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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순이'라 불렸던 나, 이제는 베테랑 공장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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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공순이'라 불렸던 나, 이제는 베테랑 공장 노동자" [나, 블루칼라 여자] ② 자동차 시트 제조 공장 노동자 황점순씨

'힘' 좀 써야 한다는 노동 현장, 그곳에도 여자가 있습니다. 웬만한 체력으로는 버티기 힘들다는 노동 현장에서 체력적 한계뿐 아니라 차별과 배제마저도 이겨낸 이들이죠. 남성 비율이 압도적으로 큰 블루칼라 노동 현장에서 살아남은 '기술직 여성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남성중심적 문화가 지배적인 현장에서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차별과 배제를 버텼습니다. 여자 화장실이 없는 현장,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당해야만 했던 무시와 젠더폭력 속에서도 자신만의 기술을 터득해 당당하게 '기술직 여성'으로서 커리어를 이어 나간 이들을 <프레시안>이 만났습니다.

자신이 흘리는 땀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 여성들은 건설 현장에서도 공장에서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건설 현장에서 도면을 그리는 먹매김 노동자, 건물 뼈대를 이어 거푸집을 만드는 형틀 목수, 자동차 제조 공장에서 부품을 염색하는 도장노동자 등 <프레시안>이 만난 블루칼라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편집자 주

자동차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3만여 개의 부품이 필요하다. 그만큼 다양한 공정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자동차에 타면 앉게 되는 자동차 시트를 만들기 위해서는 골격이 되는 프레임을 설계하고, 그 위에 덧대는 폼패드를 성형하고, 쿠션과 커버 레버와 같은 부품들을 조립하는 등 많은 공정을 거친다. 대부분의 공정이 기술의 발전으로 자동화 되었지만 여전히 사람의 손이 필요한 공정이 있다. 자동차 시트를 움직이는 레일과 같은 부품을 도색하는 라인이 그렇다. 색을 입히는 작업 자체는 기계화 되었지만 도색할 부품을 라인에 올리고 불량 여부를 판별하는 과정에는 여전히 사람의 손이 필요하다. <프레시안>은 지난달 22일 경북 경주에 위치한 자동차 시트 기업 '다스'를 찾아 24년 째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황점순 씨를 만났다.

점순 씨는 경북 봉화에서 7녀 1남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점숙이, 점남이, 점옥이, 점순이, 점희. 첫째부터 일곱 째까지 '점'자 돌림인 자매들을 지나 여덟 번째 동생이 태어났다. 남동생 이었다. 남동생은 일곱 자매의 '점'자 돌림을 따르지 않는 멋진 이름을 갖게 됐다. 그게 서운해 엄마에게 왜 예쁜 딸을 낳아 놓고 왜 이름을 '점순이'로 지었냐고 물은 적도 있었다.

▲<프레시안>은 지난달 22일 경북 경주에 위치한 자동차 시트 기업 '다스'를 찾아 24년째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황점순 씨를 만났다. ⓒ프레시안(박정연)


"우리 보고 그랬어 '공순이'라고"

중학교를 막 졸업한 점순 씨는 어려운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고 싶어 고등학교 진학 대신 취직을 선택했다. 하지만 배움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은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점순 씨는 일하면서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말에 고향인 봉화를 떠나 김해에 있는 한일합섬방직공장에 입사했다. 그 때 점순 씨의 나이는 18살이었다. 한일합섬에 다녔던 점순 씨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다. 하루 12시간이 넘게 미싱을 돌리기도 했다. 잠을 자지 못해 얼굴이 노랗게 떴다. 그렇게 번 돈은 봉화에 있는 가족 살림에 보태지거나 막내 동생의 공부 뒷바라지에 쓰였다. 남동생은 점순 씨 가족에서 대학을 간 유일한 형제였다. 점순 씨는 당시 한국 산업의 발전을 이끈 산업역군이었지만 그를 부르는 호칭은 '공순이'였다.

