언하고 있는 최말자 씨 ⓒ프레시안(한예섭)
2020년 5월 재심 청구서를 제출한 이래로 최 씨는 말 그대로 쉴 틈 없이 싸워왔다. 재심 청구를 위한 운동은 물론 각종 토크쇼, 집회, 대담, 선언문 낭독, 1인 시위 등을 통해 수많은 여성폭력 현장에 연대해왔다. 재심 청구 당해 6월부터 시작한 재심 개시 촉구 서명운동은 올해로 5회차에 접어들었다. 현재까지 3만 6065명의 시민이 서명했다. 최 씨의 사건은 여성폭력 사건에서의 피해자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은 대표적인 국내 사례로 꼽힌다. 성폭력 교육현장이나 여성학 수업 등에서도 최 씨의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최 씨 이후에도 비슷한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최 씨가 고령의 나이에도 용기를 접지 않는 또 다른 이유다. 이날 현장을 찾은 최원진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사무국장은 "(지금도) 폭행·협박이 없는 대부분의 (강간) 사건이 '가해자와 사귀어서', '피해자가 성적 수치심을 느끼기엔 나이가 많아서', '충분히 저항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아서' 등등의 이유로 불송치 또는 불기소되고 있다"라며 "저항한 피해자에게 왜 '과도하게' 저항하여 가해자를 다치게 했냐고 묻던 59년 전의 수사사법기관은, 저항하지 못한 피해자에게는 그 자체가 성폭력 피해가 아님을 증명하는 것처럼 피해자들을 몰아세우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현선 목포 여성의전화 대표는 "여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통념, 편견에 갇힌 사법기관은 폭력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리고, 피해자의 진술을 의심하며 여성 피해자의 말하기를 어렵게 만든다"라며 "어쩔 수 없었던 건 당시 피해자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처하게 된 성폭력 상황과 이에 대한 대응이지, 인권 의식보다 성차별 인식이 짙었던 법원의 판결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열린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개시 촉구 기자회견' 참여자들이 피켓을 통해 "대법원 재심결정 지금 당장"이라는 구호를 만들고 있다. ⓒ프레시안(한예섭)
그러면서 이들은 "(피해자의 재심 청구는)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고, 자신과 같은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수사·사법기관의 여성폭력에 관한 잘못된 통념을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라며 "재심을 결정하고, 사법부는 피해자의 방어행위를 정당방위로 인정하여 여성폭력 피해자에게 자신을 지켜낼 권리가 있음을 사회 전체에 각인시키라"고 대법원 측에 촉구했다. 최말자 씨는 이날 기자회견을 마친 뒤에도 대법원 정문 앞에서 1인 시위에 나섰다. 여성단체 활동가들과 자원 시민들은 5월 한달 동안 릴레이 1인 시위로 최 씨의 싸움에 동참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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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섭
몰랐던 말들을 듣고 싶어 기자가 됐습니다. 조금이라도 덜 비겁하고, 조금이라도 더 늠름한 글을 써보고자 합니다. 현상을 넘어 맥락을 찾겠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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