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는 곧 농업-식량위기
그 중 첫 번째는 농업이다. 신석기혁명부터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주로 농업에 의존해 식량을 생산해 왔다. 농업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주된 작물이었던 불과 몇 종의 곡물, 즉 밀, 쌀, 옥수수 등이 지금도 영양 공급의 막대한 부분을 차지한다. 현대에는 축산업 역시 곡물 사료에 의존하기에 실은 육류 역시 '변형된 곡물'이라 할 수 있다. 80억 인구가 이렇게 농업에 기대 살아간다. 그러나 현대 한국인을 비롯해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 대다수 시민은 이런 진실을 그리 실감하지 못한다. 인구 대부분이 대도시에서 생활하며, 식량을 생산하는 현장은 이들의 시야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심지어 대한민국 같은 나라에서는 그 현장이 바다 건너로까지 격리돼 있다. 자본주의 성장의 토대가 된 농업 생산성 혁명이 이룬 위업이고, 여기에 자유무역이라는 제도까지 힘을 보탠 결과다. 덕분에 현재 우리 문명은 마치 농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치부하면서도 하루하루 별 문제없이 돌아간다. 반도체나 자동차 수출 실적을 걱정하고 아파트 가격 등락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눈길이 온통 주식시장을 향할지언정 올해 작황에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는다. 농업에 의한 식량 생산이 여전히 문명의 기반을 이루지만, 이는 지나치게 높이 쌓아 올린 현대 문명의 가장 밑바닥에 꽁꽁 숨어 있는 격이다. 심지어는 '보릿고개'를 기억하는 세대가 아직 생존해 있는 대한민국조차 그러하다. 한데 이런 우리 시대든, 만 년 전 신석기혁명 시대든, 농업에는 절대적인 전제조건이 있다. 그것은 기후의 항상성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기후의 예측 가능성이다. 물론 기후는 변동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껏 한 지역의 기후는, 비록 변덕을 부릴지라도 그 변덕조차 일정한 패턴을 보여 왔다. 사람이 내다볼 수 있는 변동의 폭이 있었고, 그 범위 안에서 조상들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농업을 할지 아니면 목축업을 할지, 농사를 짓는다면 무엇을 주곡으로 삼을지, 그리고 이에 따라 종자나 농법, 생활양식은 어떻게 발전시킬지 등등을 말이다. 기후위기는 바로 이 전제조건을 뒤흔든다. 더는 기후의 예측 가능성을 말할 수 없게 된다. 해가 갈수록 기후는 더욱더 큰 폭으로 요동친다. 모든 지역의 모든 패턴이 무너진다. 수천 년, 길게는 지난 만 년 동안 당연시하던 것들이 더는 당연하지 않게 된다. 작년에는 쉬지 않고 이어지는 가을 태풍에 진저리를 쳤지만, 올해는 태풍이 아니라 마치 여름 같은 온도와 습도가 이어진다. 같은 대륙에 속함에도 중국 동북부는 가을철 이상 한파에 꽁꽁 얼어붙고, 한반도는 여름이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이런 상황에서는 농업이, 식량 생산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느닷없이 닥치는 가뭄, 홍수, 병충해 등으로 곡물 수확량이 들쭉날쭉하거나 점차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주곡 생산이 흔들릴수록 농업의 다른 부분이나 축산업도 압박을 받고, 가장 취약한 계층부터 식량 공급난에 처한다. 200여 년 전 프랑스혁명을 다룬 역사책에서나 보던, 빵 값 탓에 불붙은 폭동과 혁명이 21세기의 현실로 돌아온다. 적도에 가까운 지역들에서는 벌써 2010년대부터 이런 상황을 체감했고, 이것이 2011년 '아랍의 봄'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시차는 있지만, 온대 지역도 예외일 수 없다. 특히 한국처럼 쌀 외에 거의 모든 농산물을 수입에 의존하는 나라는 앞으로 심각한 긴장과 충격을 겪게 될 것이다. 단지 농업 비중이 줄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농업 역량이 소멸하고 세대 전승이 끊긴 탓에 한국 사회는 다른 어떤 공업국보다 더 커다란 타격을 받을 것이다. 혹자는 온대 농업에서 아열대 농업으로 전환하면 되지 않겠냐고 속 편한 이야기를 하지만, <Hothouse Earth>(국역본 제목은 <기후변화, 그게 좀 심각합니다>, 이민희 옮김, 양철북, 2023)의 저자 빌 맥과이어가 들려주는 답변은 냉정하다."