"그땐 딸들한테 투자를 잘 안 했다. 한일합섬에 온 여자아이들이 다 배우려고 왔기 때문에 일하면서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크게 힘들다는 걸 몰랐던 것 같다. 내가 있을 때만 해도 관리직급은 다 남성이었지만 여자 사원이 3000명이나 됐다. 그리고 우리 보고 그랬어. '공순이'라고. 일하느라, 공부하느라. 잠을 거의 못 자다시피 했지만, 그게 크게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는 게 다 그렇지 않나."

6년동안 한일합섬에서 일을 하면서 고등학교 졸업장을 딴 점순 씨는 엄마가 소개한 고향 남자와 결혼하면서 경주에 정착하게 됐다. 아이 둘을 낳은 그는 "먹고 살기 위해 안 해본 게 없었다." 보험을 팔아봤고, 식당에서 서빙도 해봤고, 포터트럭에 과일장사도 해봤고, 붕어빵 장사도 했다. 그는 "처음에는 남편이 직장에 적응을 잘 못해서 장사를 시작했는데, 장사를 해보니 안정된 수입이 있어야 아이들을 키우겠더라"며 지인의 소개로 지금 다스의 전신인 대부기공에 입사하게 됐다.
▲<프레시안>은 지난달 22일 경북 경주에 위치한 자동차 시트 기업 '다스'를 찾아 24년 째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황점순 씨를 만났다. ⓒ프레시안(박정연)

"남자는 가장이고, 여자는 먹고살기 어려워서 나온 것처럼 생각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 들어간 공장의 분위기는 이전과 사뭇 달랐다. 어릴 적 공장에서처럼 일은 똑같이 힘들었지만 왠지 처량한 시선이 점순 씨 뒤를 따라왔다. 그는 "경상도에 '남자우월사상'이 있다 보니까 처음 들어왔을 때는 여자라고 좀 깔보는 경향이 있었다"며 "가정 있는 여성이 직장 나오면 먹고살기 어려워서 나온 것처럼 생각하고 남자는 집안의 가장이라고 치켜세워주고 자랑스럽게 돈을 벌었다. 나도 우리집에서 가장이었는데 여성들을 좀 무시하는 느낌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12시간 주야 맞교대를 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다스는 현재 8시간 2교대로 돌아가지만, 당시 대부기공은 아침 7시부터 일을 시작하면 저녁 7시까지 일해야 했다. 저녁 7시에 일을 시작하면 아침 7시까지 12시간 동안 일한 뒤 맞교대해야 했다. 철야까지 있는 날에는 하루를 뜬 눈으로 꼬박 새고 36시간 동안 일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 생각해보면 '깡다구'로 버텼다"며 "밤에 일할 때는 모르는데 아침 근무할 때 몽롱해서 밥을 먹으러 가기 힘들 정도였다"고 말했다. 관리직인 '반장'의 권력이 세서 비위를 맞춰야 하는 것도 어려운 점 중 하나였다. 점순 씨는 반장의 권력이 '신격화'되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일요일 특근을 못 한다고 하거나, 술 먹자고 하는데 안 간다고 하면 '니 대가리가 몇 개고'라고 말했다"며 "반장이 근무조를 편성하니까 순번대로 공평하게 돌아가는 게 아니라 어떤 때는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잔업을 더 주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다가 금속노조가 들어오면서 '조반장 평가제'를 도입했다." 점순 씨는 "직접 반장을 평가해서 장으로 적합하지 않은 평가가 나온 3명 정도가 자격미달로 떨어졌다"며 "그때부터 사내 분위기가 많이 바뀌고 반장들도 권위를 내려놨다"고 말했다.
▲<프레시안>은 지난달 22일 경북 경주에 위치한 자동차 시트 기업 '다스'를 찾아 24년 째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황점순 씨를 만났다. ⓒ프레시안(박정연)

