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관점이 기후정의 담론의 주요 의제가 되어야 한다."
얼핏 관계없어 보이는 두 개념, '기후위기'와 '페미니즘'이 만났다. 여성환경연대, 동물해방물결, 민달팽이유니온 등 11개 여성·시민사회 단체들은 19일 오전 서울 중구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성장과 개발'에 반대하고 '탈성장과 돌봄사회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페미니스트 기후정의 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이 말하는 '페미니즘의 관점'이란 "여성, 청년, 성소수자, 비인간동물을 모두 포함한" 관점이다. 이들은 구체적으로는 △돌봄의 공공성 확보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 보장 △기후대응 정책 전반에 젠더관점 반영 △탈중앙집권적 기후위기 대응책 마련 △젠더관점이 포함된 정의로운 전환 요구 △종평등 사회로의 전환 △핵발전, 석탄발전 계획 폐기 △주거불평등 해결 △여성농민 권리 보장 및 식량주권 확보 △국제사회 책임 이행 등을 페미니스트 기후정의 10대 원칙으로 제시했다.기후위기, 왜 페미니즘으로 접근해야 하나
기후위기에 대한 페미니즘적 접근의 필요성은 1992년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의 채택 이후 지속적으로 제기돼온 국제적 기후담론이다. 기후위기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게 위협을 가하지만 그중에서도 사회적 취약계층에 더욱 큰 악영향을 미친다. 유엔(UN)이 상정하는 가장 대표적인 취약계층 체계가 바로 '젠더'다. 실제로 유엔개발계획(UNDP)의 2016년 보고서에 따르면 현대사회에 일어난 주요 재해참사에서 여성 및 아동의 사망 가능성은 남성에 비해 14배 더 컸다. 코로나19로 인한 저임금 여성노동자 대량해고 현상에서 볼 수 있듯, 재난 발생 시의 사회·경제적 피해에 있어서도 성별격차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기후위기로 인한 재난은 성차별적'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성평등 관점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 배경이다. 국제사회도 움직여왔다. 2015년 파리에서 열린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에서 당사국들은 '성평등적 기후위기재난대응 정책 수립'을 협약에 명문화했고, 이어 2017년 총회(COP23)에선 '젠더 주류화 정책' 추진을 위한 성평등주력프로그램이 채택됐다.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이날 현장에 모인 페미니스트들은 UNFCCC의 당사자국인 한국이 "여전히 젠더 주류화를 위한 계획을 전혀 반영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사라 여성환경연대 활동가는 특히 "(한국에선) 가장 기초적인 성별분리통계가 제대로 생산되지 않고 있고, 기후재난에 관한 성별영향평가도 이루어지지 않아 성별에 따른 구체적인 피해 규모 파악과 대응책 마련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평했다. 성평등 관점의 기후행동이란 정치·사회·경제 분야에 있어서의 여성 참여 및 대표성 강화, 성평등적 기후정책의 수립 지원, 성별·연령·장애 등에 따른 세분화된 분리 데이터의 수집 및 분석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여성가족부 폐지 기조를 확고히 하는 등 젠더사업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한국의 경우, 정부의 의지가 약하니 성평등 기후행동의 시작부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사라 활동가는 "기후 대응 정책을 기획하고 실행할 때 기후위기와 기후재난에 더 취약한 여성, 소수자, 장애인, 청소년을 고려하여 성인지적인 관점을 반영"해야 한다며 △기후재난 발생 시 성별 분리통계 생산 적용 의무화 △기후재난에 관한 성별영향평가의 실시 △기후위기 대응 정책 전반의 젠더 주류화 실행을 위한 젠더행동계획 수립 등을 정부에 요구했다.기후위기의 '원인'에도 성차별이 있다?
이날 11개 단체들은 기후위기의 '결과'뿐만 아니라 '원인'에도 성차별적인 요소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기후위기는 인간뿐만 아니라 생태계 전반의 지구 생명체에 대한 끊임없는 착취의 결과물"이며, 이 같은 무분별한 착취를 가능하게 한 구조가 바로 "가부장제 자본주의"라는 게 이들의 지적이다. 이들은 "가부장제적 자본주의는 주류남성에 포함되지 않은 여성과 노동할 수 없는 몸을 가진 존재인 비인간종(동물 등)을 끊임없이 배제하고 소외하면서 불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왔다"며 기후위기를 촉발한 "성장과 개발 중심의 경제 시스템"이 바로 "남성중심의 경제 시스템"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현장을 찾은 나영 셰어(SHARE) 대표는 특히 가부장제 자본주의가 촉발한 양대 위기로 기후위기와 재생산(저출산) 위기를 들며 "기후위기와 재생산 위기, 돌봄의 위기를 불러일으킨 원인은 경제성장만을 위해 성과 재생산을 통제해온 현 체제에 있다"고 지적했다. 나영 대표에 따르면 여성들은 "국가의 필요에 따라 출산을 제한 당했다가 다시 출산과 돌봄을 요구받는" 등 경제발전을 위해 '자원화'돼왔다. 그리고 이 같은 정부의 인구정책 기조는 가부장제 자본주의의 자원착취 시스템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나영 대표는 "생산성 있는 노동과 자원을 관리하기 위해 여성과 소수자, 비인간, 동물의 성과 재생산을 통제하고 착취해온 세계, 막대한 개발로 삶의 터전과 생태계를 파괴해온 세계가 위기의 근원"이라며 "(앞으로는) 인구정책이 아닌 성 건강과 재생산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는 보편적 지원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과 돌봄공동체에 대한 차별 해소 △공동 자원 및 돌봄 네트워크 지원 △이주민, 난민, 장애인, 성소수자, 홈리스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지원 체계 구축 등을 '재생산 정의로의 사회체제 전환'을 위한 구체적인 과제로 제시했다.정부는 여전히 '성장'만 외쳐 … "탈성장 돌봄사회로 전환 필요"
단체들은 이 같은 '전환'의 핵심 키워드로 '탈성장'을 제시했다. 기후위기 해소 또는 완화를 위해선 결국 "지구를 파헤치고 오염시키는 무한한 상품생산과 경제성장이 아니라, 유한한 필요와 풍요를 평등하게 나누는 탈성장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면 이들은 원자력발전 강화, 녹색성장 등 정부가 표방하는 개발 및 성장 위주의 기후위기 대응 기조에는 "국가는 여전히 성장을 목표로 한 잘못된 대안을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다"라며 비판적인 입장을 전했다. 이날 발표한 페미니스트 기후정의 선언문에서 이들은 "기업친화적인 정책과 핵발전 기반의 에너지 정책은 결코 (기후위기의) 대안이 될 수 없다"라며 "지금 당장 착취를 기반으로 한 성장, 불평등을 가속화시키는 체제를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오는 23일엔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기후위기 대응을 촉구하는 기후정의행진이 서울 및 전국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여한 11개 단체들은 "우리는 탈성장 돌봄사회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모아 다가올 9.23 기후정의행진, 11월 말 두바이 COP28 회의에서도 (그 목소리를) 울려 퍼지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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