지구에서 일부 지역이 특정 작물을 재배하는 데 적합하지 않게 되면 다른 지역이 적합해지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습니다. 이는 명백한 착각입니다. 예를 들어 영국의 기온이 앞으로 계속 오르고 서리가 줄어들면 언뜻 포도를 재배하는 데 더 적합한 환경이 만들어질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극심한 홍수, 폭염, 가뭄, 신종 해충과 싸워야 할 것입니다. 농업에 관한 한 지구 가열화 게임에서 승자는 없습니다. 모두 패배합니다." (<기후변화, 그게 좀 심각합니다> 제4장 '온실지구'에서)
이런 위험에 처하고 나서야 우리는 현대 문명이 농업이라는 오래 된 토대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불안한 건축물임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건축물이 손 쓸 수 없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난 다음일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기후위기가 예고하는 가장 두려운 시나리오다.또 다른 불안한 건축물 - 국민국가들로 구획된 세계
그래도 기후위기가 곧 농업-식량위기라는 점에 관해서는 그나마 경고의 목소리가 들린다(<식량위기 대한민국>, 남재작 지음, 웨일북, 2022 ; <6번째 대멸종 시그널, 식량 전쟁> 남재철 지음, 21세기북스, 2023). 하지만 지금껏 우리가 당연시해 온 또 다른 문명의 요소는 이 정도 주목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국민국가들로 구획된 지구 정치 질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구 제국주의가 퇴각하고 난 뒤에 옛 제국들의 식민지였던 광대한 지역에 신흥 국민국가들이 들어섰다. 물론 이것은 말처럼 순조로운 과정은 아니었다. 무려 1970년대까지도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물러나길 거부했고, 본국에서 혁명의 일격을 당한 뒤에야 결국 철수했다. 아무튼 이로써 국민국가들이 유럽과 아메리카뿐만 아니라 모든 대륙을 가득 채우는 세상, 즉 국민국가들이 지구 위를 촘촘히 구획하는 세상이 등장했다. 1940년대 말에 분단국가라는 반쪽짜리 국민국가로나마 이 대열에 합류한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이런 세상은 공기 중의 산소나 바닷물 속 염분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대다수 인류가 이제는 같은 심정일 것이다. 현재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그토록 기이하게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은 누가 봐도 국가와 국가의 충돌은 아니다. 그렇다고 옛 제국과 식민지의 대립 구도에 딱 들어맞는 것도 아니다. 국가(이스라엘)와 국가 없는 이들(팔레스타인)이 맞붙고 있다. 이것은 국민국가들로 구획된 세상을 당연시하는 상식 안에는 설 곳이 없는 너무도 예외적인 현실이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대다수 세계인의 상식을 불안에 빠뜨리는 기분 나쁜 얼룩과도 같다. 서안과 가자 지구의 참상은 국민국가들로 구획된 지구 질서가 굳건한 현실이기보다는 오히려 허구에 가까움을 폭로한다. 그럼에도 당장은 다들 이 불쾌한 얼룩에서 눈을 돌릴 수 있다. 팔레스타인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하지만 단 하나뿐인(분명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예외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자신이 거하는 국민국가들의 질서 속에서 일상의 평온함을 만끽할 수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기후위기는 또 다른 근본적 충격을 던진다. <기후위기, 그게 좀 심각합니다>에서 맥과이어는 농업-식량위기와 더불어 기후급변이 초래할 게 확실한 사태를 하나 더 지적한다. 그것은 대규모 기후 난민·이민이다. 바닷물이 도시로 밀려들고 빈번한 가뭄, 홍수, 산불로 땅이 황폐해지면, 다른 도리가 없다. 본래 살던 곳을 떠나 새 터전을 찾아 헤매야 한다. 이런 이주는 한 나라 안에서 일어날 수도 있지만, 기후급변의 거대한 규모로 봤을 때 기존 국경을 넘어서는 대이주가 더욱 빈번히 전개될 것이다. 