23년 전, 입사 날짜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하는 점순 씨

현장에서 점순씨는 '점수이 아지매'로 불린다. 다스 공장의 생산직 752명 중 여성은 60명 남짓이다. 여성 비율이 10%가 채 안 된다. 그는 "여자들은 직급이 거의 없다. 그래서 (호칭을 정하기가) 참 애매한 것 같다"고 했다. 여성들의 직급이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성이 적기도 하고 주로 기계를 만지고 하다보니 사람들이 선뜻 나서지 않는 것 같다"며 "30년 있어도 여성들은 보통 일반 사원으로 퇴직한다"고 말했다. 점순 씨는 23년 전인 자신의 입사 날짜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할 정도로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그래도 그때는 힘든 줄 모르고 일했다.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즐거웠다"고 말했다. 그는 "집안이 어렵고 신랑도 직장 생활을 오래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내가 가장처럼 일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그러다 직장에 오래 나오니까 점차 내 인생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이어 "일하면서 좋은 동료들을 만났다. 그들과 탈의실에서 잠깐 서로 사는 이야기 하는 게 내 인생에 생기를 불어넣어 줬다"며 "출근하는 것 자체가 좋고, 출근할 곳이 있다는 게 좋다"고 말했다. 이제 베테랑이 된 점순 씨는 자신의 라인에서는 불량이 나오지 않는다고 자신감 있게 말했다. 그는 "부품을 마구잡이로 거는 것 같아 보여도 일정 규격과 간격을 잘 맞춰 걸어야 낙하물이 없다"며 "나는 그 규격을 잘 맞춰서 불량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게 내 노하우"라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정년까지 2년이 남은 그에게 일터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를 묻자 "동료들에게 좋은 동료로 남고 싶다"며 웃어 보였다.


아래는 황점순 씨와 나눈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프레시안>은 지난달 22일 경북 경주에 위치한 자동차 시트 기업 '다스'를 찾아 24년 째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황점순 씨를 만났다. ⓒ프레시안(박정연)

프레시안 : 본인과 하는 일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린다.

황점순 : 이름은 황점순이고 65년생. 만으로 58살이다. 2000년 3월 23일 다스에 입사해서 23년 5개월 일했다. 24년차로 도장팀에서 일을 하고 있다. 우리 공장은 자동차 시트 완제품을 만들거나 시트에 들어가는 부품을 생산한다. 자동화된 공장이기 때문에 생산된 부품에 기계가 색을 입혀준다. 프레스에서 찍어나온 자동차 부품들을 도색 작업을 위해 콤비아(컨베이어벨트)에 일일이 건다. 기계가 부품에 색깔을 입혀주면 그 부품들을 다시 빼서 옮기는 일을 하고 있다.

프레시안 : 황점순님의 성함을 들으니 저희 어머니 성함이 생각난다. 저희 어머니도 자매끼리 '숙'자로 돌림이 있다.

황점순 : 우리는 '점'자 돌림이다. 딱히 뜻이 있는 게 아니라 딸이 많다보니까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 같다. 점숙이, 점남이, 점옥이, 점순이, 점희 딸이 일곱이다. 엄마한테 왜 예쁜 딸을 낳아놓고 왜 이름을 점순이로 지었냐고 물으니 '점순이가 안 이쁘드나' 이러셨다. 옛날이니까 딸이 여럿이라 돌림자로 이름을 붙인 거다. 7녀 1남 중 다섯째다. 막내가 아들이다.

프레시안 : 공장은 보통 교대근무로 돌아가는데, 이곳도 교대 근무인가.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나.

황점순 : 주간 2교대로 8시간 근무하고 있다. 2시간 마다 공정을 순환해서 하루 1만개 가까운 부품을 컨베이어벨트에 걸고 내리는 작업을 한다. 아침 조로 출근하면 아침 7시부터 오후 3시 40분까지 근무한다. 아침 조일 때는 오전 5시 50분에 집을 나선다. 저녁 조는 오후 3시 40분부터 업무를 시작해서 밤 12시 20분에 끝난다. 저녁 조로 일한 뒤 집에 도착해서 잘 준비를 하면 새벽 2시 쯤 잠에 든다.

프레시안 : 23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입사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신다. 다스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어떻게 되나.

황점순 : 이 회사를 들어오기 전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일을 많이 해봤다. 참 긴 이야기인데 처음부터 이야기해도 되나.

프레시안 : 그럼요. 처음 일을 시작하셨을 때는 몇 살이었나.

황점순 : 처음 일을 시작한 건 18살이었다. 경북 봉화에서 살고 있었는데, 일하면서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말에 김해에 있는 한일합섬방직공장에 입사했다. 그땐 딸들한테 투자를 잘 안했다. 당시 김해합섬 안에는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가 있었다. 기숙사에 살면서 3교대로 낮에는 일을 하고 야간에는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우리보고 그랬어. '공순이'라고. 일하면서 고등학교 졸업장을 땄다.

▲<프레시안>은 지난달 22일 경북 경주에 위치한 자동차 시트 기업 '다스'를 찾아 24년 째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황점순 씨를 만났다. ⓒ프레시안(박정연)

프레시안 : 낮에는 일하고 밤에 공부하면 제대로 잠은 잘 수 있었나. 8시간을 일해야 하고 고등학교 공부는 따로 공부 시간도 필요했을 텐데.

황점순 :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한일합섬에 온 여자아이들이 다 배우려고 왔기 때문에 일하면서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크게 힘들다는 걸 몰랐던 것 같다. 내가 있을 때만해도 관리직급은 다 남성이었지만 여자 사원이 3000명이나 됐다. 한 반에 학생들이 70명 가까이 됐고 기숙사도 8개동이 있었다. 나는 18살에 1학년으로 입학해서 20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잠을 거의 못자다 시피 했지만, 그게 크게 힘들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는 게 다 그렇지 않나.

프레시안 : 그럼 18살부터 6년 동안 한일합섬방직공장에서 일을 하시고 나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

황점순 : 여동생이 수원에 있는 삼성전기에서 일하고 있어서 그 쪽에 방을 얻었다. 동생을 따라 그 곳에 입사해서 또 공장에 다녔다. 거기서 일하다가 엄마가 고향 남자를 소개해서 24살에 결혼했다. 경주로 내려와서 아이 둘을 낳았다. 그러면서 삼성생명에서 보험도 팔아봤고, 식당에서 서빙도 해봤고, 포터트럭에 과일장사도 해봤고, 붕어빵 장사도 했다. 처음에는 남편이 직장에 적응을 잘 못해서 장사를 시작했는데, 장사를 해보니 안정된 수입이 있어야 아이들을 키우겠더라. 그래서 다시 공장에 가려고 하는데 지인이 대부기공(다스의 전신)에 입사하라고 소개해줘서 35살에 이 회사에 취직했다.

프레시안 : 다시 공장에서 일한다고 했을 때 가족들의 반응이 어땠나.

황점순 : 가족들의 응원이 대단했다. 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엄마가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해서 견학오고 그랬다. 일요일 특근하는 날에는 아들이 직접 와서 이모들 청소하지 말라고 하면서 직접 청소도 해줬다. 격려가 대단했다. 남편도 좋아했지. 뭐든지 잘 할 거라고 응원해줬다.

프레시안 : 그렇게 다스의 전신인 대부기공에 2000년부터 일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어떤 일을 했나.