맥과이어는 2060년까지 12억 명이 난민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을 인용한다(위의 책, 제8장 '기후 전쟁'에서). 지나치게 비관적인 과장된 전망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인류는 2010년대 초부터 벌써 그 초기 양상을 경험하고 있다. 맥과이어에 따르면, 2010년 이후 기후 붕괴 탓에 고향을 떠난 인구는 2억 명으로 추산된다. 이 시기에 유럽과 미국을 난민·이민 문제로 들썩이게 만든 아랍인이나 중미인의 이주 동기는 겉으로만 보면 '아랍의 봄' 이후의 정정 불안과 기근, 일자리 부족이다. 그러나 '아랍의 봄'을 부추긴 식량 가격 폭등이든 중미의 농업 붕괴든 모두 기후급변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기후 난민·이민은 이미 시작됐다. 10억 단위를 넘보는 규모로 사람들이 이동한다면, 이는 그간 안정적으로만 여겨지던 국민국가들의 질서를 뒤흔들 것이다. 국경을 둘러싼 긴장이 높아지고, 각국의 시민 자격을 놓고 논란이 계속될 것이다. 또한 그럴수록 각국(핵무기를 보유한 강대국들을 포함하는)이 무력을 통해 난국을 타개하려 할 가능성도 늘어날 것이다. 오래 전 고대 제국들은 다름 아닌 변방 민족들의 대이주 탓에 무너지고 말았다. 국민국가들로 구획된 현대 세계는 기후위기가 강요하는 대이주에 직면해 이 운명을 반복할지 모른다. 달리 말하면, 이는 대다수 인류와 상관없는 극단적 예외라 치부돼 온 팔레스타인 문제가 지구 전체에 '일반화'되는 사태라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팔레스타인 문제란 지독하게 배타적인 국민국가와 국가 없는 민중 사이의 대치다. 만약 인류의 극적인 탈탄소화가 불발로 끝난다면, 기후급변은 지구상의 모든 기존 국민국가들을 지극히 '배타적인' 구명선 국가로 전락시킬 것이며, 국가 없는 유랑민을 양산할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이 화해할 길 없는 갈등에 빠져드는 세상을 열 것이다.새로운 정치적 발명의 시대가 열려야 한다
팔레스타인 문제가 기존의 '국가'나 '시민' 관념만으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힘든 것처럼, 기후 난민·이민의 충격 역시 국민국가들로 구획된 지구 정치 질서에만 갇혀서는 답을 내기 어렵다. 지구본을 내려다보며 국경, 정부, 권력만을 염두에 둘 때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면, 문제에 접근하는 방향을 정반대로 바꿔야 한다. 아래로부터, 즉 위험에 놓인 시민 각자의 시각에서 다시 바라봐야 한다. 국민국가의 테두리가 먼저가 아니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권리와 의무가 먼저다. 지금 문제의 핵심은 국민국가를 유일한 의지처로 삼아서는 더는 이 권리와 의무를 현실로 살려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국민국가를 포함하면서도 그에 한정되지 않는 중층적 질서를 통해 시민의 권리와 의무가 작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최소한 도시, 국민국가, 국가 간 연합, 세계(지구) 등의 층위들이 공존하며 교차하는 정치 질서를 통해 모든 인간이 시민의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수행하게 만들어야 한다. 애초에 그랬어야 할 일이다. 기후 난민·이민이 국경을 넘어선 문제이기 이전에 탈탄소화 노력 자체가 지구 차원에서 추진되었어야 할 과제다. 그런데도 우리는 재생가능에너지, 신세대 핵발전, 스마트 그리드, 지구 공학 등 온갖 기술의 '발명'을 촉구하면서도 기후위기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정치 관념과 질서의 '발명'에는 무지하고 무감했다. 마치 공학 세계와는 달리 정치 세계에서는 발명의 시대가 20세기와 함께 영영 끝나버린 것처럼 말이다. 과거 혁명들의 시절처럼 다시 정치적 발명의 시대가 열려야 한다. 이번 과제는 국민국가라는 단일 평면이 아니라 다층의 복합 질서를 통해 인간=시민의 삶을 보장하는 것이다. 사실 기후위기가 아니더라도, 구식의 국민국가 완성이라는 관념으로는 더 이상 평화와 통일을 진전시킬 수 없게 된 한반도에서 이는 이미 절박한 현안이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이 전 지구적 난제의 풀이에 앞장서서 뛰어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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