황점순 : 처음에는 부품을 조립하는 조립반에 있었다가 잔업이 많아 돈을 더 벌 수 있는 도장반으로 넘어왔다. 부품에 색을 입히기 위해 부품을 움직이는 컨베이어벨트에 걸어야 하는데 무겁기도 하고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서 적응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제품이 무거워서 걸고 내릴 때 손목이랑 허리가 아팠다. 노하우가 없어서 힘으로만 하다보니까 다치기도 했다. 콤비아가 내려오면서 각자 위치에 선 사람들의 손을 따라 간다. 내 앞의 빠른 사람은 벌써 자기 일해놓고 기다리는데 나는 아직 걸지도 못했고, 컨베이어벨트는 '슬슬' 내려오니 애가 탄다. 당시는 용을 쓰고 일했다. 지금이야 노하우가 있어서 천천히 걸어도 시간이 남지만 그때는 참 힘들었다.

처음 대부기공에 왔을 당시는 12시간 주야 맞교대를 했었다. 아침 7시부터 일하면 저녁 7시까지, 저녁 7시부터 일하면 아침 7시까지 일했다. 일하는 사람들이 잠을 못자서 얼굴이 아주 노르께했다. 지금은 아이들이 커서 할 일이 없었지만 당시에는 아이들이 초등학생이고 어리니까 애들 뒷바라지까지 같이 하느라 참 힘들었다. 너무 힘들었다. 야근하고 나면 얼굴이 다들 노래. 선택권이 없었다. 입사하고 나면 교대 근무 조건으로 A조나 B조에 속해서 번갈아 교대 근무를 했지. 맞교대에서 8시간 2교대로 바꾼 지 얼마 안되었다. 10년 밖에 안 됐을걸.

프레시안 : 당시 일하는 환경이 참 어려웠겠다.

황점순 : 환경이 참 열악했다. 냉난방이 안 됐다. 겨울이면 석유난로를 중간에 갖다 놓고 일하는데, 손이 얼어서 작업을 못할 정도가 되어야지 가서 불 쬐서 손 녹이고 다시 일하고 그랬다. 여름에 에어컨은 꿈도 못 꿨지. 대형 선풍기도 띄엄띄엄 있어서 덥기는 또 얼마나 더운지. 참 힘들었다. 일도 힘든데 근무 시간이 길어서 잠을 못 잔 게 제일 힘들었다. 철야 하는 날에는 36시간을 일했다.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저녁 7시까지 하고, 바로 이어서 다음날 아침 7시까지 일하고나면 다시 내가 출근해야 할 아침 7시가 되었다. 말 그대로 하루를 꼬박 샌 거다.

프레시안 : 그렇게 밤을 꼬박 새서 지속적으로 일하면 사람이 정말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아픈 사람들은 없었나.

황점순 : 지금 생각해보면 '깡다구'로 버텼다. 밤에 일할 때는 모르는데 아침 근무할 때 몽롱해서 밥을 먹으러 가기 힘들 정도였다. 피로회복제를 먹으면서 잠을 버텼다. 그러다가 작업환경이 바뀐 게 2008년도부터 금속노조로 전환 되면서다. 그 전까지는 복지라고 불릴 게 전무했는데 탈의실과 샤워실도 리모델링하고 에어컨도 생기고 회사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프레시안 :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와 지금의 월급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황점순 :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시급 2000원이었다. 일하는 거에 비하면 적어서 늘 철야와 특근, 잔업을 해야 했다. 지금은 노조가 생기고 임금협상을 꾸준히 해서 그때와는 차이가 많이 난다. 나이 60에 이 만큼을 벌 수 있겠나 할 정도로 번다.

프레시안 : 자동차 시트 공장인 다스의 여성 비율은 어느 정도인가.

황점순 : 생산직 752명 중에 여성은 60명이다. 옛날보다 줄어든 편이다. 그 전에는 110명 정도였는데 해마다 퇴직자가 늘어나서 이제는 10%가 채 안 된다. 공장이 기계화 하면서 여성들이 기계 잡는 것을 두려워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내가 배워서 할 수 있겠나' 하는 선입견도 있을 테고. 여성들이 자신 없어 하니까 남자들이 '비켜보소 내가 할게요' 한다.

프레시안 : 현장에서 사람을 칭할 때 직군을 부르는 문화가 있는 것 같더라. 도장이면 "도장"으로 부르는 식인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부르나.

황점순 : 주로 현장에서 나를 '아지매'라고 부른다. '점수이 아지매'라고 부른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이모'나 '이모님'이라고 부른다. 여자들은 직급이 거의 없다. 그래서 참 애매하다. 여성들은 뚜렷한 직책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다 평사원이다. 전에는 여자 조장이 있었는데 퇴직했다. 그리고 나서 여자들은 직급을 거의 달지 않는다. 대부분 평사원으로 퇴직한다.

▲<프레시안>은 지난달 22일 경북 경주에 위치한 자동차 시트 기업 '다스'를 찾아 24년 째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황점순 씨를 만났다. ⓒ프레시안(박정연)

프레시안 : 여성들은 대부분 평사원으로 퇴직한다고 했는데 여성 관리직이 적은 이유가 있나.

황점순 : 일단 여성이 적기도 하고 선뜻 나서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회사에서 여자들에게 '무슨 직책 맡아볼래요'라고 제안하지도 않는다. 여자들은 거의 안 시키는 분위기다. 30년 있어도 그냥 일반 사원으로 퇴직한다.

프레시안 : 여성의 비율이 낮고 남성이 많은 공장의 분위기에 어떻게 적응했나.

황점순 : 노조에서 성차별 성희롱 예방 교육을 주기적으로 하기 때문에 그나마 괜찮은 편에 속한다. 경상도에 '남자우월사상'이 있다 보니까. 처음 들어왔을 때는 여자라고 좀 깔보는 경향이 있었다. 여성이 직장 나오면 먹고살기 어려워서 나온 것처럼 생각하고 남자는 집안의 가장이라고 치켜세워주고 자랑스럽게 돈을 벌었다. 나도 우리집에서 가장이었는데 여성들을 무시하는 느낌이 있었다. 그래도 그런 시선들은 무시하면서 일했다. 일할 수 있다는 자체가 즐거웠고 돈도 벌수 있으니까.

프레시안 : 남자가 일하면 가장이니까 치켜세워주고, 여자가 일하면 처량하게 보는 시선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 같다. 똑같은 일을 하는 노동자이지 않나.

황점순 :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작업환경에서 일하는데 청소는 여자들만 담당했던 때도 있었다. 작업 전 후의 정리정돈같은 일들을 여자만 했다. 그러다 2008년 금속노조로 전환된 이후에 남자도 다 같이 빗자루 들고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문화도 바뀌었다. 이제는 떳떳하고 당당하게 일한다. 여자라고 깔보면 안 된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된 것 같다.

프레시안 : 일하면서 또 다른 어려운 점은 없었나.

황점순 : 옛날에는 반장의 권력이 많이 셌다. '신격화' 됐다고 표현했다. 일요일 특근을 못 한다고 하거나, 술 먹자고 하는데 안 간다고 하면 '니 대가리가 몇 개고'라고 말했다. 잘려도 괜찮냐는 거지. 한 번은 '보따리 싸가지고 나갈래' 이러기도 했다. 내가 너를 자를 수도 있으니까 잘 보이라는 거다. 반장이 근무조를 편성하니까 순번대로 공평하게 돌아가는 게 아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잔업을 더 주는 식의 조치가 있었다. 일이 힘들어도 일을 많이 해야 돈을 벌 수 있으니까 사람들이 잔업을 원한다. 그러니 반장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다. 그게 좀 치사했다. 예를 들어 업무 중에 잠깐 화장실 간다고 해도 '휴식시간에 안 갔다오고 뭐했노' 이런 식으로 눈치를 주니 생리적인 현상도 참아야 했다. 그러다가 금속노조가 들어오면서 '조반장 평가제'를 도입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때 반장 밑에 있는 사람들이 직접 반장을 평가하니 반장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를 3명 정도 받았다. 그 사람들은 결국 반장직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때 사내 분위기가 많이 바뀌고 반장들도 권위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프레시안 : 잠을 못자서 얼굴이 노래진 적도, 여자라고 무시당한 적도 있었지만 황점순씨는 23년 5개월동안 이 공장에서 일했다. 그렇게 일할 수 있었던 동기는 무엇인가.

황점순 : 집안이 어렵고 신랑도 직장생활을 오래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내가 가장처럼 일을 시작하기는 했다. 딱히 수입이 없으니까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직장에 오래 나오니까 점차 내 인생에 자신감이 생겼다. 일하면서 좋은 동료들도 만나고, 그들과 탈의실에서 잠깐 서로 사는 이야기 하는 게 내 인생에 생기를 불어 넣어줬다. 주간과 야간이 교대하기 전 30분 여유가 있으면 부서 힘든 이야기도 하고, 사는 이야기도 공유하는 시간들이 나를 버티게 하는 시간이었다.

프레시안 : 일하면서 자부심을 느끼는 순간도 있었을 것 같다.

황점순 : 내가 직접 돈을 버니까 베풀 수 있는 마음도 생기고 자부심을 느낀다. 아들 결혼할 때 집도 사줬다. 고정된 수입이 있으니까 지인들한테도 조금이나마 베풀 수 있어서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이 재미있다. 일하면서 활력이 생긴다. 오래 일을 하다보니 노하우가 생기고 여유로움도 생겼다. 마음이 맞는 동료들끼리 한 공간에서 이야기하면서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날 기쁘게 한다. 출근하는 것 자체가 좋고, 출근할 곳이 있다는 게 좋다.

▲<프레시안>은 지난달 22일 경북 경주에 위치한 자동차 시트 기업 '다스'를 찾아 24년 째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황점순 씨를 만났다. ⓒ프레시안(박정연)

프레시안 : 경력이 오래 되셨으니 일하면서 이것 만큼은 내가 자신 있다 하는 지점이 있나.

황점순 : 신입이 부품을 컨베이어벨트에 걸 때 방향이 안 맞으면 낙하물이 생겨서 불량이 발생한다. 그냥 부품을 마구잡이로 거는 것 같아 보여도 일정 규격과 간격을 잘 맞춰 걸어야 낙하물이 없다. 나는 그 규격을 정말 잘 맞춰서 불량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게 내 노하우다.

프레시안 : 일하는 모습을 보니까 부품의 기름이나 페인팅이 묻는 걸 방지하기 위해 앞치마와 토시, 그리고 장갑을 꼭 착용하시더라. 일할 때 필수적인 그 도구들은 황점순님께 어떤 의미인가.

황점순 : 프레스에서 찍어나오는 제품에 기름이 묻어 있어서 앞치마를 착용하고 제품이 뾰족해서 긁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토시를 입는다. 3겹의 장갑을 끼는 것은 기름이 손에 묻는 것을 방지해주고 부품을 걸고 내릴 때 미끄러움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내게는 아주 소중한 물건들이다. 없어선 안 될 꼭 필요한 것이다. 그 준비물들이 있어야만 일할 수 있다.

프레시안 : 앞으로 일터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나 꿈이 있나.

황점순 : 동료들에게 좋은 동료로 남고 싶다. 정년까지 2년 남았다. 남은 기간 최선을 다하고, 건강관리도 잘 해서 회사에 덕을 끼치고 좋게 마무리 했으면 좋겠다.

프레시안 : 동시대를 살아가는 일하는 사람들에게 해주실 말씀이 있다면.

황점순 : 오래 일하기 위해서는 자존심보다는 자부심을 갖고 일해야 한다. 자존심만 있으면 상처받아서 스스로 그만두기도 하는데, 내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멀리 보면서 오래오래 일했으면 좋겠다.

▲<프레시안>은 지난달 22일 경북 경주에 위치한 자동차 시트 기업 '다스'를 찾아 24년 째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황점순 씨를 만났다. ⓒ프레시안(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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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연
프레시안 박정연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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